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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터이지만 상처가 되진 않았다.

왜냐하면 극복했기 때문이다.

by 따뜻한 불꽃 소예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이 있다. 나는 이 작은 조직에서 이런 아이히만들을 매일 같이 목도하게 되어 이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아이히만은 나치시절 유대인 학살을 자행한 인물이다. 그는 수많은 유태인들을 죽였음에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은 채 법정에서 드라이하게 '나는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증언하였으며, 그 내용은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집필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담겼다.


한나 아렌트는 이 책에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설명했다. 그녀는 개인적으로는 너무 선량하고, 가족에게는 꽤 괜찮은 아빠, 남편일 수 있었던 이들이 어떻게 극악무도한 범죄에 가담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그것은 그들이 사이코패스라서가 아니라, 사고하지 않는 인간이 경직된 시스템 안에서 무비판적으로 명령을 수행할 때 누구나 악을 행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 특정한 환경이란 '사고가 결여된 관료주의적 조직'이며, 그 안에서는 누구나 컨베이어벨트 위의 구성원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이 역사책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나는 지금 내가 다니는 회사, 이 작은 조직에서 매일같이 이런 '사고하지 않는 시스템'과 마주하고 있다. 사람들이 누군가를 집단적으로 따돌리고, 이견을 제시한 이를 배척하며, 권력자에게 무비판적으로 충성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과거에 그들은 파벌을 만들고 약자를 고립시켰으며, 그 결과 몇몇 직원들은 결국 회사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누구도 그 과정이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사과도, 반성도 없었다.


내가 가장 충격받았던 것은, 이들이 진심으로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믿는다는 점이었다. "나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태도. "그건 내 책임이 아니다"라는 회피. 그리고 무엇보다, 누군가가 고통을 받는 현장을 지켜보면서도 그저 침묵하는 다수의 태도. 나치 시절에도, 군사 독재 하에서도, 아프가니스탄 수용소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지금 이곳에도 그 패턴은 반복되고 있었다.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사고를 멈추는 이유는 자신에게 힘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나는 그저 하나의 부품일 뿐이고, 내가 하는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알 수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분업화, 외주화, 글로벌 체계 속에서 책임은 분산되고, 양심은 흐려진다. 하지만 아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말과 행동, 침묵과 외면에 책임이 있다. 우리가 남기는 건 결국 우리의 카르마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겪은 이 일련의 상황들을 흘려보내기로 했다. 흉터는 남겠지만, 상처로 남기지 않기 위해서다. 나는 그 상황에서도 사고했고, 말했고, 책임졌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나는 스스로에게 말해준다. 인간성에 대한 회의가 들기도 했지만, 여기에 머물러 있지는 않겠다. 나는 다시 일어설 것이다.



흉터

흉터가 돼라. 어떤 것을 살아 낸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네이이라 와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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