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나고 내가 너다

저 자식의 단점이 내 모습일 수 있는 이유

by 이진

 우리는 이미 수없이 많은 책과 현인들에게서 보고 들어왔다. '내가 보는 타인의 단점은 단지 내 모습의 투영일 뿐이다'라고.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이 논리가 이해되지 않을 때도 있다. 남의 행동에서 보이는 단점이 어떻게 나의 단점일 수 있을까? 저 못난 자식과 나는 전혀 다른 것 같은데, 어떻게 나와 단점을 공유한다는 말인가. 이 철학적 고민 속에서 찾아낸 과학적 실험 하나가 있다. 바로 빛의 입자와 파동 실험이다.


 한 때 과학자들은 빛이 운동하는 것(파동)인가 물질(입자)인가에 대해 열띤 논쟁을 벌였다. 18세기에 활동했던 과학자 뉴턴은 빛은 파동이라고 주장했다. 뉴턴의 말을 듣고 과학계는 빛은 당연히 파동이겠거니 생각했다. 파동이란 즉 계속되는 활동, 진동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 아인슈타인은 빛이 입자라고 주장했다. 당시까지 빛이 파동이라고 믿는 과학자가 대다수였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의 주장은 무시당했지만, 점점 더 많은 과학자들이 행한 실험에서 빛이 입자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여기서 입자란 원자(물리적 최소 단위) 보다 더 작은 물체를 말한다. 미립자 등으로 나눠지며 밀가루 한 톨만큼의 작은 크기의 물체라고 보면 되겠다.


 여기서 재미있는 광경이 생겨났다. 각각 과학자들이 파동이니 입자니 하며 씨름할 때마다 실험의 결과는 계속해서 다르게 나타난 것이다. 입자라는 데에 공감하는 아인슈타인파 과학자들의 실험에서는 빛이 정말 입자로 판명이 났고, 파동이라는 데에 공감하는 뉴턴파 과학자들의 실험에서는 빛이 파동인 것으로 결론지어졌기 때문이다. 아직도 빛 실험은 그 미스터리로 남아서 이는 '상보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즉 '이게 저것이고 저것이 이것인' 상황인 것이다. 내가 A의 방식으로 보면 A로 도출되고, B의 방식으로 보는 이에게는 B로 도출되는 다소 황당한 모순이었다. 이는 사실 알고 보면 자연의 이치이다. 마치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안티팬에게도 일말의 팬심이라는 것이 있듯이, 상보성의 개념은 이해되지 않는 많은 현상을 푸는 실마리가 된다.




 이 실험을 지켜보면서 나는 타인의 단점이 어떻게 나의 단점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내가 그를 단점이 가득한 사람으로 바라본다면 그는 정말 당연하게도 그런 사람이 되었다. 마치 입자로 빛을 바라보면 입자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런 관점은 오롯이 나의 관점이기 때문에, 매일 붙어 다니며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 자신이 경험한 단점들이 남에게서 보이기가 더 쉬운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네가 나고 내가 너다'라는 말도 안 되는 듯한 논리가 이해되기 시작한다.


 동양 철학에서, 특히 장자의 도(道) 사상에서 말하는 것도 비슷하게 설명된다. 이것과 저것의 대립이 없고, 세상과 나의 대립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세상을 넘어서거나 세상이 나를 넘어서지도 않는다. 짝꿍처럼 서로를 비추는 장자의 도에 대한 설명은 이미 상보성이라는 과학개념으로 증명되는 자연의 도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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