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30 to Taipei] 중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不怕慢,只怕站。느린 것을 두려워 말고, 멈추는 것을 두려워 하라.

by 이지현

[D-30 to Taipei] 중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여행이 점점 다가오기에 주말을 맞아 금요일 저녁부터 중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나의 인생 대드 '악작극지문(장난스런 키스)' 덕에 대만에서 쓰는 기본적인 인사말이나 감탄사는 알아 듣지만 한자는 까막눈이나 다름 없기에 기초 중국어 책을 한 권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다이소에 가서 1000원에 네 자루나 들은 흑색 펜도 샀고, 파란 디자인이 예쁜 휴대용 단어장도 샀다. 총 지출 2000원. (사실 이마저도 새언니가 사준거다. 하하하.)


고등학교 시절, 한문은 내가 싫어하는 과목 중 하나였다. 극도의 효율성을 따지는 효율충인 나에게 한자는 너무 비효율적인 언어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한글이나 알파벳은 기본적인 자음, 모음만 배워놓으면 마음대로 조립할 수 있다. 마치 레고처럼. 완벽하게 구현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소리나는 대로 쓸 수 있으며 아무리 낯선 단어라도 자음 모음이나 알파벳 하나하나를 모르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한자는 다르다. 한 글자 한 글자가 뜻을 가지고 있으며 따로 읽는 발음이 있다. 레고 블록처럼 하나하나를 떼어내 처음부터 조립하는게 불가능한 언어다. 그렇기에 '한 번 배워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이 통하지 않는 콧대 높은 몸이신거다.


그래도 이번 여행에서는 조금이라도 직접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기에 나름 결연한 마음으로 중국어 교재를 펼쳤다. 고등학교 시절, 위에서 언급한 나의 최애 대만 드라마 악작극지문 때문에 중국어 학원도 등록했던 적이 있다. 그 때도 주로 말하기에 흥미를 느꼈지 쓰기(주로 한자)는 시큰둥했다. 그러나 이번엔 한자를 마주하는 마음가짐이 달랐다. 길거리에서 음식을 사먹으려면 메뉴판 정도를 읽을 줄 알아야한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책에 적힌 한자 하나하나가 메뉴판에 적힌 일용할 식량으로 보였다. '식당에서 한자를 모르면 굶거나 복불복으로 시켜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두 눈을 부릅떴다. 그리하여 책에 나온 한자를 그냥 하나씩 따라 '그려'보기 시작했다. (어떤 방식으로 한자를 써야하는 지도 잘 모르기에 한자를 적었다고 하기 민망하여 그렸다고 표현했다.) 삐뚤빼뚤. 성인이 되고 나서 이렇게 어린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은 오랫만이었다. 마치 한글이나 영어를 처음 배울 때 처럼. 따라 쓴 한자는 책에 적힌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고, 사실 중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에게 보여주면 뜻이나 통할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에이, 요즘 세상이 얼마나 좋은 세상인데. 번역기 쓰면 돼.'


글자라기보단 그림(?)에 가까운 내 중국어 받아쓰기를 보면서 잠시 유혹에 넘어갈 뻔 했다. 어차피 내 분신과도 같은 핸드폰은 어딜 가든 나와 함께일테니 핸드폰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 아니겠는가. 굳이 힘들여 한자를 쓰지 않아도 핸드폰으로 스캔 한번이면 모든 걸 번역 해주는 세상인데.


뭐, 어차피 번역기의 도움을 받긴 받아야 할 거다. 하지만 내게 필요한 건 '내' 눈과 입, 손을 통해 구현되는 중국어다. 편리함에 중독된 세상에서 이번만큼은 온전히 내 힘으로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했다. 대만에 가서도 최대한 번역기보다는 단어장에 쓴 문장과 단어들로 소통하고 싶다. 어눌하고 상대방이 잘 알아듣지 못해도, 삐뚤빼뚤 문자라기 보다는 그림에 가까운 중국어 일지라도. 그래도 '내가'.


순간, '내가'. 그 말에 가슴이 뛰었다. 머릿속에 맴도는 말을 무시하고 한자를 한 자 한 자 적어(그려) 내려갔다.


근데 어라? 이거 은근 재밌다. 예전에는 꼴보기도 싫었던 한자가 지금은 꽤 귀여워보이기도 한다. 사람을 뜻하는 人 은 사람이 서있는 모양을 닮았고, 하늘을 뜻하는 天은 세뇌(?) 당한 건지 하늘같아 보인다. 내가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인 숲을 뜻하는 森林 은 나무가 울창하게 심어져 있는 것 같다.


전에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왜 나는 이렇게 글자를 이상하게 쓸까? 왜 책에 적힌 것처럼 안되는걸까?' 비교하고 완벽하길 바랬다. 얼마 해보지도 않고서는. 이번에는 마음을 비우고 '해본다'는 것에 의의를 뒀다. 그냥 써보기만 하는거야. 그러니 한자도 재밌어졌다. 엉망으로 내가 쓴 한자를 보며 혼자 킥킥 웃기도 하고, 따라 그려보다가 마치 뜻과 비슷한 모양으로 생긴 한자에 감탄하기도 하고.


그렇게 책을 한 장씩 넘기다가 우연히 마주한 문장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不怕慢,只怕站。


뿌 파 만, 쯔 파 짠.


느린 것을 두려워 말고, 멈추는 것을 두려워 하라.



그래. 이 한마디면 된다. 나는 몇번이고 번역기에서 읽어주는 뿌파만, 쯔파짠을 따라 읽었다.


뿌 파 만, 쯔 파 짠


뿌 파 만

쯔 파 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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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서도 공부할 중국어 교재를 고를 생각에 설레이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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