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 본령을 고민할 수 있는 자유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솔직히 문장이 너무 모호해서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지난 금요일, JTBC의 이건희 보도는 알리바이를 만드는 정도에 그쳤다. 대부분 언론이 살짝이라도 걸치면서 '따라가는' 부담을 덜어준 뒤였다. 그런데 며칠 뒤 "루쉰이 그렇게 말했어"를 끌어들이면서 저널리즘의 본령 운운하는 건 비약일 뿐만 아니라 허세가 좀 과한 것 아닐까 싶다. (손석희가 비장한 마음으로 앵커 브리핑을 준비한 그 심정은 이해할 수 있다.)
손석희의 7월25일 앵커 브리핑 동영상과 전문은 여기를 참조. [앵커브리핑] 루쉰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손석희가 인용한 위화의 산문집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에서 인용한 "루쉰이 그렇게 말했어"라는 구절은 "루쉰의 말이 중국인들에게 신뢰와 권위로 받아들여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루쉰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권위를 좇아 맹목적으로 신봉했다는 냉소적인 풍자다. 이걸 인용하면서 루쉰처럼 신뢰 받는 언론이 되겠다고 말하는 건 오독이다.
‘태양이 언제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가’를 놓고 친구와 1년 가까이 논쟁을 벌이던 소년 위화는 “루쉰 선생님께서도 정오에 태양이 지구에서 가장 가깝다고 말씀하셨단 말이야!”란 거짓말로 지루한 논쟁을 한 방에 끝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루쉰이 그런 말을 한 적도 없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박권일님이 소개한 다음 경향신문 칼럼을 참조. "루쉰 선생님이 그러셨어"
손석희는 앵커 브리핑에서 이런 말을 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한국 제일의 대기업 회장의 성매매 의혹. 세간의 관심은 JTBC가 보도하느냐였지요. 저희들이 고민한 것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 기업이 어느 기업이고, 그가 누구냐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동안 뉴스룸은 비록 완벽하진 못했어도 해당 기업에 대한 문제제기성 보도를 힘닿는 한 게을리 하지 않으려 노력해왔습니다.
저희들이 이번 사건을 두고 고민한 것은 단지 뉴스의 가치였습니다. 물론 저희들은 관련 내용을 인용보도해 드렸고, 따라서 해당 뉴스에 대한 가치판단은 보도를 하는 쪽으로 내렸던 셈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좀 더 생각해 볼 문제도 있습니다. 힘있는 대기업이 그 힘을 가지고 언론사들의 자율성을 침해한다면 그것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사실 삼성이 받고 있는 의심은 바로 그런 것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이 사건을 보도함에 있어서 단지 그것이 힘 있는 대기업 회장의 문제냐, 아니냐를 떠나 무엇이 저널리즘의 본령에 맞느냐를 놓고 고민할 수 있는 자유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른바 진영논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말입니다."
중요한 건 다음 세 문장이다.
1. “해당 뉴스에 대한 가치판단은 보도를 하는 쪽으로 내렸던 셈입니다.”
= 뉴스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으면 단순 인용 보도가 아니라 후속 취재나 의미를 짚는 보도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뉴스 가치를 고민했으나 인용 보도하는 정도로 충분하다고 판단했다는 말일까?
(뭐뭐하는 셈이다, 이런 말을 우리 기자들에게도 웬만하면 쓰지 말라고 한다. 뭐가 셈인가.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지. "보도를 하는 쪽으로 내린 셈"인데 왜 그렇게 밖에 보도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2. “무엇이 저널리즘의 본령에 맞느냐를 놓고 고민할 수 있는 자유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 이거 정말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3. “진영논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말입니다.”
= 왜 이런 말을 덧붙였을까. 다른 언론이 진영 논리에 의해 이건희를 비판하거나 비판하지 않는다는 말일까? (여기서 왜 진영논리가 나오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것도 저널리즘 본령과 상대되는 개념으로.)
