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집 독서후기 02
백수린, 《여름의 빌라》
소설 속에서 만나는 모든 인물을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 중에는 특히나 더 이해하기가 어려운 인물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래오래 생각이 나는 것은 내가 이해하기 못한 그 인물이다.
곰곰 생각해보면, 작가가 등장인물을 마음을 애매하게 드러냈을 때가 어렵다. 아예 온 마음이 드러나는 경우라면 아, 이런 마음이었구나 하고 내가 몰랐던 마음을 알게 된다. 또 아예 말과 행동만으로 짐작하는 경우라면 그때는 또 내 나름으로 인물을 해석한다. 그런데 어떤 사건에 대해서, 나와 다른 마음을 드러낼 때, 그런데 그 마음이 내게는 확실치가 않을 때 그 인물은 참 이해하기 어려운 상대로 남게 된다.
표제작인 <여름의 빌라>에서의 주인공 주아도 내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책을 다 읽고 무언가 석연치가 않았다. 자신의 마음을 풍부하게 표현한 것 같은데, 왜 나는 그녀에게 공감이 안되는 걸까? 분명 열심히, 착하게 사는 것 같은 그녀의 이야기가 내에 변명으로 들리는 건 왜일까?
내가 왜 그녀에게 공감하지 못하는지, 도대체 그녀의 어떤 모습을 내가 꺼려하는 것인지 확인하고 마음에 책을 다시 읽었다. 그리고 3번째 읽고서야 알게 되었다. 그녀는 내가 피하고 싶어하는 자기중심주의자였다.
어쩌면 그녀는 억울할 수 있겠다. 십수년 전에 우연히 만나 인연이 된 ‘당신’에게 이렇게 긴 편지를 써내려간 것은 단지 변명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슬픔을 이겨내고 폭력과 증오 너머의 세상을 믿고자 하는 당신에게, 내가 가진 소중한 기억을 전달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나에게는 주아의 그런 노력까지도 모두 자기중심적인 마음으로 보였다.
주아는 스물 한 살의 배낭여행에서 한 독일인 부부와 만나 사흘간 같이 여행했다. 그리고 몇 년 뒤, 남편의 베를린 유학을 하게 되고 주아가 같이 오면서 그 부부와 5년간의 친밀한 관계를 이어갔다. 주아 부부의 귀국 후 시간강사의 삶에 지쳐서 서울과 베를린의 두 여성의 연락은 점점 연락이 드물어졌다. 그러다가 수년만에 갑작스레 시엡레아프로 초대를 받았다. 그렇게 다시 만난 자리에서 주아와 지호 부부는 베레나와 한스 부부, 그리고 그들의 손녀딸 레오니와 처음에는 즐겁고 반가운 시간을, 그리고 마지막에는 불편한 시간을 보낸 뒤 헤어졌다.
이 긴 시간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전하면서, 놀랍게도 주아는 자신의 감정과 그 당시 자기와 남편의 이야기를 하면서, 단 한 번도 편지의 상대인 베레나에게 ‘고맙다’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것이 내가 주아를 지독한 자기중심자라고 판단한 이유이다. 내가 잘 모르는 당신의 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느꼈고 이런 생각을 했다는 이야기만으로 긴 편지가 씌여져 있었다.
어쩌면 주아는 이 긴 이야기를 통해서 그녀에게 ‘고맙다’와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아마도 현실에서의 주아와 나는 서로 어긋났을 것이다. 나는 고마운 마음은 고맙다는 말로, 미안한 마음은 미안하다는 말로 분명하게 표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고맙다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 대신, 나는 그때 어렸고, 그때 내 마음은 복잡했고, 나는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풀어놓는 모습이 내게는 구구절절 늘어놓는 변명 같이 느껴졌다. 그러다보니 점점더 주아에게 냉정해졌다. 그녀는 ‘마흔이 넘는 나이에 서울에서 수원으로, 충주로 일주일에 몇 번씩 지하철과 기차를 번갈아 타며 다음 학기에 계속할지 안 할지 예측조차 안 되는 몇 시간 짜리 강의를 하러 다니는 삶이 쉽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라고 썼다. 나는 그녀에게 되물었다. 어떤 삶이 쉬울 것 같아? 서울 안에서 일하는 시간강사? 아님 교수?
