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집 독서후기 05
정용준《선릉 산책》
책 표지를 보면, 두 사람이 푸른 풀밭을 걸어가고 있다. 주변의 인물들도 나름대로 편안해 보인다. 편안하고 위안을 주는 내용일 것이라고 기대했다. 아니었다.
'나'는 우진 형의 부탁으로 내 또래의 '애 돌보기'를 하게 되었다. '내'가 돌보게 된 한두운은 자폐아였다. '나'는 처음에는 한두운에게 낯설어 하고 기계적으로 그를 돌본다. 그리고 아주 조금 그의 행동과 마음을 짐작하게 된다. 처음 만났을 때는 그의 마음이 무엇인지, 내 말이 그에게 닿기는 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아주 조금씩 한두운을 알게 되고 그에 대해 상상하게 된다.
한두운은 어렵다. 자폐라는 단어는 한 사람을 설명하지 못한다. 다만 우리가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드러낼 뿐이다. 그는 어린이의 무구한 표정을 가졌지만 그의 울대뼈는 튀어나와 있었다. 그는 도시의 골목길에서는 밋밋한 표정이다가 선정릉의 녹음을 보고 활기가 생긴다. 순진하게 좋다는 듯 움직이다가 갑자기 퉤퉤 침을 뱉었다. 손으로 돈까스를 통째로 뜯어먹지만 더 없이 깔끔한 펀치를 날리고 나비처럼 부드러운 위빙을 할 줄 알았다.
책 속의 '나'는 오히려 쉽다. 그는 성실하다. 한두운을 돌보는 일이 난감하다. 그래서 더욱 성실하게 그를 대한다. 한두운에 대해 궁금함을 갖고 상상하고 짐작한다. 그에게 한두운은 일거리의 상대, 돈벌이의 도구가 아니라 눈 앞의 한 사람이었다.
성실하지만 요령부족한 한 남자가 또래의 자폐아를 하루 돌보는 이야기. 이 이야기가 왜 이렇게 마음에 남는 지 확인하기 위해 다시 읽었다. 무엇이 이 글에 여운을 만들었나?
주인공이 자신을 묘사하는 부분이 있었다.
유연함과 융통성이 부족한 나는 어떤 일을 해도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사이의 변수를 캐치하지 못했고 설명을 들어도 이해가 안 됐다.
뭘 해도 나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갈등이 있었다. 답답하다. 꽉 막혔다. 이런 말을 늘 들어왔따. 프랑스어를 공부한 사람이 왜 이렇게 유연하지 못하냐는 쓴소리도 많이 들었따. 불어와 유연함의 연관성을 고민하다보면 어느새 일을 그만둔 뒤였다.
나는 그의 노력과 그의 좌절에 마음이 갔던 거였구나. 그의 성실함을 알아주는 이가 오로지 한두운 뿐이라는 것에 안타까웠던 거구나.
그는 눈치도 요령도 없다. 큰 그림을 볼 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일을 잘하려고 애쓴다. 아니, 일을 잘하려는 것이 아니라 한두운을 한 사람으로 이해하고 그와 소통하기 위해 애쓴다. 일을 잘하는 것이란 돈을 주는 사람이 요구하는 바를 잘 이해해서 그것을 이루어 내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고, 자기의 방식으로 눈앞의 사람을 한 사람으로 성실하게 마주하는 것으로 애쓴다. 그의 마음과 노력을 알아주는 이는 돈을 주는 사람도, 그에게 일을 맡긴 사람도 아니라, 그가 마주한 바로 그 사람, 한두운 뿐이었다.
그에게 이 일은 어떤 일인지, 왜 해야 하고 어떤 목적을 가졌는지를 알면 그는 아마도 더 성실하게 잘할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누구도 그에게 '왜'를 설명해 주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마도 '돈이 되니까'가 '왜'의 대답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또는 알아서 눈치껏 일의 목적을 이해했을 것이다.
그에게는 '돈'이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았다. 그는 '왜'에 대해서 수긍해야 했고 '어떻게'에 대해서는 더 구체적인 이해가 필요했다. 요령도 눈치도 없는 그에게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보통사람보다 더 예상하기 어려운 한두운은 너무도 큰 과제였을 것이다.
