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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싱장을 어떻게 선택할까?

보이지 않는 것들의 풍요로움

운동을 하기로 결심이 서면 가장 먼저 주변에 갈 만한 곳을 찾기 시작한다. 복싱장의 경우에는 일반적인 피트니스 센터에 비해 그 수가 훨씬 적다. 또 물어볼 만한 사람도 거의 없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인터넷에서 검색을 하고 위치와 사진을 찾아보고는 전화해보거나 찾아가서 직접 보는 수밖에 없다. 내 경우에는 너무 잘 맞는 곳을 찾아서 처음 시작한 곳에 자리를 잡았지만 돌이켜 보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를 몇 가지 기록한다. 

 

< 운동 마치고 복싱장에서, 20200320 >

거리? 집과 회사 중 어느 곳이 좋을까?

인터넷으로 집과 회사 근처의 복싱장을 검색했다. 걸어서 10~15분 거리에 집 근처에 한 곳, 회사 근처에 세 곳이 있다. 내 경우에는 운동을 하는 목적이 작업에 집중할 수 있는 몸 상태를 만드는 것이어서 근무처로 복귀하기 쉬운 서초동에서 찾아본다. 이렇게 검색하고 나면 각 복식장마다의 이동거리와 주변 환경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관련된 블로그나 사진들도 함께 나와서 어느 정도의 기본 정보는 파악할 수 있다.   

< 서초동 복싱장 검색 결과, 출처 구글 지도 >

나는 회사에서 가장 가깝기도 하고 길을 한 번만 건너도 되는 <국제복싱클럽교대점>으로 가보기로 하고 방문했다. 이렇게 정보를 찾으면 무엇보다 중요한 건 고민이 아니라 실행이다. 언제 전화하고 찾아갈까 이런 고민하면서 머뭇거리면 시작부터 힘이 빠진다. 내 경우에는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바로 갔다. 기다리다 보면 가지 않을 이유가 수 백개가 떠오른다. 

< 국제복싱클럽교대점 기본정보, 출처 구글 지도 >

국제복싱클럽 교대점 블로그  

도착해서 관장님을 만나서 상담을 한다. 운동하러 갔는데 상담이라는 게 복잡할 것이 없다. 내 경험상 복싱장 관장님들은 질문이 그렇게 많지가 않다. 운동은 해 보셨어요? 언제부터 하실 건가요? 하시면 좋습니다! 뭐 이 정도다. 정말 담백하다. 오히려 운동하는 목적이나 어디에서 왔다느니 개인 신상에 대해 얘기하면서 수다를 떨고 있는 건 나다. 그러게 말이다. 복싱하러 갔으면 등록하고 시작하거나 그냥 돌아오거나 둘 중 하나다. 난 이렇게 처음 찾아간 날 1개월을 등록했다. 나는 시작은 늘 1개월이다.  한 달을 꾸준히 할 수 있으면 3개월을 할 수 있고 3개월씩 반복할 수 있으면 몇 년을 지속할 수 있다. 린(Lean)하게 시작하는 거다.


시설? 공간의 밀도와 운동할 수 있는 시간

복싱장을 포함해서 시설 등의 환경은 장소를 이용하는 입장에서 매우 중요하다. 내가 이 곳을 머뭇거림 없이 선택한 이유가 공간의 밀도가 여유로워서다. 많은 복싱장들이 좁은 공간에 링과 샌드백이 연습장, 맨몸 운동과 근력 운동까지 함께 갖춰야 하는 데다가 사무실과 라커룸 및 창고 등을 포함해서 지원 공간까지 모두 갖추다 보면 어느 것 하나 온전하게 이용하기 어렵다. 복싱 장마다 다녀 보면 링 크기가 다르고 샌드백 개수와 이격거리가 제각각인 것도 그러한 이유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면적이 여유가 있어야 운동하는 사람이 편안하다. 

< 샌드백, 링, 근력운동 공간 >
< 출입, 휴게 및 상담 공간과 러닝머신 >

복싱장은 피트니스 센터에 비해 영업시간이 제한적인 경우가 많다. 관리상의 어려움이 있어서인지 새벽 또는 밤 시간 그리고 주말에 열지 않는 곳도 제법 많다. 이곳은 직장인과 거주자가 함께 있는 곳이어서 평일에는 아침 7시부터 오후 11시까지, 토요일에도 오후 1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하고 있다. 그래서 주중에는 근무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와서 운동할 수 있고 주중에 놓치더라도 주말에 와서 여유 있게 연습을 할 수 있다.

< 복싱장으로 가는 계단 >

비용? 시간과 건강  

나는 지난 4년 동안은 복싱장 비용을 3개월씩 등록했다. 내가 다니는 곳은 1개월 18만 원, 3개월 48원인데 내 경우에는 45만 원씩 투자하고 있다. 한 달에 15만 원이 공식적으로 내가 사용하는 운동 비용이다. 매일 두 시간, 한 달이면  40시간을 쓰는 곳이다. 하루에 1만 1천 원, 내 몸을 늘 좋은 상태로 유지하는 데 사용하는 비용이다. 흥미로운 결과지만 복싱을 시작하고 3년 차부터는 점심식사를 하지 않기 때문에 식비가 줄었고, 저녁식사를 집에서 하기 시작하는 4년 차부터는 외식비 자체가 거의 없어졌다.   

< 페이스북 포스팅, 출처 이인기 >

< 페이스북 포스팅, 출처 이인기 >


핸드랩이나 글러브는 1년 지날 때마다 관장님께서 선물로 주시기도 하고, 스파링용 글러브나 헤드기어는 복싱장에 늘 구비가 돼 있어서 사용하면 된다. 스파링을 자주 하는 지금은 내 용품을 따로 구매하기는 했지만 복싱 용품 자체가 사치 부릴 것들이 없다. 누구한테 자랑하 듯 보여줄 만한 것도 없고 혼자서 운동하면서 땀 흘리는 게 전부이니 기능만 좋으면 된다.

