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대화를 시도하자!

진짜 나를 돌아보는 시간

by 이재무
카카오 지면에 네이버 자료라니 조금 불편하지만 카카오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니 내 잘못이 아니다.


'자기대화'를 포털에서 찾아보면 저렇게 정의되어 있다.

상담심리 분야의 용어로 "그래! 난 할 수 있어!"라던지 "에휴! 내가 그럼 그렇지!" 따위의 자기독백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 기왕 할거면 좋은 말로 하는게 바람직할 것 같다.


그런데 내가 말하고 싶은 자기대화는 일반적으로 다루어지는 학술적 개념과는 조금 다르다.

내가 말하는 자기대화는 저런 혼잣말이 아니라 행동과 관련된 중요한 수단이자 전략으로써의 자기대화이기 때문이다.


일단 자기대화를 개괄적으로 이해하려면 '대화'라는 행동의 속성을 먼저 짚어봐야 한다.

외로운 사람들이 가장 먼저 사람을 접하면 대화부터 시도하고, Tom Hanks 주연의 영화 'Cast Away'에서 주인공이 배구공에게 이름을 붙이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대화는 호모 사피엔스들이 살아가는데 필수불가결하고 불가분한 행위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저런 이유로 대화를 할 수 있는 누군가와 함께 살지 않거나 하루에 한 마디도 안 하는 이례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통상적으로 우리는 일상에서 무척이나 많은 대화를 한다.

그렇게 이루어지는 대화는 세상을 바꿀 만큼 중요한 대화일 수도, 시답잖은 말을 주고받는 대화일 수도 있다. 또한 한 사람하고만 하는 대화일 수 있고, 다수의 사람들과 하는 대화일 수도 있다. 당연히 재미있는 대화일 수도, 재미없지만 의무적으로 참여하는 대화일 수도 있다.

이처럼 대화는 의도나 방식에 따라 정말 많은 형태고 나뉜다.


그럼 우리의 일상에서 흔하고 빈번한 대화, 갈음할 수 있는 특징은 무엇일까?


대표적인 속성만 이야기하자면,

대화는 '목적 지향적'이다. 대화를 하는 목적은 친목 도모, 갈등 해소, 부자연스러움 완화, 간절함의 표현 등 매우 다양할 수 있으나 목적의 속성과 유형에 관계없이 대화가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라는 설정은 변하지 않는다.

대화는 '상대'가 있다. 특정한 목적을 위해 대화가 이루어지고, 대화의 상대가 있다는 것은 그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기반으로 하는 교감이 전제된다. 그래서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진솔함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대화의 핵심 속성 두 가지의 이해를 통해 자기대화를 정의할 수 있다.


나를 상대로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실행하는 의사소통 행위이다.


자! 그럼 내가 말하고자 하는 자기대화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자~ 적읍시다! 응? 적기 싫다고? 그럼 적지 마세요~


자기대화는 순수하게 나를 위해 나에게 집중한 채 내가 나에게 질문을 던지고 답을 하면서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다.

대화라는 점에서 그냥 아무 목적의식 없이 이루어지는 망상이나 상상과 다르다.

상상이나 망상은 흐지부지 사라지고 기억에 오래 남을 수 없지만, 자기대화는 확고한 의식과 목적 하에 행해지고 질문과 답변을 통해 결심으로 이어지며 궁극적으로 행동으로 나타난다.


자기대화는 목적을 갖고 의식적으로 행하는 것이다.

쉬운 이해를 위해 일상에서 흔히 이루어지는 타인과의 대화를 떠올려보라. 당신은 분명히 명확한 눈 맞춤과 의식 하에 집중한 채 대화에 임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상대는 매우 불쾌해 할 것이고 당신이 대화를 통해 얻으려고 했던 의도는 달성될 수 없을 것이다. 자기대화도 그러하다.

따라서 서두에 이야기 했던 무의식이 작용하여 나오는 혼잣말과는 결이 다르다.


자기대화는 스스로를 질책하고 반성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기성찰과도 차이가 있다.

어차피 반성하고 성찰해도 또 저지를 실수는 또 한다. 특별히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되려 반성과 성찰과정에서 후회와 자기비하만 남을 것이다. 그럴 바에는 아예 하지 않는 것이 효율적이다.


"응? 반성할 필요가 없다고?" 이런 의아함에 반문하는 생각이 드는가?

그동안 여기저기서 자기성찰이 중요하다고 들은 것 같은데 제대로 선을 그어버리니 어색한가?

