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오슝-컨딩
지금은 컨딩이다.
가오슝 줘잉역에서 오전 11시 30분, 컨딩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더 아래로 내려왔다. 일기예보를 보니 바람 아이콘이 3일 연속으로 떠있다. 우중충한 날씨일듯해 애써 아쉬운 마음을 그래도 비가 아닌 게 어디냐, 로 달래 보았다. 떠나는 날까지도 가오슝은 날이 좋았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줘잉역에서 컨딩까지 가는 왕복표를 450위안에도 판다는 글을 봤는데, 몇 달 새에 가격이 올랐나 보다. 왕복 티켓 가격은 600위안이었다. 매표소 직원은 편도는 400위안이라며 왕복이 더 싸다 했다. 어차피 컨딩에서 뤼다오로 가려면 줘잉역 바로 전 정류소인 팡 리아오에 가야 한다. 왕복표를 사고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오른쪽 좌석에 앉아야 바다를 볼 수 있다기에 오른쪽에 앉았다.
점점 더 남쪽으로 향하는 길. 날씨가 조금씩 흐려지는 것 같다가도 다시 해가 보이기를 반복. 그냥 운명에 맡기기로 하고 차창 밖으로 변하는 풍경에 주의를 돌렸다. 확실히 신문물의 손을 덜 탄 곳들이 더 많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더 아래로, 아래로. 바다보다는 산이 보였다. 바다는 언제 나오려나? 그래도 하늘이 파래 기분이 좋았다. 지나가는 중간중간 가로수가 바람에 세차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바람이 많이 불긴 하는가 보다.
그리고 노래를 들으며 아무 생각 없이 밖을 보다 맞이한 바다. 물 색깔이 정말 아름답다. 창문에 붙어 사진을 여러 장 찍어댔으나 실물을 담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냥 웃음이 실실 났다. 그래. 이거지. 이걸 보러 온 거지. 확실히 자연이 선사하는 아름다움과 신비함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그렇게 몇 십 분을 더 달려 목적지인 컨딩 경찰서역에 내렸다. 숙소까지 걸어서 2분 거리. 가까운 거리지만 역시 초행길은 거리에 상관없이 멀게 느껴진다. 여기도 역시 남부다. 가오슝의 해처럼 뜨겁다. 타이중과 타이난, 그리고 가오슝과 컨딩의 해는 모두 같은 해지만 다르게 느껴진다. 그래도 가오슝과 컨딩은 비슷한 편이다. 다행히 숙소를 헤매지 않고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체크인을 하고 숙소에 짐을 놓자마자 스쿠터 대여점으로 향했다. 컨딩에 오면 꼭 해보고 싶었던 것이 전기스쿠터를 타고 이곳저곳 다니는 것이었다. 가격이나 스쿠터 상태를 비교하고 빌리려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눈에 들어오는 곳은 딱 한 곳뿐이었다. 숙소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곳.
이런 드러그스토어 앞에서 아저씨 한 분이 대여를 해주고 계셨다. 처음엔 저 상점에서 운영하는 것인가 했는데 그냥 이 아저씨가 좌판을 깔고 운영하시는 듯. 이미 내 앞에는 손님이 두 명이나 와 있었다. 십 여분 정도를 기다렸더니 내 차례가 왔다. 사실 스쿠터를 타본 적도 없고 키가 작아 내가 탈만 한 크기가 있을까 마음을 졸이며 사장님과 대화를 시작했다. 你好。(니하오, 안녕하세요)
사장님은 능수능란하게 영업을 시작하셨다. 일단 얼마나 빌리고 싶냐는 물음에 잠시 고민하니 원데이? 투데이? 하신다. 투(two) 데이. 뚜오샤오치엔(얼마예요?). 물으니 하루에 600위안씩 이틀이면 1200위안이란다. 반납 시간은 이틀 차에 저녁 8시까지. 스쿠터 운전은 처음이고(뒷자리에 앉아본 적은 있지만) 익숙해지는 데 시간도 걸릴 테니 그냥 이틀 치로 계약했다. 이상하게 이런 데는 돈을 잘 안 아낀다. 처음 하는 경험들에는. 사장님이 간단한 인적사항을 적으라고 종이를 주셔서 이름과 전화번호, 사인을 했다. 그리고 여권을 달라하셨다. 스쿠터를 빌리기 위해서는 볼모가 필요하다. 내 여권이 아저씨 손에 넘어갔다.
스쿠터 타본 적 있어?
아니요. 처음이에요.
잇츠 오케이.이지, 이지~ 자전거는 탈 줄 알아?
네!
스쿠터를 타본 적 없으면 대여를 무를까 봐 살짝 기가 죽었다.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니 아저씨가 이지, 이지하며 본인이 가르쳐 주시겠단다. 그렇게 아저씨와 생애 처음 스쿠터 연습을 시작했다.
기본적인 조작법을 몇 가지 알려주고 안전을 위해 아저씨가 뒤에 타셔서 스쿠터 운전을 하셨다. 나는 아저씨와 똑같이 핸들에 손을 얹고 힘을 뺐다. 아저씨는 시범을 몇 번 보여 주시다가 이제 나보고 해보라 신다. 오른쪽 핸들을 천천히, 천천히 돌려서 속도를 낸 다음 어느 정도 속도가 나면 발을 떼고 위로 올린다. 자전거를 탈 줄 아니 중심 잡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속도를 높이고 줄이는 게 어설펐다. 천천히 시동을 건 다음 점점 속도를 높여 나가야 하는데 그 미세한 조정이 어려웠다. 급정거, 급발진을 몇 번 하고 나니 식은땀이 흘렀다. 아저씨가 쉬운 것이니 힘을 빼란다. 다시 심호흡을 하고 출발.
