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32 to Taipei] 캐리어와 배낭

by 이지현

[D-32 to Taipei] 캐리어와 배낭


92년생, 키 153cm 몸무게 48kg 정상체중, 여자.


나는 해외여행을 할 땐 무조건 배낭을 메고 떠난다. 친구나 가족과 떠나는 여행이라면 캐리어도 고려해볼 만 하지만 혼자 떠나는 여행은 거의 배낭에 짐을 챙긴다. 20대 후반부터는 가족 친구들, 나 모두 사회생활을 하다보니 시간을 맞춰 함께 해외로 떠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해외는 거의 혼자 다니는 편이다. 그러니, 무조건 배낭을 메고 떠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해외에 가면 서양인들은 대부분 자신의 몸 반만한 배낭을 짊어지고 다닌다. 반면 한국인을 비롯한 동양인들은 거의 캐리어를 끌고 다닌다. 아.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모두 그런것은 아니지만 배낭을 메고 다니는 사람들은 거의 서양인들이더라, 라고 정정하겠다.


그럼 나는 왜 배낭에 꽂힌 것일까? 몸 절반 크기의 짐짝을 메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서양사람들을 동경해서라기엔, 내가 짊어져야 할 배낭이 너무 무겁다. 그렇다고 그들을 동경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다만 서양인 자체에 대한 동경보다는 그들에게서 뿜어져나오는 '자유'를 동경한다. 자유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무엇보다 '무거운' 것이기도 하다. 자유는 사랑스럽지만, 무겁다.


내 키는 153cm이다. 여자치고도 작은 키다. 작은 키로 1달 가까이 되는 여행 동안 사용해야 할 짐을 어깨에 메고 다니기란 여간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편하게 굴러다니는 바퀴 달린 캐리어를 두고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낑낑거리며 내 등치만한 배낭을 또 다시 짊어지는지 나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 행태에 곰곰히 생각해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캐리어는 편하다. 배낭과 달리 여행 내내 내 어깨위에 올려놓고 다닐 일도 없고 짐을 싣고 내릴때만 잠시 고생하면 나머지 시간동안은 손잡이만 끌고 다니면 된다. 그렇기에 짐을 쌀 때 절박하지 않다. '이게 이번 여행에서 꼭 필요한가?'라는 생각보다는 '이것도 챙겨가면 쓰겠지?'에 가까운 사고과정을 거친다는 말이다. 그렇다보니 막상 여행에서 사용하지 않는 소지품들을 한껏 챙겨오기 일쑤다.


반면 배낭은 배낭에 넣는 순간, 모두 나의 짐이 된다. 내가 짊어져야 할 짐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짐 하나하나의 무게에 예민해 질 수밖에 없다. '이번 여행에서 정말 쓸 물건인가? 꼭 필요한 것인가?' 라는 나 자신의 질문에 무조건 '그렇다'는 답이 떨어져야만 배낭 한 구석을 차지할 수 있다. 캐리어에 짐을 쌀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마음으로 짐을 싼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인생도 배낭여행과 같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뺄 건 빼고, 넣을 건 넣어야 한다. 그 기준이 되어주는 질문은 단 하나다.


'나에게 꼭 필요한가?'


내가 무심코 '가서 쓸 지도 몰라'하고 챙긴 짐은 결국 내 어깨 위에서 나를 괴롭히는 '웬수'로 전락한다. 반면 하나하나 고심해서 싼 배낭은 여행에서 하나밖에 없는 내 '믿을 구석'이 되어준다.


인생에 있어서도 나를 무겁게 짓누르는 일이 정말 나에게 필요한 것인지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 무심코 챙긴 짐이 결국 나에게 독이 되어 돌아올 지도 모를 일이니.


아. 이제 알겠다. 내가 배낭에 짐을 싸는 이유는 인생의 참맛을 조금이라도 느껴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배낭이 주는 '무거움'. 거기에 아마 난 중독 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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