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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상에서 벗어난다는 말

집착하는 마음을 내려놓는다는 뜻

by 따뜻한 불꽃 소예

주말에는 친정식구 모임이 있었다. 아버지 생신을 맞이해서 모두 모였다. 하지만 남편은 체력이 좋지 않아 참석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사실 기분이 나빴다. 나는 시댁식구 행사에 모두 다 참석하고, 시어머니에게도 전화를 자주 드리며 노력하려고 한다. 하지만 남편은 이번뿐만이 아니라 정말 사위 노릇을 하나도 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우리 엄마의 전화도 피한다. 얼마 전에는 남편이 나에게 시어머니께 전화를 자주 해라고 말했던 거까지 떠올랐다. 바로 그 지점이 나를 불편하게 했고, 무엇인가 모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주말 내내, '내 생각이 만들어 낸 허상'으로 고통받았다. 애써, 불편한 내 감정과 나를 분리시키려고 노력했지만, 그 불편한 내 감정은 이내 사라지지 않았다.


한 스님의 법문에서 본인이 아버지 병시중을 한 이야기를 꺼내 말씀하셨다. 그 스님께서는 내 아버지라는 시각에서 그 상황을 받아들이려 했을 때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차라리 불쌍한 노인네 도와주자 이런 시각에서 접근하니, 오히려 맘이 훨씬 편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스님의 극진한 간호에 감동한 아버지께서 시골 땅을 상속으로 주겠다 하니, 벌쩍 뛰면서 안 받는다 하셨다고 한다. 바라는 마음으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양하셨다고 한다. 스님께서는 '나'만 왜? '다른 형제들은?' "나"라는 상에 머물게 되면 고통이 생기는 것이며, 만약 유산을 받으려는 바라는 마음으로 아버지를 간호했다면 아마도 더 큰 형제간의 다툼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나로 돌아와, 나는 왜 남편과 시댁을 그렇게 바라볼 수 없을까? 만약 내가 '시댁'이라는 단어에서 벗어나 그냥 독거노인을 챙기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몸이 아픈 사람을 내가 대신 도와주고 있다, 혹은 전생에 입은 은혜를 갚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지금 이 상황이 좀 더 편하게 느껴질까? '내 입장' 혹은 '나'와 연관된 무엇인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런 감정적 찌꺼기가 생기진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내 '내 입장'에서 지금의 상황을 바라보게 되기에 짜증이 나고 화가 났다.


남편이 아프고 난 뒤로, 이를 꽉 깨무는 습관이 생겼다. 나 스스로 참아야 한다고 이겨내야 한다고 다짐하느라 생긴 습관이다. 이렇게 참지 않고 정말로 모든 상황을 내가 그러려니 하고, 그냥 훌 털어버릴 수 있다면, 아마 조금은 편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도 남편이 이 정도 살만하니 내가 남편 흉을 보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나도 모르게 푸웃 웃음이 삐져나온다.


불교에서는 '아상'에서 벗어나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아닌 것에 집착하는 그 마음을 다 내려놓으라고 말이다.


어쩌면 나는 어떤 남편상에 집착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하는 노력' = '네가 나에게 줘야 하는 성의' 이런 유치한 계산이 나를 지배했기에 섭섭하고 화가 났는지도 몰겠다. 남편이 아픈 이 상황에서도 말이다. 참 나도 이기적인 사람이구나.


새삼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별 것도 아닌 집착과 욕심으로 스스로 괴로워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지금 이 순간에 나를 에워싼 삶의 충만함을 봐야겠다. 그러고 보니, 오늘 참 날씨가 아름답다.




모든 풍요의 원천은 당신의 외부에 있지 않다. 그것은 당신 자신의 일부이다. 그러나 먼저 바깥의 풍요를 느끼고 알아차리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당신을 에워싼 삶의 충만함을 보라. 피부에 닿는 햇살의 따스함, 꽃가게 앞에 놓인 꽃들의 아름다움, 깨어물면 과즙 풍부한 과일, 하늘에서 내리는 비의 풍요 속에 젖는 즐거움 등 모든 걸음마다 삶의 충만함이 있다. 자기 주위 모든 곳에 있는 풍요를 알아보는 것이 자기 안에서 잠자고 있는 풍요를 깨어나게 한다. 그런 후에 그 풍요를 밖으로 흘러나가게 하라. 낯선 사람에게 미소 지을 때, 그곳에 이미 에너지의 미세한 흘러나감이 있다. 당신은 주는 사람이 된 것이다.

-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 에그하르트 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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