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집 독서후기 03
정보라, 《저주토끼》
저주와 토끼라는 어색한 조합.
저주라는 말에 담긴 어둠과 토끼를 생각할 때 떠올리는 따뜻함과 귀여움은 서로 잘 연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토끼를 이용한 저주라는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나'의 집안은 저주의 물건을 만드는 집안이었다. 대대로 저주에 쓰이는 물건을 만들기에 천민보다 더 기피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저주에 쓰이는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
개인적인 용도로 저주 용품을 만들어서는 안된다. 가업으로 만든 물건을 개인적인 저주에 사용해서도 안된다.
이런 원칙을 가지고 살아왔던 할아버지는 단 한번의 예외로 토끼를 만들었다.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서. 온 동네 사람이 기피하던 자신을 보통 사람으로 대해준 친구네 집을 망하게 한 사장네를 망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할아버지가 만든 토끼전등은 사장을 향해 보내졌지만, 직접적으로 그를 향하지는 못했다. 저주는 그의 회사 장부에, 그리고 그 사장의 집안에서는 손자 아이에게 먼저 내려앉았다.
이 대목에서 나는 마음을 덜컥 내려앉았다. 그리고 이 글을 쓴 작가는 분명 엄마가 되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일거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되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작고 무해한 한 존재가 스러져 가는 것을 냉정하고 담담히그려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여기서 나의 생각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하게 되었다. 엄마가 되면 그런 글을 쓸 수 없을까? 엄마 작가는 아이가 다치거나 죽는 것을 쓸 수 없을까? 이건 나의 착각일 것 같은데?
나는 엄마다. 내 아이 중 하나는 초등학교를 다니고 다른 하나는 아직 초등학교 입학 전이다. 엄마가 된 이후로 나는 다른 아이들의 아픔에 대해 격하게 공감하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냉정하고 담담하게 머리로 이해했다. 지금은 타인의 고통, 특히 어린이가 겪는 고통을 알게 되면 가슴이 눌리는 아픔을 느낀다. 다른 성인이나 사춘기 이후의 청소년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이렇게 가슴이 눌리는 아픔을 느끼지 않는다. 초등학교 이하의 아이들의 고통에 대해서, 아이가 어릴 수록 그 아이의 고통이 나에게는 더 큰 고통과 아픔으로 다가온다. 내 아이가 소중한 마음과 내 아이가 고통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너무도 큰 나머지 다른 아이의 고통에 대해서 과도하게 예민해져 있는 상태라고 스스로 느끼고 있다.
그런데 '과도하게 예민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스스로 질문을 해본다. 누군가의 고통에 '과도하게' 예민하다는 표현이 말이 되나? 고통에 '적절히' 예민해야 한다는 뜻일까? 고통에 대해서 과도하지 않은 '적절한 정도'로 예민하다는 것을 어떤 것을 말하나? 내 아이의 고통에도, 다른 아이의 고통에도 '적절히' 예민해져야 하나? 내 아이의 고통을 마치 나의 고통인 양 예민하게 느끼는 정도의 '적절함'과 다른 아이에 대한 '적절함'은 같은가, 다른가? 내 아이에 대해서는 '무한히 예민해'져도 되고 다른 아이에 고통에는 그보다 덜 느껴야 하나? 아니면, 어떤 고통이든 그것을 느끼는 것은 '적당한' 정도에서 멈춰야 하나?
답을 찾고 싶지만 답이 없는 질문이라는 것을 안다. 나에게 질문하는 것 자체가 의미있는 일이라는 것을 안다. 적당함, 적절함, 과도와 부족이라는 것은 나의 기준과 세상의 기준이 뒤섞인 상태라는 것도 깨닫는다. 세상의 기준, 남들이 가진 기준에서 벗어나 내 마음과 신념으로 나만의 기준을 만드는 과정이라 내 마음이 복잡한 것을 깨닫는다.
내 아이와 다른 아이를 구분지어 반응하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한편으로는 이상하다. 내 아이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내 아이도, 다른 아이도 소중하다는 마음 역시 자연스럽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내 아이가 소중하면 다른 아이도 소중하다. 아이들이 소중하다면 그 아이들과 연결된 어른들, 그 아이들이 자라난 모습들도 소중하다. 이런 연결된 사고 덕분에 생명의 소중함을 예전에 비해 더 절실하게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모든 생명이 소중하다'는 것은 맞지만, 그래도 나는 작은 생명에게 더 가치를 두고 있음을 깨닫는다. 나는 너무도 작은 사람이라 세상의 맞는 말들을 모두 실천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만일 내가 무언가에 대해 노력한다면 내가 더 가치를 두는 작은 생명을 지키는 일에 힘과 시간을 쏟을 것이다.
