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ucas Sep 09. 2021

제네바 생활 1년을 맞이하며 근황

1. 얼마 전 순례길을 마쳤다. 사실 특별한 건 하나도 없었다. 그냥 수많은 길들 중 하나였다. 만나는 사람이 특별하지도 않았고, 순례길이라서 특별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랬다. 인종차별을 하는 사람들도 만났고, 새로운 사람들과의 관계보다는 혼자 지내면서 망상(?)하는 것을 선호하는 나에게는 가끔 사람들과의 만남이 벅차기도 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면 오히려 더 불안해지기도 하고, 내 성격상 그렇게 나에게 엄청나게 도움이 되는 곳은 아니었다. 그래서 779km를 30일 간 크게 다치지 않고 마쳤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2. 전에 작성한 글에서 제네바 대학원으로 오게 된 남자동생 J가 드디어 제네바로 오게 되었고, 같이 와인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사실 이번에 처음 얼굴을 보게 된 건데도 그간 자주(?) 연락을 하며 생긴 내적 친밀감으로 인해 정말 금방 친해지게 되었다. 더군다나 관심사도 인도주의이고, 이 친구도 현재 내가 선택한 Power & Conflict 트랙을 선택하다 보니 이 학교에서 이 트랙을 선택한 유이한 한국인으로서 공통분모로 이야기할 것도 많았다. 이 친구도 고민하는 것은 다 비슷했다. 이 길을 준비하고 석사 합격하고, 운이 좋게 (내가 소개해준!!!!) 장학금까지 받고 오게 되었는데, 어느 순간 이 길이 내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것이 그것이다. 비슷한 언어고민, 진로고민, 관심사, 나이대 그리고 (왜인지 모르겠는데 상당히 올드하고 찌질한) 음악취향까지 비슷하다. 20대 한국인 남성으로서 연애나 결혼에 대해 가지고 있는 고민도 비슷해서 그런지 처음으로 제네바에서 고민을 공유하는 사람이 생겨서 재미있고 앞으로 자주  와인을 마실 것 같은 친구다. 


3. 순례길을 마친 뒤  제네바로 돌아와 방 안에 가만히 앉아있다가 여러가지 생각을 해보았다. 이제 정말로 1년이라는 시간밖에는 남지 않았다. 그 안에 내 고민을 끝내야할텐데 내가 잘 할 수 있을지에 관한 고민이 그것이다. 고민이 생길때마다 한국에서는 의지하는 학교 선배들에게 연락을 했다. 내가 정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맞을지 선배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조언들은 참 많은 도움이 되었다. 가끔 내가 엇나갈 수도 있는 경우에도 비슷한 경험을 한 선배들의 이야기는 항상 재미있기도, 어렵기도 했지만 결론적으로 어떻게 행동하면 될지에 대한 큰 방향을 정해주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것이 없다 보니 약간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그러던 중 기차를 타고 한인성당을 가다가 우연히 한국인 남자분 H께서 말을 걸어주셨다. 3년 정도 WIPO(세계지적재산권기구)에서 일을 하고 있고, 그 전에는 뉴욕에서 11년 가까이 지내면서 유엔에서도 일했다고 하셨다. 놀랍게도 내가 알고 있는 국제기구에 진출한 한국경찰 분들을 전부 다 알고 계셨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참 재미있고 좋은 경험을 하신 분이었다. UN HQ에서 internal investigation 업무를 하시면서 우연치 않게 경찰 분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고 하신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다가 같이 식사를 하기로 약속하고 번호를 교환했다. 국제개발, 국제 업계에서 왜인지 모르게 젊은 2,30대 한국인 남성 분들이 매우 적은 편이다. 그래서 J랑 금방 친해진 것도 있는데, H분처럼 여러 국제경험을 가지고 계신 롤모델이 될 수 있는 분들이 있어 조금은 위로가 된다. 누가 왜이렇게 한국인 남자분들에게 집착(?)하냐고 물어봤는데, 여자분들이 불편하다기보다는 20대 내내 남초집단에서 생활해왔다 보니... 가끔씩 욕도 해주고 이런저런 비슷한 고민과 경험을 해왔던 형들에게 듣는 조언이 그 동안 많은 도움이 되었어서 그런지 롤모델이 될 수 있는 형같은 분들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뿐이다. (나의 미래에 대한 고민과 찡찡거림을 가장 많이 들어주는 포항(겸 고베)의 딸 K누나에게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이런 분들이 조금은 계신다는 생각에 심적으로 기댈 수 있어서 편하다.


5. 논문 주제를 드디어 정했다. 교수님을 컨택했고, 계획서를한 장으로 작성했으며 이제 교수님을 만나 어떤 식으로 보완을 하고 작성할지만 논하면 된다. 어쩌다 인도주의, 인권을 공부하고 경찰과 연결시켜서 논문주제를 정하게 되었다. 1년 사이에 이런 테제를 던지는 것은 가능한 정도가 되었음에 감사함을 느낀다. 


6. 제네바에 온지 오늘로서 정확하게 1년이 되었다. 작년에 어버버하면서 도착했던 것 생각하면 지금은 그래도 영어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정도는 된 것 같다. 아직도 형편없는 불어실력이 답답하긴 하지만 말이다. 남은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내가 어떤 사람이 될 수 있을지 기대도 되고 걱정도 된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내 스스로에 대한 부족함, 인맥에 대한 부족함, 논리에 대한 부족함 등 많은 부족함을 느끼는데, 1년 동안 이 부족함을 조금은 채울 수 있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순례길을 걷는 중입니다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