의구심을 표하는 당신은 그동안 당신이 매사 얼마나 많은 반성과 성찰을 해왔는지 되새겨보라. 그리고 반성과 성찰을 통해 그 다음에 동일한 실수를 하지 않도록 얼마나 개선의 노력을 실행했는지 생각해보고, 반성과 성찰, 개선의 노력까지 일련의 과정을 거쳐 당신이 이후 얻은 것과 변하지 않았던 것을 계산해보라!

내가 장담하는데 당신은 '반성과 성찰'만 했지 개선의 노력은 미미했을 것이고 당연히 그로 인해 얻은 것은 거의 없을 것이다. 자기성찰로 미래를 준비한다고? 경험적 근거가 부족한 궤변에 불과하다고 단언한다.

사람들이 '진짜' 성찰하고 반성한다면, 지독한 숙취에 시달리면서 또 술을 마실리 없고, 폐암과 후두암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담배를 끊지 않을 리 없다. 또한 자기성찰로 사람이 휙 달라질 수 있다면 1번 이상 실패할 사람 한 명도 없고, 범죄를 2번 이상 저지르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자기성찰이 무의미하다는 더 확실한 증거가 있다. 소크라테스를 역사적 철학자로 만들어준 명제가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을 안다."라는 '무지의 지'이다. 이 지극히 원론적인 자기성찰의 의미가 소크라테스에게서 거론된 것이 벌써 2000년이 넘었다. 그럼에도 왜 여전히 현재도 소크라테스는 존경받는 것일까?

자기성찰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친절한 마음으로 요약해주자면, 자기대화는 내가 나에게 질문을 던지고 정말 그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이게 뭐야?"라고 이상함을 느끼겠지만 자주 하다보면 정말 대화가 이루어지는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강렬하고 솔직하게 질문하는 나!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답변하는 나!


그런데 일반적인 대화도 막상 하려면 생각보다 쉽지 않듯 자기대화의 시간을 갖는 것이 일상에서 간단한 일은 아니다 - "바쁘고, 귀찮고, 피곤하고..." 뭐 이런 핑계로 당신은 가장 소중한 사람과의 대화도 피하곤 하지 않는가? 그런데 자기와의 대화는 더 말해서 무엇하랴.


따라서 열심히 틈날 때마다 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전술한 것처럼 현실적으로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자기대화는 길게 하기보다 '직관적'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경솔하게 임하라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인 자기대화 속에서 부지부식간 직관이 말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말이다.

왠지 불안정할 것 같지만 직관은 생각보다 당신의 생활에 이미 매우 크게 작용하고 있다. 게다가 직관은 생각보다 훨씬 정확하고 현명하다. 당신은 무엇인가를 판단할 때, 많은 숙고와 정보의 수집이 양질의 결과를 도출해 줄 것이라고 믿고 있을 텐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당신이 가장 가까운 시일 안에 내린 결론을 꼼꼼하게 되짚어보면, 타인에게 설명하기 위한 논리를 보완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했을 뿐 이미 결정은 직관적으로 빠르게 내려졌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자기대화의 실행에 있어 '깊은 몰입'도 매우 중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깊은 몰입이란 짧은 시간이어도 완전히 집중하라는 의미이지 오랫동안 몰두하라는 말이 아니다. 사람은 오랫동안 몰입하면 정신이던 육체던 피로도가 커진다. 피로가 쌓이면 알다시피 망가진다.

조용한 카페이던 시끄러운 시장이던 자신이 몰입하기 쉬운 곳에서 아주 편안하고 자유로운 시간을 이용하여 다른 것들과 완전히 차단한 채 자기대화에 임하는 것이 중요하다.

혹시 다른 이들이 당신을 정신나간 사람처럼 볼 수도 있고, 자는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딴 것들은 전혀 개의할 필요가 없다. 당신의 남은 인생을 좌우할 수도 있는 결정을 내리는데 그까짓 다른 사람의 이목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자기대화의 시간은 당신에게 소중한 무언가를 분명히 줄 것이다. 많은 생각을 자기대화에 투자할수록 당신이 원했던 자신만의 답과 방향을 정함에 있어 유익한 결론이 도출될 것이다.

