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로맨스 드라마를 끊지 못하는 이유
푹푹 찌는 여름이다. 입추가 지나도 한여름 같은 더위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숨이 턱턱 막히는 폭염 속에서 나는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마침 아들과의 TV 쟁탈전에서 이겨, 침대에 배를 깔고 리모컨을 이리저리 눌러댔다. 그렇게 우연히 보게 된 드라마가 있었다. 조선시대 여화공을 주인공으로 한 판타지 사극, '홍천기'
잘생긴 남자 주인공과 예쁜 여자 주인공이 등장하는 시대극은 늘 나를 들뜨게 해 준다. 여고시절 풀하우스라는 만화책에 푹 빠져 읽던 때처럼, 나는 어느새 화면 속 인물들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사실 이런 로맨스 드라마의 플롯은 거의 정형화되어 있다. 환경은 어렵지만 당차고 아름다운 여주인공, 그녀를 둘러싼 멋지고 돈 많은 남자들, 그리고 두 사람의 사랑을 가로막는 숱한 장애물들. 그러나 끝내 이루어지는 사랑. 시대가 달라지고 배경이 바뀌어도 이 구조는 크게 변하지 않는다. 오페라 속 영웅 서사처럼, 고난을 이겨내고 원하는 바를 손에 넣는 이야기다.
그런데 나는 이 뻔한 이야기에 매번 17살 소녀처럼 빠져든다. 마치 내가 드라마 속 예쁘고 재능 있는 여주인공이 된 듯 착각하고, 너무나 잘생긴 남자 주인공의 사랑을 받고 있는 듯한 기분에 젖는다. 왜 나는 여전히 이런 로맨스 판타지에 설레는 걸까?
생각해 보면, 현실의 고단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드라마 속 주인공들처럼 눈부시게 예쁘지도, 대단한 재능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겪는 고난 못지않은 무게가 내 삶에도 늘 있어 왔다. 무엇보다도, 나를 구원해 줄 '안효섭'같은 인물이 내 곁에 없다. 특히 하람[안효섭]이 홍천기에게 말하듯,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거라고! 네 잘못이 아니란 말이다. 어쩔 수 없는 일로 너를 탓하지 말라." 이런 대사를 해 줄 왕자님이 현실에는 없지만, 이런 대사를 들을때면 마치 지금의 나에게 건네는 위로 같았다.
불교의 법화경에는 화성유품(化城喩品)이라는 챕터가 있다. 이 장에서는 부처님께서 진리를 향해 정진하는 수행자를 위해 하나의 방편을 쓰신다. 열반의 길은 너무 멀고 험하기 때문에 수행자들이 지쳐 중도에 포기하려 할 때, 그들을 쉬게 하려고 중간에 '가짜 도시'를 만들어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진짜 목적지가 아니지만, 잠시 오아시스처럼 머물며 힘을 회복하게 한다.
내게 로맨스 드라마는 바로 그 가짜 도시, 오아시스다. 현실의 무게에서 잠시 도피해 환상 속에서 위로를 받는다. 물론 그것이 환상이라는 사실을 나는 잘 안다. 하지만 환상이라도 좋다. 그 속에서 나는 '나도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잠시 확인한다.
어쩌면 그래서 나는 이런 드라마를 계속 보는지 모른다. 현실은 남루하고, 위기 속에서 나를 구원해 줄 동아줄은 보이지 않더라도, 나는 그 잠깐의 환상 속에서 '나는 이대로도 충분하고 특별한 존재'임을 확인한다.
그것이면 된다. 그 잠깐의 오아시스로 또 일주일을 버텨낼 수 있다. 환상은 도피가 아니라, 다시 살아갈 힘을 주는 잠시의 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