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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 담장을 세워야겠다.

나를 세우는 일

by 따뜻한 불꽃 소예

나를 지키는 자비는, 결국 경계를 세우는 일에서 시작된다.


회사에서 불쾌한 일이 생겼다. 연차도 얼마 되지 않은 아이가 마치 자기가 무엇이라도 되는 듯, 내 일에 대해 감시하듯 채팅을 걸어왔다. 불쾌함이 확 밀려왔다. 확인해보겠다고 돌려보낸 뒤, 나는 내 안의 성난 마음을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예전에 학교에서 배웠던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Mending Wall」이 떠올랐다.
그땐 담장을 쌓는 일이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담장을 쌓는 건 사람 사이에 벽을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적절한 담장, 건강한 경계가 있어야 관계도 살아남는다고 생각한다. 좋은 경계가 결국엔 나를 지키는 일이라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깨닫게 된다.


나는 그동안 수없이 참았다. 회사에서도, 시어머니 앞에서도, 엄마 앞에서도, 남편에게도,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나는 성실한 일꾼이었고, 묵묵히 견디는 아내였고, 든든한 딸이었고, 말없이 감내하는 며느리였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내 몸과 마음은 어느새 말라갔다. 아무리 좋은 영양제를 먹어도 기운이 나지 않았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그건 몸이 보낸 명백한 신호였다.

과부하, 그리고 지탱할 수 없는 무게. 더 이상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경계를 세워야겠다고, 번쩍 정신이 들었다.


회사에도 말했다. “불편합니다. 불쾌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표까지 생각했다.
나는 내 존엄을 지킬 수 없다면, 그 어떤 자리도, 그 어떤 돈도 의미 없다는 것을 안다. 회사는 내 인생 전체가 아니니까.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내려놓을 수 있다.

가정에서도,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시어머니께 매주 드리던 전화를 한 달에 한 번으로 줄였다. ‘며느리는 그래야 한다’는 강박도 내려놓았다. 남편은 자신은 내 부모님께 전화 한 번 하지 않으면서, 나에게는 “우리 엄마한테 전화 드려”라고 말한다.
속으로 어이가 없었지만, 더는 설득하지 않기로 했다. 엄마의 끝없는 부정과 분노에도 이제는 같이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으려 한다. 그래, SPACE, 공간이 필요하다.


나는 지금껏 너무 많은 사람들을 배려하느라 내 몸 하나, 내 마음 하나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다.


하지만 환기가 안 되는 집엔 곰팡이가 피어난다. 몸도, 마음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자꾸 내 경계 안으로 칡넝쿨처럼 들어와 나를 감싸고 짓누르려 한다면, 나는 작두기를 들고 그 모든 것들을 잘라내야 한다. 나를 위한 담장을, 숨 쉴 수 있는 경계를 만들어야 한다. 나 자신이 살아야 하니까.


그래야 원망도, 미움도 사라지고 그 자리에 비로소 여유와 사랑이 자라날 수 있으니까.


Good fences make good neighbors.
오래전 배운 이 시의 한구절이, 지금의 나를 지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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