시간강사의 삶은 당연히 쉽지 않지만, 그들에게 시간강사를 하라고 시킨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그들의 선택이었다. 그들이 교수의 꿈을 놓지 못하는 것이었다. 주아 부부가 시엠레아프에 간 시점은 남편 지호의 박사논문이 막 끝난 상태였다. 그 이야기를 다시 해석하면, 그들이 베를린에서 서울로 돌아온 긴 시간동안 그 남편은 박사학위를 마치지 않은 상태였다. 박사학위가 없는 시간강사 지원자는 너무도 많을 것 같다. 박사학위가 있는 시간강사 지원자도 교수가 되기 힘들 것 같다. 박사학위가 있는 경쟁자에 비해 지호가 강사 자리를 또는 교수자리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였을까? 생계에 지쳐서 연구가 어려웠던 상황이니 논문의 개수도 부족했겠지. 그런 상태에서, 교수임용이 안되는 것을 운이 나빴다고 생각하다니, 도대체 어느 학교, 어느 과목에서 그렇게 쉽게 교수 임용이 될 것이라 기대할 수 있는 것인지 되묻고 싶었다.
수많은 대학 졸업생들에게 교수란 꿈의 직업일 것이다. 교수가 되기 위해서 준비해야 할 것들, 그 사이에 견뎌야 하는 시간들. 많은 사람들은 그 시간을 버텨내지 못할 것을 알기에 시간강사라는 과정에조차 들어가지도 않는다. 그것을 선택하지 않는다고 표현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선택하지 못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들의 삶은 주아와 지호 부부보다 쉬운 선택일까? 다른 길을 선택한 사람들의 삶은 주아와 지호보다 쉬울까?
주아와 지호 부부는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공부와 강의 두 가지를 쫓아가지만 긴 시간 동안 그들도 지쳤다. 그들은 지쳤기에 힘들다고 했다. 그리고 지치고 힘들기에 적어도 눈앞의 독일인 부부보다는 자신들이 더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느꼈다. 한때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도시에서 유럽인 부부와 동아시아 부부, 그리고 현지인의 대비는 더 크게 드러났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유럽인을 비판한 지호나 그런 지호를 말리기는 했지만 그 말싸움이나 그 때의 상황에 대해 사과할 생각은 전혀 없는 주아나 결국은 같은 사람이었다. 자기들의 간절함 또는 바램의 정당성이 존재하는 만큼, 타인 역시 그만의 간절함과 정당함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못보는 사람이었다.
주아에 대해서 한참 비판을 한 후에 나는 왜 주아가 불편한지 다시 생각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주아를 향한 비난은 실은 나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이었다. 내가 주아를 불편해했던 것은 내가 보고 싶지 않은 내 그림자를 보기 때문이다. 주아는 나이다. 나의 간절함만을 보고, 나의 힘듦만을 보는 사람. 내 논리에 맞춰서 이야기하고, 내 마음을 이야기하면서 ‘나’만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 그래서 누군가 내어준 마음과 그의 시간, 노력을 ‘다 줄만하니 주겠지. 그도 좋으니 준 거겠지.’하고 하찮게 여기는 사람. 주아의 말이, 그의 행동이 불편했던 것은 내가 보고 싶지 않은 내 모습을 보아야했기 때문이었다.
현실에서 내가 너를 만났다면 분명 너를 피했을거야. 네가 너만을 소중하게 여기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나를 더 소중하게 여기기를 바래서라는 것을 이제는 알겠어. 나의 마음과 노력에 대해 많이 미안해하고 더 많이 고마워하기를 바랐다는 것을 알았어. 나의 작은 마음에 차지 않는다고 널 자기중심주의자라고 단정지어서 미안해. 나에게 그림자의 모습을 알려주어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