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도 첸나이라는 도시에서 11년가량을 살았다. 내 나이 마흔셋 되던 해의 5월부터 쉰넷12월까지 그 멀고, 낯설고, 힘든 나라에서 살았다. 두 딸 중고등 시절을 그 나라에서 보냈고, 나의 갱년기도 그 나라에서 맞았다. 남편회사의 주재원으로인도 발령 첫 가족이었던 우리는 맨땅에 헤딩하는 마음으로 남편은 회사를 다녔고, 딸들은 학교를 다녔고, 나는 살림을 했다.
처음 몇 년은 그렇게 살았다. 차츰 익숙해진 인도라는 나라는 불편은 했지만 불안하지는 않았다. 불편함이 오히려지루하지않은 생활을 하게 했다. 낯선 문화, 불편한 환경, 새로운 만남이 재미있고흥미로워졌다. 한국에서보다 오히려 마음도 편했고 주변 환경과 사람들에게서 위로도 받았다.
그렇게 11년이라는 결코 짧지만은 않은 시간을 보냈고,하루하루 인도를 여행하는 기분으로 살았다. 익숙해지려고 하면 또 낯설게 다가온 나라였고, 그래서 무료하지가 않았다. 생활이 여행의 연속이었다.
대학 입학과 함께 두 딸은 인도를 떠났고,이후로도 부부 둘만 남아서 4년을 더 살았다.
2009년 당시 인도에서 꼭 필요했던 물건, 생수와 수동 펌프기
갑작스럽게 남편의 퇴직과 귀국 결정이 났다. 마음의 동요가 컸던 남편과는 달리 담담하고 자연스럽게 나는 귀국 결정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나의 인도 11년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짐 정리도 하면서 사람들과의 이별의 시간을 보냈다.
내 물건들은 데리고 있던 아줌마와 운전기사들에게 나눠 주었고, 중고상에도 팔았다. 그러고도 수도없이많은 물건을 버리면서 11년의 세월 동안 쓸데없는 물건을 너무 많이 껴안고 살았다고 떠나는 그제야 미련하게 알아차렸다.
귀국하는 지인들 송별만 하다가 내가 그 반대의 자리에 드디어 서게 되었고, 고마운 사람들과의 송별이 한 달 내내 이어졌다. 그렇게 물건도 정리하고사람들과도 이별했다.
귀국 이삿짐 싸는 중
인도 비자는 기한이 몇 달 더 남아있었고,남편의 퇴직일은 12월 말이었지만 이미 후임 직원에게 인수인계도 끝난 상태였다. 그래서우리에게 한 달이라는 시간이 생겼다. 남편이 출근을 하지 않고 인도에서 살 수 있는 시간이 생긴 것이다.
인도 남쪽 끝 땅끝마을부터 북쪽 끝 히말라야까지 다녀보자고 남편이 제안했고 나는 찬성했다. 그렇게 퇴직 선물 같았던 우리들의 3주간의 인도배낭여행이 시작되었다.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인도에 살면서 많은 곳을 다녔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북인도는 선뜻 용기가 안 났었다. 언젠간 꼭 다녀오리라 했던 그곳에 인도를 떠나면서 결국 가게 된 것이다.
일출과 일몰을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인도의 땅끝마을 깐얀꾸마리 그리고, 인도 최대 템플의 도시 마두라이
귀국 이삿짐도 싸면서, 거의 매일 송별을 위한 만남도 하면서, 여행 계획도 세웠다.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은 들었지만 그보다 더 큰 기대감으로 루트를 짜고, 비행기 티켓을 알아보고, 호텔 예약을 했다. 3박 4일 남인도, 8박 9일 북인도, 3박 4일 네팔, 2박 3일 스리랑카 여행으로 일정을 잡았다.
땅끝마을은 남편 차를 가지고 기사도 함께 가는 것으로 결정을 했고, 북인도는 숙소와 항공권 예약만 하고 무작정 가 보기로 했다. 안 가본 곳이지만 11년 인도 짬바로 밀어붙여보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 부부의 17박 18일의 인도 배낭여행이 시작되었다. 긴인도 살이 마지막을 인도 여행으로 멋지게종지부를 찍었다.
11년 동안의 인도 생활의 마지막 행적은 여행이었다. 사는 일이 여행이었던 인도 살이었지만, 사는 동안에도 틈만 나면 하던 인도 여행이었지만, 그 마지막 일정이 남편과 둘이서 인도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 돌아본 일이었다.
폰티체리 락비치 그리고, 바라나시 갠지스강
조드푸르의 블루시티에서 만난 사람들
돌이켜보면 참 감사한 시간이었다. 예상 못했던 갑작스러운 남편의 퇴직과 귀국 통보였다. 잠시 혼란했던 우리는 구석구석 인도 땅을 밟으면서 마음이 정리가 되었고, 인생관도 바뀌었다. 결과적으로 감사의 시간이 되었다. 인도는 마지막까지 우리를 위로해 주었다.
낙타 타고 한시간, 라자스탄의 자이살메르 사막에서 사막인들과 저녁 식사 준비
계획 없이 떠난 긴 여행이 육체적으로 힘들고 지칠 법도 했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평생 처음 둘만의 긴 여행이었지만 마음도 잘 맞았다. 내가 루트를 잡았기 때문에 늘 내가 앞장섰고, 남편은 뒤 따랐다.
크고, 넓고, 거대한 나라의 자연과 유적지를 오랜 시간 멈춤 없이 경험하다 보니 나의 존재가 얼마나 미미하며, 인생이 얼마나 짧고 덧없는 것인지 느끼게 되었다.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을 통해서 인생을 배웠고, 경험을 나누었다. 그 모든 시간이 힐링이었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 해도 긴 인생의 단편일 뿐이고, 내일의 내 모습은 누구도 모를 일이라는 깨달음을 얻기에 이르렀다.
주어진 상황에서 최대한 행복하게 살아보자, 우리 인생 후반기는 더욱더 그래 보자, 우리 정도면 충분히 괜찮게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비교하며 사는 일이 얼마나 무가치하고 불행한 삶인지 긴 인도 여행을 통해서 다시 한번 더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의 인도 여행은 값진 경험과 좋은 추억과 인생을 고찰하는 좋은 시간이 되었다.
조드푸르, 메헤랑가르 성
자이푸르의 하와마할 그리고, 자이살메르성
2019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아침에 우리는 두 딸이 기다리는 한국에 돌아왔다.
다음 해 1월에 전 세계에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었다. 인도에서 들려오는 무섭고 두려운 소식들을 접하며 그곳을 미리 떠나 올 수 있어서 다행이었고, 안타까운 그 나라를 위한 기도를 할 수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갑자기 귀국 결정을 한 이들이 알찼던 우리의 인도 정리의 시간과, 긴 배낭여행을 부러워했다. 일순간에 그런 입장이 되었다. 인생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을 또 경험했다.
사는 일이 여행이었던 인도는 내 인생 최고의 여행지였다. 11년 동안 여행을 했고, 마지막 보름여는 찐 여행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참 잘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