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떠나거라

나는 분노 표출자입니다 편

by 이지속

이쯤이면 모두가 눈치를 챘으리라. 지속은 분노 조절자가 아닌 분노 표출자였다. 하지만 지속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자. 그녀도 분명 억울할 테니.

지속은 열에 아홉 번을 꾹 참다 단 한 번의 분노로 다혈질이란 소리를 듣는 게 몹시 억울했다. 왜 아홉 번의 뼈를 깎는 인고의 시간을 무시한 채 단 한 번의 분노 폭발로 자신을 매도하는지 자신의 주변인들이 지긋지긋했다. 지속이 웃으며 불쾌한 감정을 억누를 땐 만만하게 보며 더 막대하다가 돌변해 화를 내면 두 얼굴이네 이중인격이네 성질이 더럽네 하며 욕을 하지만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예전처럼 만만하게 보진 않았다. 그래서 지속은 이 구역 미친년이 되어 광광거리기로 다짐했다. 지랄발광은 마치 지속의 팔뚝에 새긴 용 문신처럼 부적이 되어 험난하고 더러운 세상으로부터 그녀를 지켜줬다.

지속은 자신이 참지 않고 매번 분노를 표출했다면 현재 안락한 소파가 아닌 차디찬 감방 바닥에서 벽 없는 화장실을 보며 식사를 했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노처녀 원장은 진작 저세상의 별이 되었겠지. 반짝반짝.

한없이 착하고 평화롭고 싶은 지속의 일상에 깔짝깔짝 잽을 날리며 어디 한번 약 올라봐라 하는 것들을 모조리 한데 뭉쳐 멀리멀리 지구 밖으로 날려버리고 싶었다. 특히 인터넷 짤로만 보았던 맘충(여성과 아이를 혐오하는 차별성 단어라 지양하나 이해를 위해 딱 한 번만 쓸 예정) 아니 한 학부모, 수아 엄마는 이해 못 할 행동으로 지속을 화나게 했다. 9살 수아가 학원에 무릎이 다 까져 피를 흘리며 들어왔다. 지속이 놀라서 물으니 넘어졌다는데 아이를 살펴보니 신고 있는 신발이 엄청 컸다. 헐렁 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헐떡 거리는 수준이었다. 아이의 낡고 큰 신발을 보니 정말 화가 났다. 그래도 감정을 누르고 임시방편으로 연고를 발라주고 방수 밴드를 붙여 수업 후 집에 보냈다. 다음날 학원에 오자마자 지속을 찾는 전화가 울렸는데 수아 엄마였다. 지속은 뭘 감사 전화까지 하셨나 하고 받으니 수아에게 붙여준 방수 밴드가 낡았으니 새로 붙여주란 내용이었다. 지 새끼 상처에 붙여줄 밴드도 하나 안 사고 뭐하는 여자인지 정말 화가 솟구쳤다.

지속은 최대한 친절하게 이렇게 말했다.

"그 밴드는 제가 가지고 있던 개인적인 물품으로 현재 여분은 없고요. 수아 신발이 커서 넘어졌던데 학원에 올 땐 맞는 신발을 신겨 보내주세요."

수아 엄마는 떨떠름하게 알겠다 말하곤 전화를 끊었다. 지속은 수아를 떠올릴 때마다 허름한 옷에 낡고 큰 신발을 신은 모습이 아른거려 마음이 불편했다. 그 감정은 지속이 수아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기에 가졌던 죄책감이었다.

학원 강사를 하다 보면 별별 아이들과 마주하고 그 별별 아이들의 오리지널 버전인 별별 학부모를 만나게 된다. 지속의 반 준영이가 뽁뽁이를 가지고 자기 볼에 압축시키며 놀고 있었다. 대개 벽이나 바닥에 압축시켜 붙인 뒤 뽁하고 튀어올라 가지고 노는 장난감인데 그걸 볼에 하고 있으니 지켜보던 지속은 걱정이 되어 멍이 든다고 말렸다. 그렇게 준영이를 지도했던 소소한 일이 엄청난 후폭풍이 되어 지속을 분노케 했다. 두 볼에 멍이 든 준영이가 엄마에게 지속쌤이 볼을 꼬집어 멍들었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지속은 졸지에 아이를 학대한 인간 말종 쓰레기가 되어 버렸고 항의하는 학부모에게 진실을 말하며 교실에 시시티브이가 있으니 녹화분을 보시러 오라고까지 얘기했다.

준영 엄마는 뭘 그렇게까지 됐어요 하며 사과도 없이 전화를 끊었고 지속은 상대의 뉘앙스로 자신의 말을 믿지 않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 후로 오랫동안 지속은 괴로웠다. 준영이는 왜 거짓말을 했을까. 아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학대가 없었단 증거가 있으니 괜찮다고 스스로를 달랬지만 실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신물이 올라 올 정도로 사는 게 버거웠다. 그래서 모든 게 활활 불타버리길 바랐다.

지속은 잠들기 전 학원에 불을 지르는 상상을 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새벽의 학원을 대상으로. 학원 잡동사니와 영어책들이 지속의 눈앞에서 이글이글거리는 화염 속 시커먼 재가 되어버리고 다음 날 참혹한 폐허를 본 원장이 짐승처럼 울부짖는 장면을, 그 모습을 떠올려야만 지속은 비로소 잠에 들 수 있었다. 그래야 다음날 아무렇지 않게 평온한 얼굴로 지속쌤이 되어 하루를 보낼 수가 있었다.

지속은 아직도 학원을 불태우는 상상을 한다. 자신을 분노하게 했던 모든 것들을 지구 상에서 사라지게 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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