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갑자기 인도 법인으로 가게 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이 존슨이었다. '다시 존슨을 채용할 수 있을까? 다시 우리 차 운전을 맡기면 좋겠는데..' 그 생각부터 났었다.
내가 인도 첸나이에서 살았던 11년 중에 7년이나 내 차와 남편 차를 운전했던 기사였다.인도에서 7년 동안 같은 기사를 쓴다는 것은 드문 경우이고, 그만큼 인연이 깊다는 얘기이다.
결혼 전에 우리 집에 왔던 그 아이의 연애, 결혼, 그리고 두 아이의 아빠가 되는 그 모든 시간들을 함께 했었고, 먼시골에 살아서 자주 못 보는 엄마 대신 내가 도시의 엄마 역할을 해주었었다.
남편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존슨에게 연락을 취해봤다. 우리가 다시 돌아오기를 늘 바랐던 존슨이어서 우리의 인도행을 가장 먼저 알려주고 싶었다. 그런데 카톡은 잠겨있었고, 페북 메신저는 읽지 않았다.
첸나이에 들어가면 전화를 해 보기로 하고 더 이상 연락은 하지 않고 있었는데 남편이 존슨의 소식을 전했다.
존슨은 더 이상 운전일은 하지 않는다고 했고, 자전거 가게 사장이 되었고, 차 랜트 일도 같이하고 있다고 했다.
다른 회사 법인장 차를 운전한다는데 어떻게 부르냐며 난색을 하던 남편이었지만 그래도 그 아이가 궁금했는지 행방을 수소문해 본 모양이었다.
"자전거 가게 사장이 되었다고?" 높아진 내 목소리에 내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내가 인도에 돌아가면 우리 집 차를 다시 맡기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는데 아쉽다는 생각 보다 존슨의 성공이 마치 내 자식이 잘 된 것 마냥 너무 기뻤다.
'잘 됐네, 잘했네, 존슨 성공했네!'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분을 오랜만에 느껴봤다.
존슨과 많은 시간을 함께 했던 우리 작은딸도, 인도 여행을 와서 우리 집에서 머물면서 존슨을 알게 되었던 친정 언니도, 존슨을 아는 인도 지인들도 모두 잘되었다며 너무 기뻐해 주었다. 사교적인 성격의 존슨은 내 주변 모든 지인들에게도 호감이었던 아이였다.
인도에서 함께 한 7년 동안의 시간과 귀국 후에도 가족 안부를 전해주고 우리 가족의 안부도 묻던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그 아이가 잘 되기만을 바랐던 나는 가게 장사가 잘 되는지 어떤지도 모르면서 어린 나이에 도시에 돈을 벌러 왔던 그 시골 아이가 어엿한 사장님이 되었다는 사실만기뻤다.
다시 인도에 안 오냐고, 다시 오라고 늘 말하던 존슨에게 기다리는 희망을 버리게 하려고 다시가지는 않는다고 단호하게 대답했던 작년 가을 이후로 더 이상 소식이 없어서내심 좀 서운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사람 일이라는 것이 한 치 앞을 모르는 것이었다.다시 가게 될 일은 결단코 없을 것 같아서단호하게 말한 마담의 목소리에 마스터 가족을 다시 볼 일은 없겠다는 생각을 존슨도 했을 것 같았다.
존슨의 연락은 더 이상 없었지만 1년에 한 번, 크리스마스 때 아이들 선물 정도는 챙기며 살자고 마음먹었던 그 일도 실천 못하고 작년 연말을 보내고 말았다.
먼저 연락할 마음도 없었던 내가 사업을 시작하느라 바빠서 연락을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조차 미안하지만, 그리고 내가 필요해서 처음으로 먼저 연락을 하게 되었지만, 이런저런 서운하고 미안한 마음 그 어떤 것보다 존슨이 자립을 해서 사업을 시작했다는 그 사실만 중요할 뿐이다. 아들 같았던 존슨이 부디 더 잘 되기를 바랄 뿐이다.
인도에 가면 존슨의 자전거 가게부터 찾아가 봐야겠다.
"보스!"라고 불러야 할까?
자전거를 한 대 사야 할까?
덩치 큰 존슨이 자전거 가게에서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마스터! 마담!"을 부르며 반가워할 상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