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저임금도 안 주는데 한 달치 월급도 줄 수 없다고?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에서 봐도 비극
주급 47만 원. 최저임금만은 사수하려고 노력했던 전의를 상실했다.
고작 만원. 줄 수 있는데 주지 않겠다는. 내가 원하는 만큼은 절대 주지 못한다는, 신입의 기를 꺾겠다는 그 의도가 다분히 느껴져서 더 이상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회사를 다녀야 했다.
그런데 나는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하였는지. 그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렸다.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을 마주해도 티를 내지 않아야 하는데, 회의 중에 눈이라도 마주치면 황급하게 고개를 돌려 모니터만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래 나는 무경력이니까.
그래 그래도 종영하면 끝나니까.
그래 메인과 부장을 빼면 사람들은 좋으니까.
나는 부당함을 합리화하며 속 안에서부터 밀려오는 구역감을 달래야 했다.
작가들은 방송이 나가면 주급으로 급여를 받는다.
그렇기에 방송이 나가지 않는 ‘기획단계’에서는 주 단위도 아니고 월 단위도 아닌, 체계 없는 급여를 받게 된다.
심지어 기획단계에서 10년 차 이상의 메인급 작가들은 원래 급여의 50%, 서브들은 70-80%, 막내들은 100%를 지급받아 실상 이 기간에는 모두 한 달 기준으로 200만 원 언저리의 급여를 받으며 근무를 하게 된다.
이해가 가지 않는 체계다.
기획단계라고 해서 일이 없는 것도 아닌지라 심히 부당하다고 생각되지만 ‘관행’이니까. 나 같은 막내 작가는 그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다. 최저도 못 받는 상황에 메인과 서브의 급여를 걱정하는 건 분수에도 맞지 않은 행동이니까.
메인은 우리를 불러놓고 말했다.
“사전 기획료 예산에 맞추다 보니 4-5주의 급여를 주지 못할 것 같다”
입사한 이래로 상식 밖의 일들이 벌어져서 인지 나는 다른 세계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대형 방송국에서 한 달 동안 무급으로 일을 시킨다는 말이 크게 부당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무서웠다. 잘못된 일이 잘못됐다고 생각되지 않게 되는 현실이.
‘아. 이것도 관행인가? 한 달치 급여를 받지 못하는 게?’
나는 두리번거리며 선배 작가들의 표정만 바라봤고 그들은 아무 말도 없었다. 정적이었다. 메인은 ‘돈이 없다’는 푸념만 늘어놓더니 심지어 기획료 지급일도 알지 못해서 가장 막내인 나에게 알아보라고 말한 뒤 퇴근해버렸다.
메인이 떠나고 나서야 회의실 안에서의 침묵이 깨졌다.
“이게 말이 되니? 아니 방영 일 주 전은 안주는 게 좀 흔하기는 한데 4주? 미쳤다 여기”
선배 작가들의 분통에 나는 돈을 못 받을 수 있다는 분노보다는 안심이 되었다. ‘아 그래, 이건 잘못된 거구나’하면서.
그 뒤로 선배 작가들의 노력 끝에 부장에게서 기획료를 어느 정도 증액시켜준다는 답변이 돌아왔지만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이없는 일이다. 당연히 줘야 하는걸 얼마나 더 줄 수 있는지 모르겠다니. 일한 만큼 돈을 달라고 애걸복걸해야 하는 이 데자뷔 같은 상황에 진절머리가 났다.
연예인 1회 출연료에는 적게는 300만 원 많으면 3-4천만 원까지 주면서. 몸 갈아 일하는 스태프들에게 돌아오는 건 푸대접뿐이구나. 그래 이 바닥이 그렇지. 작가가 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합리화에 절여진 내 몸은 서서히 불어 터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