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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 May 30. 2023

수치와 좌절을 담고 살아도 괜찮다는 위로를 받았다

단편집 독서후기 01

정미경, 《나의 피투성이 연인》


정미경.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작가였다.

책의 제목이 인상 깊어 읽게 되었는데 근래에 읽은 한국 소설 중에 가장 마음이 갔다.

원체 한국 소설을 잘 읽지 않는 편이라 내가 못 들어봤을 뿐, 작가는 많은 작품을 냈고 이미 타계하신 분이었다.


책의 앞 속표지에 적힌 작품 활동을 가만히 보았다.

1960년생이고 2017년에 별세했다.

1987년에 중앙일보에서 희곡이 당선되었고, 2001년에 단편 소설을 문학잡지에 발표한 뒤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27살에 희곡이 당선된 후, 41살에 단편 소설을 써냈다. 

그 사이 그는 어떻게 살았을지 궁금해졌다. 글을 쓰려고 애쓰는 사람이었을지, 희곡과 대본을 쓰는 일을 했을지, 주부의 생활을 살면서 글쓰기는 미뤄두었을지 궁금했다. 알 수 없는 그의 생활이 궁금해진 것은, 책에서 느껴진 작가의 예민함을 어떻게 쌓았을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이 책은  내가 읽은 민음사의 총서 이전에 2004년에 발표했나 보다.

표제작이자 책의 첫 단편인 '나의 피투성이 연인'부터 마지막 단편인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까지 모든 작품이 하나하나 아쉬움이 없는 글들이었다. 차분한 논조로 다양한 삶을 묘사했다. 그의 어조는, 책 말미의 해설에서 설명하는 바와 같이, 서늘하기도 하고 침착하기도 했다. 


글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예상치 못한 배신 또는 사건을 맞이한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에서의 유선은 남편 김주현을 교통사고로 잃은 뒤, 그의 작품을 찾던 중 그의 불륜의 정황을 담은 편지글을 발견한다.

'호텔 유로'에서는 글 잘 썼던 나는 이혼녀로 생활고로 고민하는 방송작가이고, 내가 만나는 윤미예는 부러움의 대상인 예쁘고 부유한 연예인이다.

'성스러운 봄'에서 나는 보험 사정인으로 난치병에 걸린 딸을 잃고 빚만 남은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비소 여인'의 나는 방역 업자로 한 여자 기숙사에서 연인을 만나게 되었다. 콜타르처럼 진하고 쇳물처럼 뜨겁게 타 주던 그녀의 커피와 그녀가 해주던 집밥에는 아마도 비소가 들어 있는 듯하다.

'나릿빛 사랑의 추억'에서 나는 헤어진 연인과 찍은 사진을 1년 만에 찾은 뒤, 충동적으로 그녀에게 전화를 한다. 사진을 없애라는 부탁에 바로 없앴는데, 그 이후 사진의 처리를 믿지 않는 그녀의 약혼자가 보내는 조폭들을 마주하게 된다.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에서 나는 부유한 치과 윤조와의 결혼을 앞두고 두 달만 살 공간을 찾아 살던 동네에서 방을 옮겼는데, 그곳은 서로의 방문을 쉽게 열고 다가가고 음식을 나누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예상치 못한 사건들. 작가는 그게 인생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또는 예상치 못한 사건들을 이렇게 저렇게 받아들이면 또는 거부하면서 사는 것이 인생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여러 사건들이 나타나면서, '나'는 절망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고, 계산적이 되고, 비열해지고, 또는 사건을 삼켜버린다. 

'나'들은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그렇지만 평범은 너무도 어렵다. 혼자 사는 삶이 아니니까. 삶은 관계로 이루어져 있고, '나'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으니까. 그래서 나 혼자 애를 쓴다고 '평범'이라는 행복에 도달할 수는 없다. '착한 아이가 커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이야기는 동화책의 말미일 뿐, 실제의 인생에서는 전혀 다른 삶이 펼쳐진다. 그리고 '나'도 더 이상 착한 아이가 아니다.


  다른 작가의 글에서라면 비극이 모여 있어서 답답하고 마음에 안 든다는 생각을 했을 듯한데, 이 책에서는  '아, 이렇게 받아들였구나.' '이렇게 살아갔구나.' 하는 공감과 이해의 마음이 주로 생겼다. 아마도 작가가 가난하고 하찮아 보이는 그들을 모두 긍정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 마음속에 담겨있는 슬픔, 혼란, 좌절감, 수치심에 대해서 차분하게 공감하는 어조에 내 마음도 같이 공감하게 되었나 보다. 

   산다는 것은 슬픔과 혼란과 수치심을 품고 가는 것이라고 그럼에도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좌절감을 가지고 수치심을 가지고도 살 수 있다고, 그렇게 살아도 된다고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어떤 인물들의 불행과 좌절에는 공감이 안 가는데, 이 작품들의 인물들의 불행에는 서늘한 동조를 하게 된 것이 스스로 놀라웠다. '나라면 다른 선택을 했겠지만, 어쩌면 같은 선택을 했을 수도 있다'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이, '어쩌면'이라는 가정을 하면서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 놀라웠다.