< 백 글러브, 핸드랩, 스파링용 글러브와 헤드기어 >


사람? 관장님과 사범님 그리고 관원들

가벼운 취미로 복싱을 시작해서 이렇게 기분 좋게 지속할 수 있는 이유를 뽑으라면 나는 단연코 이 곳에서 만나는 사람들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골프, 자전거, 등산, 피트니스, 요가 등 운동마다 특유의 분위기가 있는데 내가 겪은 복싱장의 분위기는 내 성향과 잘 맞는다. 뭔가 요란하지 않고 서로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존중하는 태도가 있다. 또한 서로의 배경이나 외모보다는 오늘 했던 운동에 대한 얘기가 대부분이다. 얼마나 담백한가? 

< 한결같은 복싱장의 사람들, 출처 페이스북 >

< 한결같은 복싱장의 사람들, 출처 페이스북 >


그리고 지금 내가 다니는 복싱장에 늘 감사한 건 중의 하나가 관장님과 사범님의 꾸준함이다. 하나는 인사, 출석 기록이 둘, 마지막이 관원들과의 일대일 미트 치기다. 


이곳을 등록한 이후 복싱장을 들어가고 나갈 때 주고받는 인사로 시작하고 끝을 내는데 그게 뭔가 힘이 난다. 그리고는 무슨 노트에다가 펜으로 출석한 관원들 얼굴을 보고 나서 이름을 적는데 그 아날로그 감성이 궁금해서 물어보니 사람들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해서란다. 정감 있다. 가끔 "거~ 좀 데이터로 기록해두면 안 되나?" 하는 생각이 나다가도 카리스마가 확 사라져 버리지 싶다. 


정말 고마운 건 하루도 거르지 않는 일대일 미트 치기다. 내 경우에는 하루에 2라운드씩 미트를 치는 데 관장님 또는 사범님은 복싱장에 오는 모든 관원들에게 미트를 거르지 않고 대준다. 미트 치기는 움직이지 않는 샌드백 치기보다는 힘들고 스파링보다는 강도가 낮지만 움직임을 몸에 익히는데 큰 도움이 된다. 별 거 아닌 듯 보여도 2라운드를 하고 나면 숨도 많이 거칠어지고 땀도 올라오기 시작한다. 전날 술을 먹었거나 식사과 과해서 몸이 무겁기라도 하면 이 시간에 바로 느껴지기도 하고 그걸 또 미트를 받아주는 두 분은 알아차린다. 묘한 두 사람 사이의 소통의 시간이기도 하고 내 몸을 스스로 체크해보는 기회이기도 하다. "나를 관찰해주는 상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인지를 알게 된다. 

< 다른 관원의 미트를 받아주는 관장님 >
< 사범님과의 일대일 미트 치기 >


선택? '나'를 성장시키는 환경인가?


복싱장을 선택하는 건 그렇게 복잡하거나 대단한 위험요소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단순하게는 관원을 모집해서 운영해야 하는 복싱장과 돈을 내고 운동을 하는 관원과의 거래가 끝이다. 협의할 것도 없고 맘에 들지 않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만둘 수 있다. 큰 비용을 손해 보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단순한 선택조차도 그 과정을 잘 들여다보면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는 원인은 서로가 건강한 관계로 성장할 수 있어서일 것이다. 결재를 할 때마다 감사히 잘 쓰겠습니다라는 관장님의 말에 담긴 진심이 나에게는 좋고, 이 장소에서 보내는 시간 동안 한결같이 최선을 다 하거나 자기 생활을 관리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내가 얻는 건 너무 귀한 자산들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선택할 때 하지 않을 이유는 차고 넘친다. 그리고 나면 소중한 시간만 허비한 꼴이 된다. 고민할 시간에 먼저 실행하고 일어나는 일을 보면서 대응하는 것이 현명할 때가 있다. 평범해 보이는 복싱장 선택이지만 내가 활동하는 분야에서 겪고 있는 결정의 중요성을 볼 수 있고 많은 영향을 받는다. 그렇게 연결돼 있다.   


2020년 3월 21일

(주)포럼디앤피 대표 건축가 이인기

facebook : leeinki1


건축가 이인기 | (주)포럼디앤피 공동설립자로서, 한국과 프랑스에서 수학하며 건축가의 언어를 실현하는 설계방법 및 건축환경을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실행하고 있다. 특히 합리성과 투명성을 요구하는 시대적인 변화 속에서 건축가가 어떠한 방법으로 자신의 가치를 높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계속하면서, 실무 프로젝트와 더불어 대학원 수업 및 외부 강연을 통해 발주자-설계자-시공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에게 건축을 바라보는 건강한 관점과 인식을 확산시키고 있다.

(주)포럼디앤피 | 2008년 세 명의 건축가가 설립한 (주)포럼디앤피는, 아키테라피라는 건축 철학을 실현하기 위해, 현대사회에 필요한 건축의 혜택을 탐구하고 실천했으며, 양질의 건축을 실현하기 위한 기술역량을 갖추고 있다. 마스터플랜, 주거, 종교, 의료, 복지, 상업, 문화시설 분야에서 작업했고, 현재는 건축 건설사업의 전 과정인 기획-설계-건설-운영이라는 프로세스의 리더로서 건축가를 정의하고 작업을 하고 있다. 특히 데이터를 접목한 디지털 건축과 스마트시티라는 분야에서 특화된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 연구 및 상업용도 활용 시 출처를 밝히고 사용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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