손석희는 왜 “저널리즘의 본령에 맞는지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가 아니고
“저널리즘의 본령에 맞느냐를 놓고 고민할 수 있는 자유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을까.
고민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야 한다, 이건 고민을 할 수 없는 상황이거나 고민할 자유를 제한당하고 있다는 의미로 읽힌다. 진영 논리 때문에 그렇다는 이야기다.
이 세 문장을 연결해서 해석해 보자면
진영 논리가 아니라 저널리즘의 본령에 따라 뉴스 가치를 고민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지적 또는 반성과 함께, (다른 언론을 향한 지적인지 스스로에 대한 반성인지도 모호하다.)
대기업 눈치를 보느라 보도하지 못한다면 그것도 문제지만
진영 논리에 의해서 뉴스 가치와 무관하게 보도를 해야 한다면 그것도 문제라는 의미로 읽힌다.
“관련 내용을 인용보도해 드렸고, 따라서 해당 뉴스에 대한 가치판단은 보도를 하는 쪽으로 내렸던 셈”.
왜 이렇게 모호하게 표현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인용 보도하는 정도로 충분하다는 가치 판단을 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이 문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보도할 가치가 충분했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면피성 보도에 뒤따르는 이런 허세를 이해할 방법이 없다. “진영 논리”라는 표현을 쓴 것도 심상치 않다.)
손석희는 JTBC가 보도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대한 관심에 상당한 압박을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JTBC 입장에서는 단순 인용 보도를 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부담을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 중앙일보가 기사 한 줄 내보내지 않는 것만 봐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1. 보도할 가치가 있다고 스스로 판단해서 보도했다, 진영 논리에 의해서 보도한 건 아니다,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2. 인용 보도 정도로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고민할 자유도 없이 진영 논리에 의해 보도를 압박 당하는 건 옳지 않다,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3.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뉴스타파는 진영 논리에 따라 보도했고 JTBC는 저널리즘 본령에 맞느냐를 고민한 결과 인용 보도 정도로 충분하다는 판단을 했다,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루쉰을 끌어들여 JTBC도 그렇게 믿을 만한 언론이 되고 싶다고 비장한 멘트를 쏟아낸 건 1. 이건희 성매매 의혹을 단신 처리한 이번 보도와 무관하게 진심을 알아달라는 당부일 수도 있고 2. 축소 보도가 아니라 이 정도가 저널리즘 본령에 맞다고 판단했다는 자신감의 표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아니라면 3. 봐라, 우리는 삼성도 깐다, 우리만큼 저널리즘의 본령을 제대로 고민하는 언론이 있나? 이런 허세였을 수도 있겠다.
(진영논리라는 말을 재벌과 족벌언론의 진영이라는 의미로 썼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역시 생뚱맞기는 마찬가지다. 손석희가 재벌 진영에 속해 있으며 그들의 진영논리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런 말을 썼다면 정말 놀라운 일이다.)
"루쉰이 그렇게 말했어…"
중국의 문화혁명 시절. 사소한 문제로 친구와 다투던 어린 시절의 위화는 갑자기 떠오른 이 한마디 말로 친구를 설득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문화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아큐정전의 작가 루쉰의 말은 중국인들에게 신뢰와 권위로 받아들여졌다는 것.
저도 언젠가는 이 뉴스룸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 이전이든 그 이후든 저나 우리 기자들이나 또 다른 잘못도 있을 것이고, 또한 저널리즘 자체에 대한 고민도 이어지겠지요.
답은 명확합니다. JTBC 뉴스는 잘못이 있다면 주저없이 정정해야 하며, 당장 알지 못했다면 161년 뒤에라도 사과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무엇이 저널리즘의 본령인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 그렇게 해서 훗날, "JTBC 뉴스가 그렇게 말했으니까…"라는 말을 들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뭐든 간에 손석희는 정말 대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