자기대화를 통해 나라는 자신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자기 무장이 이루어질 때 당신은 진정한 자기 체계를 완성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당신이라는 존재가 하나의 명확한 체계로 굳건해진다면 그 자체로 성공한 삶이 될 것이며, 당신이 그러한 굳건함으로 가득 차있다면 흥분이나 분노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살 수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들 중에 혹시 수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나 혼자 굳건해지는 것'이 그렇게 유용할 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내가 아무리 나에 대한 자기체계를 확고하게 정립한 들 정작 나보다 우위에 있는 사람에 의해 그 사고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말짱 꽝인거 아니냐고 묻고 싶은가?


사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분명히 우리는 합리와 부조리가 뒤섞여 있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착한 일을 했다고 꼭 칭찬이 동반되는 것도 아니며, 나쁜 일을 했다고 반드시 처벌받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선한 이에게 비난과 고통이 쏟아지거나 악한 이가 막대한 부를 축적해 더 잘사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래서 자기대화를 통해 나만의 답을 가지고 움직인다고 해도 모든 결과가 반드시 좋고 올바른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합리와 부조리가 뒤죽박죽인 우리들의 삶!

그렇지만 그래도 자기대화를 통해 나 자신을 튼튼하게 구축해야 하는 이유는 당신의 삶은 다른 사람이 살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의 당신이 부족하고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왜 나는 손흥민이나 만수르처럼 재능이 넘치거나 재물이 많은 사람으로 태어나지 못했는지 후회하더라도, 이번 생은 필연적으로 당신이 가야만하는 죽음이 다가올 때까지 지금 상태로 갈 수밖에 없다. 이루어질 수 없는 조건을 한탄하며 흐느적거리고 살 것인가?

그리고 자기 스스로에게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의 언행은 기회가 부여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서 절대 수용되지 못한다. 타인의 눈은 상당히 냉정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차피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존재는 있을 수 없으며, 나를 무의미하게 인식하는 사람들은 내가 무슨 짓을 하던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니 자기대화의 유용성과 자기체제의 필요성에 대해 의구심을 품지말고 차라리 무시하며 사는 방법을 체화하는 것이 더 효용적일 것이다.




동서양의 위대한 성인들의 행동을 보면, 모두들 자기대화에 능했고 반복적으로 자기대화에 매진했음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기도라는 형식을 빌어 끊임없이 자기대화를 시도했다. 신약성경을 읽어본 사람은 알 수 있지만 구약성경의 모세나 다윗과 같이 하느님과 직접적으로 대화를 하는 경우가 전혀 없다. 현재 크리스트교의 핵심 사상이 삼위일체론임을 감안하면 하느님과 일체인 예수께서는 자기 스스로와의 자기대화가 하느님과의 대화가 되는 것이다.

부처께서도 참선이라는 방식을 통해 무욕과 무념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자기대화를 시도해 깨달음을 얻었다. 불교의 참선은 마음의 집중을 통해 알아차리고 답을 내는 것이기에 다른 일반적인 명상들과 구분된다는 법륜스님의 설파 속에서도 명백한 자기대화의 흔적이 확인된다.


그러니 한 번 시도해보자!

재차 말하지만 자기대화를 할 때는 객관적 · 사회적 기준따위 고려하지 말고, 반성이나 성찰 따위를 하기보다 주관적 · 개인적 정서에 무게를 두고 나와 정말 솔직하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어라.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가장 잘 알지만 그렇다보니 가장 스스로를 많이 속이며 살아간다. 자기대화는 그러한 모순을 벗어나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자기대화는 당신에게 자신감을 부여하고 - 그릇된 자기 위로나 위선적 당위성을 부여할 수도 있다 - 어려운 세상을 꿋꿋하게 버틸 힘과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잡아줄 것이다. 또한 당신의 부질없는 시간과 에너지 낭비를 막아줌으로써 다음을 기약하고 최선을 도모하는데 큰 유용함을 제공할 것이다.

무엇보다 자기대화가 매력적인 것은 어차피 돈 드는 일도 아니라는 점이다 - 실제 중요하기도 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사는 우리들이 가장 아끼는 그 돈 말이다!


이 글을 다 읽고나자마자 시도해보자!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답을 얻고, 그 답에서 다시 질문해보자!

질문할 것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오늘 하루 중에 있었던 아무 일이나 떠올려 대화거리로 삼아보자.

자기대화는 당신이 해왔던 어떠한 대화보다 가장 진솔한 대화일 것이고, 당신은 평소 얻지 못했던 질문에 대한 '진짜'답을 얻게 될 것이다.

진짜라니까...


V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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