아저씨를 뒤에 태우고 조금 달렸다. 아저씬 이만하면 됐다며 혼자 가보라 하신다. 니(你 너), 굳. 그 말에 용기를 얻어 혼자 출발. 아악. 근데 얼마 가지 않아 넘어질 뻔했다. 아저씨가 달려오셨다. 다시 처음부터.
연습을 하는 도중에 바람 때문에 추울까 가져간 바람막이가 도로에 떨어졌다. 아저씨가 옷 어디 갔냐며 물으신다. 我不知道。(워 부쯔따오. 몰라요.) 아저씨가 스쿠터에서 내려 도로를 돌아보신다. 나도 당황하며 길을 보는데 도로 한복판에 떨어져 있다. 손으로 가리키니 아저씨가 달려오던 버스에 양해를 구하고 옷을 주워주신다. 謝謝,老闆 (씨에씨에, 라오반. 감사합니다, 사장님). 너무 감사한 마음에 고개를 꾸벅 숙였다. 사장님은 그냥 웃으셨다. 거치적거리는 것들은 모두 스쿠터 짐통에 넣고 다시 연습을 시작했다.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사장님이 본인을 내려주고 혼자 가보란다. 뒤에서 천천히 사장님이 걸어오셨다. 천천히 속도를 높인 뒤 속도를 조금 더 내고, 발을 뗀다. 간다! 사장님이 멀어진다. 쎄쎼! 사장님을 뒤로하고 스쿠터를 몰았다. 생에 첫 전기스쿠터 운전이 시작되었다.
옆으로 펼쳐진 바다 풍경이 기가 막혔다. 하늘은 맑고 바람은 시원하고. 기분이 끝내준다. 일단은 멈추고 싶지 않아 앞으로 계속 달렸다. 어차피 길은 한 방향으로 나있어 어디로 갈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열심히 달려 도착한 곳. 숨이 멎는다는 게 이런 걸까? 눈앞에 장관이 펼쳐졌다. 보자마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걸 보려고 대만까지 온 거구나, 그런 생각. 분명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이름이 궁금해 그제야 구글맵을 켰다. 이곳이 롱판 공원이란다. 롱판. 롱판.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 몇 번 혼자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
눈으로 본 걸 다 담지 못한다는 것이 이렇게 애석한 일이다. 광활하게 펼쳐진 푸르름과 철썩이는 에메랄드 빛의 파도가 만나는 지점에서 물결이 인다. 사람의 손길과 발길이 채 닿지 못한 곳은 언제나 그들만의 아름다움을 비밀처럼 간직하고 있다. 시간이 허락하고 바람만 조금 덜 분다면 몇 시간이고 여기에 머물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 가볼 곳이 더 남았고, 무엇보다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 눈을 뜨기 힘들 지경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남기며 다시 스쿠터에 앉았다.
그렇게 또 다른 명소들을 가보았지만 롱판 공원만큼 마음에 든 장소는 없었다. 대자연의 위엄 앞에서는 언제나 개미와 다를 바 없는 작디작은 존재가 된다. 그리곤 이내 '그래, 인생 뭐 있나.' 하게 되는 것이다. 자연은 언제나 인간의 해우소인 것이다. 물리적으로든, 심적으로든. 해우소는 인간이 없어도 아무 문제없지만 인간은 해우소 없이 살 수 없다. 그러나 가끔 사람들은 그 사실을 까먹는 듯하다. 일단 나부터.
하루종일 스쿠터를 몰았더니 온몸이 두드려 맞은 듯 뻐근하다. 첫 주행에 온몸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긴장 속에 몰았으니 그럴 만도. 그래도 별 탈 없이 돌아올 수 있어 천만다행이다. 아찔한 순간이 몇 번 있었는데 다행히 하늘이 도우셨는지 잘 넘어갔다. 그러고 보니 오늘 차 경적 소리를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앞에 가는 느려터진 스쿠터가 답답했을 만도 한데. 곳곳에서 배려를 느낀다. 감사한 일이다.
스쿠터를 몰아보니 가장 무서운 건 바람이다. 바람이 너무 세게 불 때는 내가 가려는 방향보다 조금 더 옆으로 기울어진다. 마치 비행기가 난기류를 만날 때처럼 스쿠터가 벌벌 떨리거나 옆으로 밀린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이 있는데, 이때가 가장 무섭다. 선택은 두 가지다. 속력을 높여 바람을 빠르게 뚫고 가거나, 속력을 낮춰 잠시 바람의 저항을 최소화하는 것.
그리고 가장 위험한 건 당황하는 것이다. 일단 당황하기 시작하면 위험하다. 그래서 스쿠터를 모는 내내 작은 소리로 말을 했다. 천천히. 괜찮아. 할 수 있는 만큼만. 나는 내 갈길만 가면 알아서 사람들이 비켜간다. 조심조심. 천천히. 이런 말들의 반복.
내일은 부디 바람이 조금 덜 불었으면. 밖이 바람 소리로 매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