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movie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논노 Oct 02. 2020

우리의 사랑 앞에 윤리란 있을 수 없다.

영화 <레이디 맥베스>을 보고 나서 


나의 사랑은 늘 윤리적이지 못해서, 나는 사랑이란 것이 사실은 윤리적일 수 없지가 않나, 아니 사랑에 있어 윤리는 필요 없고, 아니 더 사실은 윤리가 따라올 수 없지 않나?라고 생각한다. 그 생각을 오랫동안 간직해왔고, 차마 대중의 도덕의 잣대가 무서워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레이디 맥베스>를 보고 나서 나의 생각은 이상함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진짜 사랑 앞에서는 윤리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내 사랑들은 실로 그러했다. 나는 좋아하는 이성을 몰래 미행한 적도 있고, 구글에 전화번호나 이메일 주소를 검색해 그의 인터넷 속 행적을 좇은 적도 있다. 근데 이거 잘못이라면 잘못이지만, 좋아한다면, 그래도 그 혹은 다른 사람에게 해가 가지 않는 다면, 음침한 일인 것을 알지만, 만약 나만 알고 묻어둔다면, 나만 그 비밀을 지킨다면, 나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면, 문제 될 것 없지 않은가? 그저 네가 좋아서 지켜보는 것이 무엇이 잘못된 건가? 네가 곁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뒤에서 어슬렁거릴 수밖에 없는 일은 죄인가.




내가 사랑하는 강아지의 유전자를 복제해 또 내 강아지랑 똑같은 강아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생명을 존중 윤리에 어긋나는 것을 알지만 나는 강아지를 좋아한 것이 아니라 내 강아지를 좋아한 것이라면, 돈이 있다면, 그것이 누군가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다면, 그것이 다른 강아지에게 해를 가하는 일이 아니라면, 그렇게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내 강아지가 노쇄해 추운 겨울을 버틸 수 없는 강아지가 되었다면, 추운 겨울보다 미적지근한 겨울이 내 강아지가 더 버텨낼 수 있는 계절이라면, 그깟 에너지 절약, 일회용품 줄이기, 나 하나 안 해도 되지 않은가? 북극곰이 사라져도 내 강아지가 몇 해라도 겨울을 더 지낼 수 있다면, 기후위기여서 감사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쁜 일일까? 머나먼 지구의 안위보다는 지금 나와 나의 개가 더 중요한 데 내 개와 지구의 운명을 나는 동일한 선상에 놓고 싶지 않은 것이 정녕 나쁜 생각인가?

나는 그저 대의나 정의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내 장벽 안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내고 싶은 사람일 뿐이다.

그래서 맥베스 부인이 내가 오래전부터 궁금해하던 것을 속 시원하게 행하는 모습을 봤을 때 쾌감을 느꼈다. 자신의 쾌락과 사랑을 위해서 모든 방해물 - 사람 - 을 처리해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희열을 느꼈고, 정녕 진심으로 맥베스 부인이 자신의 사랑을 위해서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에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종내 맥베스 부인에게는 진실한 사랑이, 상대방에게는 한철 지나가는 풍성한 과일 같은 사랑이었음에 모든 것이 부서졌음에도 -

어떤 사람들은 아마 자신의 욕심이, 윤리를 무시한 사랑이 종국에는 상대방에게 공포가 되었고, 아마 맥베스 부인의 남자가 아이를 죽였다고 자수하지 않았더라도 결말은 언젠가 파국으로 치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가 선택한 살인은 내게 합리적이었다. 우리의 어떤 사랑 앞에 윤리란 있을 수 없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