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82. 좋은 책을 뼛속에 새기는 일
나는 스무 살 무렵부터 필사를 했다. 아빠의 스크랩 습관을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란 것이 이유였을까, 나도 자연스럽게 필사를 시작했다. 첫 필사 노트에는 당시 자주 보던 '대학내일' 잡지를 작게 잘라서 스크랩하거나 간단한 글이나 명언, 시 등을 기록해놓았다. 당시 동아리에서 만난 선배가 내 필사 노트를 보더니 '넌 왠지 성공할 것 같다'라고 말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기록의 열의가 그 손바닥만 한 노트에 모두 담겨있었으리라. 낙서와 메모와 스크랩이 덕지덕지 붙은 나의 첫 필사 노트가 아직 기억에 남는다. 지금은 어디 갖다 버렸는지 없다...
이후 나는 완전히 새롭게 필사용 노트를 하나 만들었다. 필사로 꼬박 채운 노트는 두 권이 되고, 세 권이 됐다. 올해로 벌써 세 번째 노트를 장만해서 새로운 글들을 써 내려가고 있다. 필사 노트는 나만의 역사책이다. 시간이 지난 뒤에 이전 노트를 넘겨볼 때 내가 그간 얼마나 발전했는지, 어떤 식으로 성장했는지 톺아볼 수 있다. 남의 글을 기록하는 것이지만 내가 완전히 이해한 글들과 당시 깊게 감명을 받은 글만을 기록해놓기 때문에 연도별로 바뀌는 나만의 관심사를 알 수 있다. 일기보다도 훨씬 더 정갈하게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기록이다.
약 4-5년간 필사를 하고 노트를 간직하는 과정에서 필사 노트의 장점을 몸소 느꼈다. 첫 번째로는 글의 휴대가 편하고 가볍다는 점이 있다. 책을 들고 다니기 무거울 때 필사 노트가 그 진가를 발휘한다. 가끔 카페에 가서 라떼를 마시며 사색하고 싶은 날, 또는 가볍게 바람 쐬러 나가고 싶은 날에 나는 필사 노트를 챙겨 나간다. 손에 가볍게 쥐어지는 노트는 버스나 지하철에서 읽을 수도 있고, 자투리 시간에도 부담 없이 꺼내어 읽을 수 있다. 작은 노트 하나에 책 열 권이 넘는 가치를 가지고 있으므로 책을 들고 다니는 것보다 무게 면에서나 핵심 면에서나 이득이다.
또 다른 필사 노트의 장점은 좋은 작가의 좋은 글들을 다독(多讀)하면서 그들의 문체나 사상을 나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방에서 창조가 만들어진다고 하지 않는가. 좋은 글들을 나의 손으로 기록을 해두고 또 반복해서 읽는 과정에서, 작가의 관점과 나의 관점이 융합되면 생각의 확장이 일어나게 된다. 여러 작가로부터 조금씩 얻어내는 지혜로부터 나는 연결점을 찾고, 나만의 관점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
필사는 단지 남의 말을 따라 쓰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글을 꾸준히 읽고 소화하는 과정이다. 가장 쉽게 좋은 글을 기억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마치 영어단어를 외우려면 반복해서 봐야 하듯이, 필사도 그러한 개념이다. 굳이 외우는 것이 아니더라도 글이 감명 깊을 때 간직해서 두고두고 읽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필사 노트란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다. 아래 사진은 나의 이전 필사 노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