내 아이의 고통을 아파하는 마음에서 다른 아이의 고통을 아파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감사한 일이다. 나 하나만의 안녕을 생각하면서 살던 나는 엄마가 된 이후에 비로소 진심으로 타인의 안녕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이성적으로 환자의 아픔을 판단했던 나는 엄마가 된 이후에야 마음으로 아픔을 이해하고자 애쓰게 되었다. 나의 작은 아이가 소중하기에, 세상 모든 사람이 누군가의 작은 아이였을 때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눈 앞의 환자에게 연민을 가지게 될 수 있게 되었다.
글을 읽어가면서, 죄지은 자의 손자이기에 저주를 받는 아이를 보면서, 그 아이가 점점 아파가는 것을 보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죄지은 자를 벌하기 위해서 그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 망가진다. 그의 회사, 그의 손자, 그의 아들.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것은, 아이가 자신의 상태를 고통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꿈속에서 아이는 ... 귀여운 토끼와 함께 나무 아래 앉아서 즐겁게 자신의 뇌를 갉아 먹었다. 갉을수록 아이의 세계는 점점 좁아져서 앞으로 영원히 토끼와 함께 앉아 있는 나무 아래를 떠나지 못하게 되었으나 아이는 이미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토끼와 함께 있다는 사실에 즐거워할 뿐이었다.
아이는 즐겁게 토끼와 꿈속에 남았다. 좁아진 세계에 남은 아이의 마음을 즐거움으로 채운 것을 보고 이 작가는 여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남자 작가라면 아이가 즐거운지 아닌지 신경쓰지 않을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은 나의 편견이겠지만.
글 속 '나'의 선조들은 몇대에 걸쳐 저주 용품을 사가는 사람들을 만나왔을 것이다. 그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가문의 선조들은 알았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저주를 보내면 그 저주는 원래의 소망자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말이다. '개인적인 용도로 저주 용품을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너무 우회적인 금지 명령이었다. 선조들은 후손들에게 더 직접적으로 위험을 알려주었어야 했다.
'저주 용품을 팔기는 해도 저주를 해서는 안된다'
'저주는 보낸 자에게로 다시 돌아온다'
누군가를 저주할만큼의 미움은 자기 자신도 파괴한다는 것을 선조들은 후손에게 더 분명하게 알려줬어야 했다. 미움이 너무 커서 저주를 보낸 할아버지에게 내린 저주는 그 본인에게 뿐만이 아니라 '나'에게 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할아버지와 그의 이야기를 듣는 '나'의 모습은 쓸쓸하다. 몇 번인지 알 수 없도록 자신의 저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할아버지와, 셀 수 없이 많이 그 이야기를 듣고 자란 나. 할아버지는 복수의 성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나'의 눈에는 되돌아온 저주를 보고 있었다.
저주의 마음은 복수의 마음이다. 미움이 너무나도 커서 복수하고 싶다, 상대를 망하게 하고 싶다는 마음은 감정적으로 이해가 된다. 하지만 이 미움은 우리가 극복해야하는 마음이라는 이성적 이해도 같이 따른다.
복수하고 싶은 마음은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 저주의 마음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아마도, 어렵지만, 한 작은 아이를 향한 연민에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저 집안의 작은 아이를 보고 내 집안의 작은 아이를 연결짓는 것. 거기서 복수의 마음을 멈출 수 있지 않을까? 죄지은 자를 벌하고 싶지만 그와 연관된 다른 많은 사람들과 그가 사랑하는 작은 아이에게까지 저주가 이를 것을 생각하면서 미움이 커지는 것을 일단 멈출 수 있을까?
어려운 일이다. 미움을 멈추고 용서를 할 수 있는 일은 너무도 어렵다. 그래도 애써봐야겠지. 저주는 되돌아오니까. 나에게만이 아니라 내 작은 아이에게까지 되돌아오니까. 내 마음으로는 내가 망가지더라도 복수를 하고 싶지만, 그 댓가를 내 아이도 치루게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일단 멈춤은 가능하지 않을까?
글 속 '나'는 담담하다. 저주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저주를 되돌려받은 할아버지를 보면서도 담담하다. 내가 그의 이야기를 담담함으로 느끼는 것은 그의 마음에 체념이 들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어조에는 어떤 미움도 담겨있지 않다. '나'는 그가 되돌려 받은 저주를 다시 누군가에게 전달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는 저주를 끝내겠다는 그의 의지는 미움을 끊어냈다. 그의 의지는 그에게, 그리고 나에게 위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