  책을 읽다가 직업병이 도지는 순간이 있었다. 표제작인 <나의 피투성이 연인>에서 나오는 유선에 대해서 많이 답답하고 또 많이 궁금했다. 


  유선은 알 수 없는 가려움증이 생겨서 병원에 갔다. 병원 약을 먹고도 낫지 않아 또 찾아가니 의사가 스트레스가 있느냐고 물었고 유선은 없다고 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최근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거나 한 적이 있습니까? 정신적인 충격이 신체적인 현상으로 나타날 수 있거든요. 그런 경우엔 몸이 약에 반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임상 사례 보고가 있긴 하지요."
  "아니요. 그런 일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유선은 그렇게 잘라 말한다. 지나치게 빨리. 정신과 의사가 물었다 해도 유선은 그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인생은 당신이 공부한 교과서와는 다른 부분이 많아요. 아무리 두껍다 한들 몇 권의 의학서적으로 사람의 몸과 영혼을 전부 읽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말아요.
...
  "사실은 요즘이 알레르기 환자들에겐 가장 괴로운 시기예요. 환절기가 지나면 꿈속에서 그랬던 듯 거짓말처럼 나을 수도 있습니다. "
...
  지난번에도 그는 똑같은 말을 해주었지만 유선은 하나도 신경 써서 지켜보질 못했다. ...
  의사의 말이 아니더라도, 유선은 자신의 감정이 알레르기 상태에 빠져 있음을 알고 있다. 기쁨과 즐거움을 빼 버린, 너그러움과 행복감을 제외한 모든 감성이 유선의 마음속에서 미친 파도가 되어 출렁거린다. 단단하게 비끄러맨 의식의 틈으로 그것들은 어느 순간 해일처럼 터져 나와 유선을 죽도록 외롭게, 죽도록 슬프게, 죽도록 부끄럽게 몰아붙인다.

 

  왜 의사의 말에 사실을 말하지 않을까? 그녀는 낫고 싶지 않은 것일까? 원인과 상관없이 약만 먹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등등을 직접 물어보고 싶었다.


   '몇 권의 의학서적으로 사람의 몸과 영혼을 읽을 수 없다'는 유선의 말을 유선 자신에게 되돌려 주고 싶었다.  의사는 유선의 몸이 언제, 얼마만큼 가려운지 유선이 말해주어야만 유선의 몸에 대해서 겨우 짐작할 수 있다. 유선이 의사에게 자기 몸에 대해서 그리고 요즘에 있었던 큰 사건에 대해서 사실대로 말한다고 해도, 즉 남편의 죽음이라는 사건과 또 그 이후에 알게 된 개인적인 진실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다고 말해도 그 의사는 유선의 마음과 영혼을 읽을 수 없다. 그럼에도 영혼뿐이 아니라 마음도, 몸도 타인에게 읽히고 싶지 않아서 유선은 거짓말을 했다. 내가 병을 만들고 내가 치료를 거부하는 상황. 내 마음이 괴로워서 병이 만들어졌는데 그걸 숨기려고 하다 보니 병을 키우는 상황. 그래서 많이 답답했다.

  

  유선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유선의 몸에 가려움이 나타난 것처럼,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병을 만들고 키운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이 알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모르기도 하지만, 많은 환자를 보다 보면 알게 된다. 그의 병은 그가 만들어 냈다는 것을. 어떤 이는 스스로를 너무 혹사해서 병을 만든다. 어떤 이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병을 만든다. 또 누군가는 자신을 벌하고자 병을 키운다.

  유선의 알레르기 가려움증은 유선의 스트레스가 만든 것이면서 동시에 유선의 마음의 알레르기 상태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인 것처럼, 한 사람의 병은 그를 보여준다. 타인에게 그리고 특히 그 자신에게. 겉으로 드러난 병만 바라보고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는 사람은 병이 잘 낫지 않는다. 치료를 하는 입장에서는 안타깝다. 

  

  병을 무조건 떨쳐 버릴 나쁜 것이라고 생각했던 시기가 있었지만, 이제는 좀 다르게 보고 있다. 어떤 병에는 이유가 있다. 건강을 되찾기 위해 무조건 안 아프기 위한 방법을 찾으면 병의 치료는 한없이 힘들어진다. 어떤 이유 있는 병은 환자가 병의 이유를 찾고 자기 자신을 돌보도록 돕는 것이 더 중요할 때가 있다. 병의 이유란 말이 어색하다면, 병이란 무의식의 '나'가 의식의 '나'에게 보내는 신호라고 생각하면 조금 이해하기가 낫다. 나 자신이 보내는 신호를 이해하는 것에서 진정한 치료가 시작된다고 믿는다. 환자 한 분 한 분이 그 신호를 잘 이해하도록 돕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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