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집 독서후기 04
손원평, 《타인의 집》
소설집 《타인의 집》은 힘들고 지쳐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도움일까, 기회일까. 성공학에서 말하는 자기 변화의 결단일까, 아니면 더 좋은 교육일까?
표제작 <타인의 집>은 쉐어하우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주인공 나, 시연은 '애인과는 파투나고 회사에선 잘리고 살던 집에선 월세 인상에 못 이겨 쫓겨났'을 때, 온라인에서 세입자 구인글을 만나게 된 후 쉐어하우스에 들어오게 되었다. 지금 그녀는 유치원에서 상담교사로 일하며 임용고시 준비를 하는 중이다. 그런 그녀는 자기만의 화장실 딸린 방을 나의 소중한 공간으로 인식하고 이런저런 물건을 채워나간다. 로즈골드색 냉장고, 취미로 모으는 텀블러, 그외 다양한 물건들.
한집에 사는 사람은 총 4명이다. 집의 전세계약자이자 불법 전대로 주인공과 다른 세입자에게 월세를 받는 쾌조씨. 웹툰 작가라는 희진이, 시민단체에서 일한다는 재화언니이다.
나는 글을 읽으면서 내내 어리둥절했다. 방 한칸을 빌려 주고 빌려 쓰는데 이렇게 많은 마음을 풀어놓나? 주인공은 너무나도 감성적이면서 절망에 차 있었고, 다른 두 여성은 다툼이 일어날 정도로 많은 부분이 얽혀 있는데도 각자의 방식을 바꾸지 않았다. 불법전대를 한 쾌조씨는 계산적이면서 양심적이었다. 이게 가능한가?
오래 전 쉐어하우스에 살았었다. 서울에 살던 부모님이 경기도로 이사를 간 뒤 나는 계속 서울에서 지낼 곳을 찾아야 했었다. 내가 가진 예산으로 찾을 수 있는 원룸이 있었겠지만, 서울의 곳곳을 뒤질 수가 없었다. 내가 아는 지역 한 두곳에 나온 집들을 돌아보았고, 그 집들은 내 예산보다 높은 월세를 불렀다. 그런 내게 쉐어하우스에 월세로 산다는 것은 오로지 경제적이라는 이유로 선택한 합리적 결정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출퇴근이 좀 멀더라도 온전한 내 공간을 갖는 것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나는 아니었다. 나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곳에서 이미 알고 있는 출퇴근을 할 수 있는 가장 저렴한 방을 찾았다. 그것이 원룸이건, 하숙이건, 전대이건.
나는 두 곳의 쉐어하우스를 경험했다. 그중 한 곳은 방 4개짜리 아파트였는데, 방 하나는 40년전 식모가 자던 아주 작은 부엌곁방이었다. 집주인이 직접 세입자와 방 하나씩을 각각 계약했다. 나는 부엌방 다음으로 작은 방에서 살았다. 그곳의 거실은 불이 안 켜졌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굳이 거실불을 켤 필요가 없어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다. 늦은 밤 문을 열고 어두컴컴한 거실을 지나 내 방으로 들어가서야 불을 켰다. 늦은 밤 차한잔을 마시려고 부엌에 가서 물을 끓일 때, 그 부엌의 전등은 아주 어두웠다. 그래서인지 집 전체가 어두웠던 느낌만 남아 있다. 그 집에서는 어느 방에서 누가 사는지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은 집에 사는 것이 아니라 방에 살았다. 나에게 그 방은 잠을 자는 곳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땠을까? 그 방에서 음악을 듣고 컴퓨터로 인터넷을 하고 책도 읽었겠지? 자기만의 방에서 자기만의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그 집은 타인과의 접점은 피하는 곳이었다. 화장실에 가려다가도 누군가의 소리가 들리면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다들 바쁘고 힘들었리라. 그러니 누군가와 얼굴을 마주할 기회도 애써 피했던 것이리라.
다른 한 곳은 불법 전대 계약의 아파트였다. 집주인과 월세 계약을 맺은 여성이 다른 여성 2명에게 방 하나씩을 세 놓았다. 방 3개 짜리 아파트에서 나는 제일 작은 방을 썼다. 침대를 놓기도 어려운 작은 방이었다. 그래도 여기서는 간혹 다른 두 명과 얼굴을 보기도 했다.
그 곳에서도 나는 잠만 자면서 살았다. 마음도 담지 않고, 생활도 담지 않았다. 살기 위해 몸 누일 곳이 필요해서 구한 방 하나에서, 딱 그만큼의 시간을 보냈다. 집은 잠을 자는 곳이지, 내 마음을 돌볼 곳이 아니었다. 드물게 밥을 먹기도 했지만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드물게 거실에 나와 있기는 했다. 내가 계약했던 여성이 환한 웃음으로 거실도 편히 쓰라고 말을 했다. 부엌도, 냉장고도 편하게 쓰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녀의 웃음 덕분에 두번째 아파트는 잠만 잤지만 밝고 편안한 공간으로 기억한다.
