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스무살

봉인 된 원빈 편

by 이지속

지속은 병히를 소보로 빵 부스러기 정도로 생각했다. 옷에 흘린 부스러기는 탁탁 털어내면 그만이니까. 이상형도 아닌 남자와 첫 연애를 시작한 건 사람의 감정을 만만하게 본 지속의 오만함이었다. 결혼 전 세명의 남자와 연애를 하고 네 번째 남자와 결혼하기로 세운 인생계획에서 지속이 병히에게 줄 수 있는 시간은 단 6개월뿐이었다.

지속은 처음으로 동물원에서 병히와 데이트를 했고 연극도 뮤지컬도 지속의 모든 첫 경험 순간엔 늘 병히가 있었다. 설렘은 없었지만 편안과 안정을 주는 남자였다. 첫 연애의 달콤함에 취한 지속은 자신이 정한 헤어짐의 순간이 다가오는 것도 잊고 말았다. 그래서 결혼 전 세명의 남자를 만난다는 계획이 두 명으로 줄었고 병히에게 6개월의 시간을 더 주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다시 지속이 정한 헤어짐의 순간이 왔을 때 지속은 병히가 쉽게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가 아닌 섬유 속까지 염색되다 못해 전신으로 번지는 잉크였단 걸 깨달았다.

지속은 병히의 비루한 육신에 원빈이 봉인되어 있다고 믿었다. 그만큼 그의 내면이 아름다웠다. 지속은 대학원생으로 병히는 마지막 학기를 다니는 대학생으로 둘은 스무 살 때도 못해본 CC가 되어 캠퍼스를 누볐다. 조상님 학번이었던 병히는 정문 근처 소녀시대 싸인이 벽에 붙은 식당에 지속을 데려갔고 이디야 1호점이 바로 여기였다고 알려줬으며, 개미굴 같은 지하 커피숍 터방내의 파르페가 맛있다고 추천해줬다.

지속은 병히와 만나며 다시 스무 살을 살았다. 진짜 스무 살을 무디게 버텨온 지속은 28살에 다시 만난 스무 살은 꿈결처럼 보냈다. 무엇보다 병히가 자신을 바라보는 따뜻한 눈빛이 좋았다. 인간관계에서 지속은 늘 날을 세우거나 눈치를 보거나 주눅이 든 세 가지 포지션 중 하나를 꺼내어 행동했는데 병히와 있을 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서 좋았다.

지속에겐 혼자 있을 때 거울과 대화하는 아무도 모르는 버릇이 하나 있었는데 병히와 만난 뒤론 거울 앞에서 매무새만 정돈했을 뿐 더 이상 혼잣말로 대화하지 않았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병히가 생겨 그런 것이라고 지속은 생각했다.

무난하고 편안한 연애를 하고 있는 지속은 행복했다. 그래서 지금은 미래에 그녀가 어떤 시련을 겪고 실망하고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언급하고 싶지 않다. 지속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웃을 수 있을 때 아무 생각 없이 마음껏 배가 찢어져라 웃어야 한다고 그래야 뒤 따라오는 시련에도 코미디 빅리그를 보며 피식 웃을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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