아마도 보통의 시람들은 그에게 여러가지 조언을 할 것이다. '왜'에 대해서 묻는 그에게, 그런 것은 몰라도 된다던가 또는 겉으로 드러난 이유만을 말했을 것이다. '어떻게'냐고 묻는 그에게 그의 질문에 그가 필요한 대답을 알려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알아서, 눈치껏 잘하기를 바라고 그렇지 못한 그를 비난했을 것이다. 성공학 책에서는 그의 잘못이고 그의 책임이라고 씌여있겠지. 나라면? 나는 그에게 어떤 말을 했을까?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겠지. 그의 질문들을 귀찮게 여기고, 그가 내놓는 결과를 비판했을 것이다. 이것 밖에 못하냐고 말이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세상살이를 잘 하는 사람의 조언과 비난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이해가 필요했다. 그가 낸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이해해 주는 사람, 왜와 어떻게에 대한 그의 질문에 대하여 똑같은 성실함을 가지고 같이 고민해주는 사람, 그의 성향을 단점이 아니라 장점으로 이해해 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나는 그를 이해해 줄 수 있었을까?
한 사람이 떠오른다. 같이 일했던 사람. 그는 나보다 나이가 어렸다.
병원은 묘한 곳이다. 아픈 사람이 병을 치료하러 온다. 다시 말하면 이 곳을 찾아오는 사람은 어딘가 아픈 사람이다. 몸이 아픈 사람도 있고 마음이 아픈 사람도 있다. 보통은 두 가지가 다 아프지만 대부분은 몸의 아픔만 치료하고 돌아간다.
몸이, 때로는 마음도 아픈 사람에게는 치료가 필요하다. 동시에 인간적인 관계도 맺어진다. 그 관계는 겉으로는 인사와 환대로 드러난다. 아픈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환대를 하면서 당신이 소중하고 당신의 몸이 어서 완쾌되기를 기원한다는 뜻을 전하는 것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병원의 주된 기능이기도 하다. 의사도 간호사도 그래서 친절하게 미소를 띄고 환자를 맞이해야 한다. 나는 이런 사실을 이해했기에 밝은 인사를 환자에게 건넬 수 있었지만 모든 사람이 그럴 수는 없었다.
나보다 나이 어린 그는 미소와 친절이 힘든 사람이었다. 미소와 친절을 드러내려면 애써야 했다. 그에게 아픈 사람은 아프다는 사실만으로도 힘들기에 환자는 환대가 필요하고 우리는 그것을 전달해줘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시켰다면 어땠을까? 나는 그런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미소와 친절이 필요하니 갖추라는 이야기만 전했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미소와 친절을 판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미소와 친절을 파는 감정노동까지 해야 하다니. 그에게는 감정노동이 몸의 노동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지금이라면, 그를 이해시킬 수 있을까? 또는 그를 이해할 수 있을까? 미소와 친절을 장착하는 것은 가식이 아니라 환자를 염려하는 나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알려줄 수 있을까? 자칫 친절하지 않은 것은 네 마음이 친절하지 않은 것이라고 그렇게 그의 마음마저 폄하하는 이야기로 흘러갔을까?
그 친구가 자기가 낼 수 있는 정도의 태도를 나타낼 때, 그가 미소도 친절도 드러내기를 어려워 할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의 태도와 행동은 그의 몫이었다. 그래서 나는 '환자는 아픈 사람이니 조금이라도 격려하고 싶어서 나는 이왕이면 웃으려고 해. 너도 그러면 좋겠어.' 같은 그에게는 와닿지 않은 말을 단 한번 한 뒤 더이상 그에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리는 일은 피하자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내 행동이 관계맺기를 두려워한 선긋기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적당한 관계안에서 일이 잘 돌아가기만을 바랐던 나를 반성한다. 일만을 보고 사람을 보지 못했던 나를 반성한다. 일적인 관계는 여기까지라고 선긋고 지내던 나를 반성한다.
지금이라면, 나는 무얼 할 수 있을까. 아마도 먼저 그를 이해하려고 애써야 하지 않았을까? 그가 자신의 방식으로 성실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나는, 먼저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에게 일은 무엇인지, 어떤 일은 편하고 어떤 일은 어려운지, 일을 할 때 그의 마음은 어떤지 이야기를 들어봐야 하지 않았을까?
그때보다는 조금 성장한 나는 그에게 사과하고 싶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말을 나누고 싶다. 그의 장점을 응원하면서 성실한 그의 노력을 알고 있다는 것을 꼭 알려주고 싶다. 내가 필요한 일을 이야기하지 말고 그가 필요한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네게 필요한 게 무엇이니? 내가 도와줄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