쉐어하우스에서 사는 동안 나는 고시원이 아니라 '집'에서 산다는 것에 감사했다. 주인공처럼. 벽 하나로 옆의 방과 나누어진 것이 아니어서, 살아가면 나오는 인간의 여러 소리를 조심하지 않아도 되고 또 타인의 소리를 원치 않게 듣지 않아도 되는 그 사실에 감사했다. 하지만 주인공이나 쾌조씨와는 달리 나는 방 한칸을 빌려 쓰는 동안 이런 집은 얼마일까 하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 방에서 나의 취향과 행복을 키우는 것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 방 한칸에서 나는 마음을 닫고 살았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어리둥절했다. 그들이 너무도 쉽게 마음을 열기 때문이다.
글에서 주인공은 화장실까지 붙은 방 하나를 빌려 쓰면서 마치 영원한 내 것이 생긴 양 행복해 했다. 방에다 내 물건을 쌓아둔다고? 원룸하나 빌릴 상황이 아닌데 거기서 내 자취를 남긴다고?
방 3개를 전대하느라 본인은 거실에서 자는 극단적인 짠돌이인 쾌조씨는 월세를 맞추기 위해 계산적으로 불법 전대를 한다. 그런데 주인공에게 빌려준 방의 전 세입자가 자살을 했다는 이유로 방값을 파격적으로 저렴하게 책정한다고? 그게 말이 되어? 전 세입자가 누구인지 말 안하고 방이 크니 돈도 많이 받는게 더 말이 되지 않아?
그들의 감정과 그들의 행복감, 그들의 대화에 담긴 그들의 꿈이 나에게는 어색했다. 내 집이 아닌 집, 전세도 아닌 월세의 집에 살면서 이렇게 '내 것' 이라는 느낌을 가질 수 있을까? 나는 경험한 적이 없었기에, 나는 과거에 내가 살았던 방을 여관방보다 나은 안정감을 주는 정도로만 생각했기에 '내 것'이라는 그들의 느낌에 위화감을 느꼈다. 나는 아주 계산적으로 살았기에 나는 마음을 놓지 못했다. 여관방 보다 조금 나은 정도이지, 절대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그 작은 방의 어둠속에서 몸을 누일 때마다 느끼고 또 느꼈다. 그런데 글의 인물들은 아주 계산적이면서도 마음을 주고 받았다. 비록 호의로 가득차고 행복과 웃음이 담긴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마음을 주고 받았다. 나는 그 상호작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호의가 담기지 않았을지라도 그들의 대화에는 항상 감정이 담겨 있었다. 과거의 나는 그렇지 못했기에, 과거의 나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살았기에 그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더군다나 주인공은 다른 방 사람들이 무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웹툰 작가라는 희진이, 시민단체에서 일한다는 재화언니. 전업투자자인 쾌조씨. 어떻게 이걸 알 수가 있지? 직업을 이야기 한다고? 같은 집에 살지만 그들은 서로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한 집에 산다고 해서 그들의 정체가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한 집에 살게 되었다는 것은 우연한 시기에 우연한 장소에서 만난 것일 뿐이다. 누구인지 모를 낯선 사람에게 내 이름과 나이 이외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내 마음을 그들에게 여는 행위이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과거에 나는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직업을 말하지 않고 내 전공도 말하지 않으면서 살았다. 이름과 나이 이외의 것을 밝히지 않아도 피상적인 인간관계는 만들어졌고 또 피상적으로 짧게 누군가를 만나고 모임을 가질 수 있었다. 한때 나는 두리뭉실하게 설명할 수 있는 직업으로 익명으로 지내기를 희망했고 그래서 누군가 물어보면 연구원이라고만 대답했다. 연구원이라는 대답은 아주 편리했다. 아무도 무얼 연구하는지 묻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감추기는 나를 지키는 방식이었다. 나는 주목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나는나는 평범한 한 사람으로, 지나가는 한 사람 중 하나로 지내는 것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았다. 익명의 삶은 나를 지키는 방식이었다. 나는 마음을 꽁꽁 감추가 살았다. 나를 드러내는 것은 마음을 여는 행위였다. 그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학교의 선후배, 직장의 상사와 동료들 외에는 마음을 열지 못했다. 왜 나는 쉽게 마음을 열지 못했을까? 내가 타인에게서 상처받지 않고자 나를 숨겼다는 것을 이제와서야 깨닫는다. 내 직업이 나의 정체성의 일부라고 생각한 미숙했던 나는 정체성이 공격받을까봐 혹시라도 타인에게서 상처받을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아무에게도 상처주지 않고 또 상처받지 않고자 나는 생존만 했다. 나는 방 한 칸에 최소한의 물건을 놓아두고 겨우겨우 살아갔다. 나의 개성을 드러내는 무언가를 두는 것은 내 마음의 갑옷을 풀어놓는 일이었을 것이다. 주인공이 자신의 마음에 드는 물건으로 방을 채웠을 때 그것은 물건이 아니라 마음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내가 아주 작은 무언가를 둔다는 것은 내 마음을 드러내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제 와서 돌아보니 나는 마음을 한번 드러내면 그 다음은 내가 붙잡을 겨를도 없이 넘쳐 흘러버릴까봐 마음을 꼭 잠그고 살았다.
글을 읽으면서 나를 돌아보았다. 과거의 내 모습. 아주 작은 방 하나에 마음 한 구석도 풀어놓지 못하고 꽁꽁 잠가놓고 살았던 어린 여자. 방 한칸 조차 지키지 못하는 주인공에게도, 그시절의 어린 여자에게도 위로와 위안이 필요하다. 그녀들의 삶에 위로와 위안이 찾아오기를, 이미 찾아왔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