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5 to Taipei] 나이를 잊기로 했다
오빠와 몇 달 전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을 한 적이 있다(우리 남매에게 스타는 민속놀이다). 그때 내가 공격을 할지 말지 머뭇거리다 타이밍을 놓쳐 역공을 당하고 말았다. 게임이 끝난 뒤 오빠가 이렇게 말했다.
'왜 이렇게 겁을내. 너 그때 쳐들어왔으면 네가 이겼어.'
그 말을 듣자마자 진한 패배감이 밀려왔다. 게임에서 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차라리 부딪히고 깨졌으면 그렇게 참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졌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이길 수도 있었는데. 재미로 하는 게임에 무슨 참담함까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건 내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말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도전하는 것을 겁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이길 수 있는 경기인지, 아닌지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이다. 부딪히면 깨질 수도 있다. 하지만 뚫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애초에 부딪히기를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을 겁내고 있었다. 깨어질까 두려웠다.
그날 집에 돌아와 많은 생각을 했다. 이대로 괜찮은가. 아무리 생각해도 변화가 필요했다. 내가 움켜쥐고 있던 것들은 너무나도 사소한 것들인데 왜 그리 세게 움켜쥐고 있었을까? 아마 편해서 일 것이다. 변화 없는 삶은 편하다. 어제와 똑같이 살면 된다. 내일은 오늘처럼만 살면 된다. 편하면 안전하다고 느끼게 된다. 하지만 편안함과 안정감은 신기루 같은 존재다. 언제 환상처럼 사라질지 모르는 존재들. 나는 나를 불편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즈음 퇴사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글을 쓰기로 했다. 낯선 경험에는 낯선 장소가 필요하다. 그렇게 나는 대만에 가 글을 쓰기로 했다. 하고 싶은 것은 오직 글을 쓰는 것뿐이었다. 대책도, 그 이후에 무엇을 할지도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그 결정들이 겨우내 꽁꽁 얼었던 내 몸과 마음을 녹여주었다는 것이다. 그제야 온몸에 피가 도는 것 같았다. 그제야 밖에 봄이 왔다는 걸 알았다.
나이가 한 살 한 살 들어가니 가장 싫은 점은 눈가에 생기는 주름도 아니고, 떨어지는 소화기능도 아닌 바로 겁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본능적으로 내게 남은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걸 아는 탓일 게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으니 더 이상 실수하고 싶지 않다. 더 이상 실패하고 싶지 않다. 그런 마음.
하지만 인생에 성공이 어디 있고 실패가 어딨을까. 모두 경험일 뿐. 불안정한 낯선 삶이 겁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더 이상 편안과 안전이 지상최대의 목표가 된 삶은 살고 싶지 않다. 머릿속으로 재고 따지기만 하는 인생도 살고 싶지 않다. 남은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기에.
겁만 조금 덜어낸다면, 나이가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게 될까? 주름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생기지만 겁은 내 의지에 달려있기에 용기 내보려 한다. '어른'이라는 이름표도 떼어버리고자 한다. 평생을 어른이 아닌 아이로 살고 싶다. 순수한 호기심으로 온몸을 가득 채우고 세상에 부딪히는 것은 아이들밖에 없기에, 어린아이처럼 살고자 한다. 겁이 나는 순간들을 마주할 땐 내가 사랑하는 책과 문장들을 떠올리기로 한다.
넘어지는 것은 물론 똑같다. 하지만 한눈을 팔다가 우물에 빠지는 것과, 별만 바라보다가 우물에 빠지는 것은 다르다. 돈키호테가 열심히 보았던 것은 바로 별이다. ㅡ 앙리 베르그송, <웃음>
이제 나이를 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