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54. 저기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나는 캐럴이 들려오는 이맘때쯤의 겨울을 참 좋아한다. 물론 요즘같이 추울 때는 이불을 박차고 나오기도 힘들고 매번 아침 찬물로 세수를 하며 고역을 치루기도 하지만, 그런 점을 감수하고서라도 겨울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계절이다. 선선한 호시절인 가을과는 잠시 이별을 고했더랬다. 대신에 얼음같이 깨끗하고 순수한 찬 공기가 매일 아침 나를 반긴다.
어제저녁에도 어김없이 산책을 나갔다. 무르도록 따뜻한 집 공기를 벗어나서 신선하고 뻥 뚫린 찬바람을 쐬다 보니 자연스럽게 웃음이 입가에 스며들었다. 동시에 평소 잘해본 적 없는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서 솟구쳐 나왔다.
지금, 여기서 행복하다!
깨끗하고 시원한 공기에 성큼성큼 팔다리를 움직이며 걷다 보니 모든 것이 완벽한 느낌이 들었다. 보온용으로도 아주 유용한 헤드셋으로 듣는 음악이 분위기에 한몫을 했다. 박자에 맞춰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을 놀이처럼 여기며 평범한 하루의 끝을 즐겼다.
그렇게 내리 걷다가 달리기를 시작했다. 10분이 지난 후 헐떡이는 숨을 내뱉으며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숨을 차분하게 들이쉬고 내뱉기 위해 집중해서 숨을 쉬기로 했다. 코로 스읍, 입으로 후. 다섯 번 정도의 진중한 호흡을 하다 보니 내가 들이마시고 있는 이 공기조차도 하나의 보살핌과 사랑으로 느껴졌다. '존재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기에서 산소를 들이마시고 내뱉는다. 뱉은 숨은 바깥세상에 퍼지고, 새로운 공기를 안으로 들이마신다. 세상이 나에게 하나의 선물을 주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나의 존재 그 자체일 것이다. 존재 속에 숨쉬기와 걷기가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우리가 이 생에서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어떤 굉장한 목표를 이루거나 원하는 일을 멋지게 해내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단지 존재하는 존재다. 인간은 실은 존재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존재는 항상 '여기 이 곳'을 배경으로 한다. 어떠한 것도 나라는 존재를 넘어서는 가치는 없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스스로의 존재 앞에 다른 어떤 것을 가져다 붙이곤 한다. 어떤 능력, 어떤 직업, 어떤 성격 등... 가끔은 나를 형용하는 언어가 나의 모든 것을 대변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나라는 존재 없이는 그저 관념일 뿐이다. 그동안 존재의 빛과 사랑을 잊은 채 살아왔다 하더라도, 다행히 아직까지도 현재라는 배경은 나를 든든히 받들고 있다. 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지금을 하나의 기회로 잘 보살펴주는 것이겠지.
그러니 우리 지금, 당장, 여기서 존재하기로 하자. 존재하는 것에도 별 거 없다. 말하자면 숨을 조금 더 의식적으로 쉬는 것뿐이다. 나는 내 몸 안의 적혈구가 심장을 향하는지 발등을 타고 내려가는지는 모르지만, 숨을 조금 더 깊게 쉴 수는 있다. 단순함에 몸을 맡기는 것이 1번 원칙이다.
연말을 맞아 한 가지 여러분께 전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당신이 어떤 사람이라도 당신은 가치 있다. 당신의 존재는 이 세상이 빛나는 이유라는 것을 잊지 말기를.
인생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지 증명하기 위함이 아니다.
- 랄프 왈도 에머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