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형들 뒷골 주의
[D-29 to Taipei] P형이 여행일정을 짜는 법
원래 하고 싶었던 여행은 한 달동안 대만의 수도인 타이페이에서만 머무르며 낮에는 공원이나 어슬렁 거리다가 목이 마르면 커피나 버블티나 한 잔 때리고 챙겨간 책을 아무데나 앉아서 주워 읽다가 저녁쯤 대만 사람들이 먹는 가성비 넘치는 백반집에 한 자리 잡고 먹은 뒤 숙소로 슬렁슬렁 넘어와 글을 쓰거나 중국어를 공부하는. 그야말로 한량의 하루 하루로 한 달을 꽉 채우고 싶었다.
'여행 가서 뭐 보고 왔어요?'
해외여행을 다녀온 뒤 주변 사람들이 묻는 질문에 매번 나는 선뜻 답할 수가 없었다. 음. 뭘 보고 왔다 해야하나. 다음에 여행을 가면 참고하겠다는 마음이 느껴지는, 반짝이는 두 눈이 나를 응시할 때는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기본적으로 나는 북적이는 곳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인데다가, 모두가 다 가는 그런 장소는 일단 제끼고 보는 청개구리 성향의 여행자이기 때문에 '유명 관광지 혹은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어마어마한 장소'를 원하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여행은 관광지 투어가 아니라 '살아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저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 해봐야 기껏 '아침 저녁으로 시장에 가봤어요.', '길거리 음식들이요.', '사람들이요.', '거기 동네 빵집이 맛있는 곳이 있더라고요. 현지인들 뿐이었긴 한데...' 이런 식이 다 일게다. 그러다보니 으레 저런 질문을 받으면 말끝을 흐리기 일쑤다.
이런 여행 신조(?) 때문인지 나는 숙소도 번화가에 예약하기보다는 여행자들이 많이 없는 외곽에 자리 잡는 것을 좋아한다. 가족들이나 친구들이 위험하지 않느냐며 가끔 걱정을 하곤 하는데, 이제까지는 하늘이 도우신 탓에 나쁜 기억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정말 현지인이 된 느낌을 받을 수 있어 각 나라마다 진짜 일상을 조금이라도 맛볼 수 있었던 좋은 경험이었다. 저렴한 에어비앤비를 이용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대만은 에어비앤비가 불법이라 이번에는 아고다에서 숙소를 예약했다. 일단 타이페이의 높은 방 값에 놀라고, 현재 대만의 자가 7일 모니터링 방역 정책으로 인해 1인 1욕실이 가능한 숙소에서 지내야 했기 때문에 원래 생각한 도미토리룸은 모두 후보에서 제외해야 했다. 머리만 대면 잠드는 (운동 중에 요가 매트 위에서 갑자기 잠들기도 한다), 잠자리 선정에서 만큼은 까탈스럽지 않은 성격 탓에 저렴하기만 하다면 룸 컨디션이 어떻든 감수할 의향이 있었다. 그러나 1인실이어도 대부분이 공용욕실. 이대로라면 예산 초과일 게 불보듯 뻔했다. 어쩌지. 그러다가 친오빠에게 대만 한달 여행을 갈 거라고 말했을 때 오빠가 한 말이 생각났다. "어디어디 갈건데?" "타이페이" "거기만 있을거야? 여기저기 가봐야지." 그래. 타이페이가 물리적으로 엄청나게 큰 도시도 아닌데 한 달 동안 있을 생각을 하니 갑자기 지루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바로 대만 지도를 검색했다.
중국 사람들은 대만을 보물섬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과연. 작은 땅에 빽빽히 자리한 랜드마크들을 보고 있자니 호기심이 동했다. 그래. 전국일주다.
일단 타오위안 공항에 도착하면 가오슝으로 가서 며칠 지내다가 날씨가 좋은 날 지도상 맨 아래 (땅 끝)에 위치한 컨딩으로 갈 생각이다. 컨딩은 휴양지 느낌이 물씬 나는 한적한 소도시인 듯 한데, 사진을 찾아보니 흐린 날은 영 별로고 해가 쨍쨍한 날 가면 아주 이쁘겠다 싶어 그렇게 정했다. 날씨를 보고 움직일 거라 일단 숙소 예약은 가오슝에 2박 3일 일정만 예약해 두었다. 컨딩 날씨가 별로라거나 가오슝에 볼거리가 더 남았거나 아쉽다면 조금 더 있지 뭐. 그런데 숙소를 찾다보니 아랫 지방 숙소는 타이페이의 반값정도라는 것을 깨달았다. 가오슝에서는 무려 1인실에 1인 욕실이 딸린 방이 (물론 얼리버드 예약이라 할인이 더 됐겠지만서도) 2만원정도였다! (이 가격이면 타이페이에서는 8인실 도미토리도 아슬아슬한 가격이다.) 휴양지인 컨딩도 아름다운 바다뷰가 보이는 방이 7만원 정도면 예약이 가능한듯 보이니 조금 아껴서 다니다가 컨딩에서 뷰 맛집 숙소로 플렉스를 해볼까한다. 어차피 7일 동안은 1인실을 써야하니 숙박비가 싼 지방에서 여행을 시작하는 게 아주 좋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출국 전 일주일 동안은 무조건 타이페이에 있을테니 5년전 타이페이 여행시에 굉장히 마음에 들었던 호스텔에 8인 도미토리도 일단 예약해두었다.
대만에는 7대 도시가 있다고 하는데 타이베이, 가오슝, 타이중, 타오위안, 타이난, 신추, 자이가 그것이다.
먼저 공항에서 기차를 타고 가오슝으로 넘어가 컨딩까지 가본 뒤 샹견니 촬영지로 유명한 타이난으로 넘어갈 생각이다. 그리고 아리산이 있는 자이에 가서 세계 3대 산악열차도 타볼거고. 타이중은 전에 대만 친구가 살았던 도시라 한번 가본적이 있는데 딱히 인상적인 느낌은 없었던지라 시간이 되면 가고 안되는 안가는 걸로 정했다. 화련에는 트레킹 할 수 있는 곳이 있다고 들어 한번 가보고 싶기도 하고. 아직 뒤죽박죽이긴 하지만 일단 큰 뼈대는 세운 느낌이라 그래도 나름 뿌듯하다. 차근차근 일정을 짜보면 되겠지, 뭐. 일단 가면 어떻게든 즐기게 되니까.
이게 P가 여행 일정을 짜는 방식이다.
어제 정한 일정을 오늘 아침에 뒤집어 버리기도 하고 내일 일정 따위 내일 아침에 결정하는 일도 수두룩이다. 그렇기에 계획은 최대한 헐겁게 짜는 편이다. 이 헐거운 계획이 나를 자유롭게 한다.
한치 앞도 모르는 우리의 인생처럼 여행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계획을 꼼꼼하게 세운다한 들 무수한 변수들이 나를 스치고 내 발걸음을 돌려 놓는다. 그렇기에 삶은 언제든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 어디에도 스며들 수 있는 물처럼 유연해야 한다.
어찌됐든, 행복하기만 하셔라. 얼마나 멀리 왔든, 얼마나 헤메고 있든 당신은 언제든 방향을 돌릴 수 있다는 걸 명심하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