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함을 즐기는 법
시골살이를 시작한 후 달라진 점은 바로 '소리'였다. 아파트의 반복적인 안내 방송도, 거리의 요란한 음악과 차량 경적도 사라졌다. 우리 집엔 TV도 없기에, 그마저도 침묵 속으로 들어갔다. 결국 하루 종일 집 안에 울리는 소리는 아이의 투정과 그를 달래려는 남편의 목소리, 그리고 새벽 다섯 시 무렵부터 울려 퍼지는 새들의 지저귐뿐이다. 윌든 호숫가에 살던 소로처럼 새벽을 설레며 맞이하지는 못하지만, 자연의 소리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음에 그저 감사하다.
도시의 소음이 사라지고 나니, 내면의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던 생각들, 일상 속 감정의 찌거기들이 더 또렷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고요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내 마음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고요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 후, 침묵에 대한 인식도 바뀌었다.
예전의 나는 낯선 사람 앞에서 침묵을 견디지 못했다. 어색함을 깨기 위해 의미 없는 말들을 쏟아냈고, 집에 돌아와서는 "왜 그랬을까" 자책하곤 했다. 말이 많다는 건 어쩌면 불안을 감추려는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법정 스님은 말씀하셨다.
"말이 많은 사람은 안으로 말이 여물도록 인내하지 못하기 때문에 밖으로 쏟아내고 마는 것이다."
시골살이를 하며 나는 그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지금 나는 침묵을 무례나 단절이 아닌 존재의 방식으로 여긴다. 말없이 머무는 시간이 어색하지 않고, 때로는 말보다 더 큰 위로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와의 사이에 침묵이 흐를 때, 그것이 부담스럽지 않다면 우리는 이미 충분히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때로는, 내가 말을 아끼는 침묵이 상대방의 무례함을 스스로 마주하게 만드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말보다 더 강한 메시지를 전하는, 우아한 침묵인 셈이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고요를 ‘존재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고요함은 단순한 소리의 부재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이며 삶이 진정으로 펼쳐지는 공간이다.”
고요는 나에게 돌아오는 길이며, 침묵은 그 길을 여는 문이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느끼고, 이해하고, 위로받을 수 있다는 것. 나는 이제 그 사실을 자연의 고요를 통해 배우고 있다.
그리고 그 배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말의 무게를 스스로 여물게 하는 침묵 속에서, 나는 오늘도 조금씩 성숙해지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