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발작 스위치

화내고 싶지 않다 편

by 이지속

분노 조절자 지속에겐 분노 발작 스위치가 있었다. 보통은 분노할 때마다 자중하여 속만 부글거릴 뿐 대수롭지 않게 넘겼으나 한 번씩 스위치가 딸깍 눌리면 지속은 눈이 뒤집어졌다.

지속은 오후 출근 전 취미로 음악학원에서 기타를 배웠는데 강사가 자주 늦었다. 그래도 십 분 정도는 애교로 여기며 홀로 연습을 하곤 했는데 한날은 삼십 분이 지나도 강사가 안 오는 것이 아닌가! 늘 자리를 지키던 원장도 없어서 혼자 어째야 하나 원장에게 전화를 걸며 종종 거리는데 원장은 끝까지 지속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수업 시간이 끝나도록 학원에 강사도 원장도 코빼기를 안보이자 지속의 분노 발작 스위치가 켜지고야 말았다. 얼마 뒤 교실로 들어서는 원장이 보이자 지속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동안 수줍게 살곰살곰 들어와 딩가딩가 기타를 배우고 말없이 조심스레 정리 후 사라지던 지속이었다.

원장은 몹시 놀라며 지속에게 그렇게 안 봤는데 다혈질이라며 지가 되레 화를 냈다.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를 해도 분노가 꺼질까 말까인데 감히 화를 내? 지속은 그동안 강사가 늦었던 날짜와 시간을 하나하나 나열했더니, 원장도 지지 않고 주 2회 정규 수업을 다 안 듣고 주 1회만 들었기에 강사를 헷갈리게 한 지속의 잘못이라고 받아쳤다. 이게 뭔 개소리 왈왈인가. 지속은 닥치고 환불을 당장 하라고 자벌레 뛰듯 팔딱거렸고 그 모습을 황당하게 보던 원장은 줄 테니 나가라고 했다. 지속은 거기서 물러서지 않았다. 환불 이체 문자를 봐야 나간다고 바락바락 악을 쓰니 원장이 긴 한숨을 쉬더니 원비를 환불해줬다. 친근한 충청도 사투리로 사람 좋은 척하던 음악학원 원장에게 지속은 치를 떨었다. 지속의 전화만 원장이 바로 받았어도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양해만 구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세상은 자신을 분노케 하는지 통 이유를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음악 학원을 관두고 면허가 없던 지속은 오너드라이버를 꿈꾸며 운전면허학원에 등록했다. 필기시험과 기능시험을 한방에 붙으며 역시 타고난 슈마허가 아닌가 하는 착각에 젖었을 때 도로 주행 시험에서 똑 떨어졌다. 근데 좀 억울했다. 제일 마지막에 시험을 치러 해가 질 때쯤이라 감독관이 지속에게 나이트를 켜보라고 한 것이다. 한낮의 도로 주행 연습 때 한 번도 나이트를 켜보지 않았기에 몰랐다. 지속이 모른다고 하니 점수를 팍 깎는 것이 아닌가! 시동을 켜자마자 일어난 돌발상황에 지속은 기분이 상했고 결국 좌회전을 하다 다른 차선으로 돌진해 그 자리에서 탈락했다.

운전 미숙이긴 했지만 뭔가 분했다. 그래서 학원 접수처에 가서, 나이트 켜는 거 연습 땐 가르쳐주지도 않더니 왜 해질녘 도로주행 시험을 보게 했냐고 좋게 좋게 물으니 갑자기 직원이

"애기 엄마, 나이트는 당연히 켤 수 있어야죠. 본인이 못해서 탈락해놓고 왜 그래요?"

그 순간 지속의 분노 발작 스위치가 켜졌다. "애기 엄마" 미혼의 지속은 학원에 애를 업고 간 적도, 결혼을 했다 말한 적도 없었다. 이게 뭔 소리래.

지속은 내가 애 업고 여기 온 거 본 적 있냐고 어디서 애 엄마 타령하면서 사람 속을 긁냐고 내가 애기 엄마면 아줌마는 할머니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니 다른 직원들이 나서서 지속을 말렸다.

결국 어떻게 되었느냐. 지속은 그 운전학원을 다신 못 갔다. 재시험을 보면 됐지만 그 난리를 치고 어떻게 다니겠는가. 늘 분노는 이런 식이었다. 지속이 참으면 해피앤딩이고 못 참고 표출하면 파국이었다. 그리고 그 여파로 인한 손해는 모조리 지속의 몫이었다. 지속은 20대의 대부분을 이렇게 분노하며 보냈다.

심지어 아슬아슬하게 스위치가 켜질 듯 말 듯 했던 노처녀 원장에게도 결국 분노를 터뜨렸다. 강사 3년 차 한 겨울에 원장이 오전 일찍 강사들을 소집했다. 두꺼운 전단지 뭉치를 나눠주며 아파트 단지에 돌리라고 시켰다. 지속은 몸살끼가 있었는데 못한다고 뺄 수 없었다. 꾹 참고 서너 시간 동안 전단지를 돌렸다. 그리곤 분노했다. 원장 본인은 생리통 때문에 할 수 없다며 강사들만 시킨 것을 알아버린 것이다. 그날 밤 지속은 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학원을 관둘 것이며 퇴직금을 주지 않으면 노동청에 고발하겠다고 말했다. 원장은 지금 자길 협박하냐 물었고 이 통화는 모두 녹취되고 있으니 판단은 경찰이 하지 않겠냐고 지속은 덤덤하게 말했다. 그러자 뱀 같은 원장은 급 태세를 전환하며 뭐가 그리 섭섭했냐고 미안하다고 눈물로 사죄했다. 지속은 이미 원장에게 막말을 잔뜩 퍼부은 후라 후련했기에 그녀의 사과를 받고 계속 학원을 다녔다.

지속은 이때의 분노를 560만 원짜리 퇴직금 분노라 이름 지어 불렀다. 왜냐면 지속은 결국 퇴직금은 구경도 못했고 오히려 퇴직금을 주지 않으려, 원장이 갖은 수를 쓴 시간을 벌어줬기 때문이었다. 분노는 늘 지속에게 손해만 끼쳤다. 마음 약한 지속은 화를 내지르고 나면 화낸 것이 미안해 더는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 참아 넘겼다. 그래서 지속은 까맣게 몰랐다. 진정성 있는 사과를 했다 믿었던 원장이 지속을 엿 먹이려 바득바득 칼을 갈고 있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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