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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코끼리 이정아 Jun 16. 2022

인도의 땅 끝 마을 '깐얀꾸마리'

 오전 7시경, 폰티체리를 뒤로하고 차를 달렸다. 인도 남쪽 끝을 향했다. 고속도로에 진입해서는 길이 너무 좋고 차들도 거의 없어서 시속 130킬로까지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인도에서도 그렇게 달리 수 있는 곳이 있었다. 산이라고는 안 보이는 평지를 지겹게 달렸다. 존슨이 '코끼리 바위'라며 가리키는데 큰 바위산이 길게 뻗은 모습이 코끼리를 닮은 듯도 했다.  바위가 끝없는 평지 풍경의 지겨움을 잠시 달래 주었다. 우기 끝자락인 타밀나두주의 남쪽은 흐리다가 해가 났다가 날씨가 변덕을 부렸다. 인도 땅끝 바다에서 일몰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하며 5시간을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렸다. 워낙 넓은 땅 인도, 대여섯 시간은 쉬지 않고 운전하는 인도인 기사이다.


 

 배도 고팠고, 화장실도 가야겠다고 생각할 즈음에 마침 휴게실 겸 식당이 보였다. 12시쯤이었다. 우연히 들어 간 그곳이 맛집이었다. 인도가 맞나 싶을 정도로 화장실도 깨끗했고, 식당도 그랬다. 친절했고, 싸고 맛있었다. 존슨도 같은 말을 했다. 치킨 65(65년도에 나온 메뉴여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난과 소스, 볶음밥, 생과일주스를 주문했다. 남편은 한국의 딸들에게, 존슨은 첸나이의 딸에게 여행 상황도 알리고 밥 사진도 공유했다. 맛있는 음식, 좋은 풍경을 딸들과 공유하고 싶은 한국 아빠와 인도 아빠였다.


 

 로컬 식당에서의 흡족한 식사는 여행의 만족도를 한껏 높여주었다. 기분 좋게 남쪽으로 다시 달렸다. 풍력발전기가 하얀 바람개비처럼 가득한 예쁜 차창 밖의 풍경을 넋을 놓고 감상하면서 달렸다.


 

 폰티체리 호텔을 출발 한 지 8시간 만에 우리는 인도의 최남단, 깐얀꾸마리(kanyakumari) 바닷가에 도착을 했다. 예약해둔 호텔에 짐을 풀었다. 인도를 떠나기 전 마지막 여행 계획을 세우면서 총 8개 도시에 호텔 예약을 했었다. 주요 도시 두 곳은 좋은 호텔을 예약했는데 그중의 한 곳이 '깐얀꾸마리'였다.  끝 '깐얀꾸마리'와 북쪽 끝 '히말라야'는 좋은 호텔에서 자기로 계획을 세웠었다. 호텔 로비는 소박해 보였지만 뒤쪽 가든과 풀장, 룸 컨디션은 그곳이 시골이라는 생각을 잊게 했다. 호텔 안과 밖은 완전 다른 세상이었다.



 호텔에서 1시간 정도 쉬다가 근처의 성당 구경을 하려고 나섰다. 12월 초, 크리스마스가 가까운 날이었다.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느라 분주한 사람들과 조용히 무릎 꿇고 기도 하는 사람들과 우리처럼 구경하는 사람들이 함께 하는 예쁜 성당이었다. 존슨이 느닷없이 "여기 데리고 와줘서 고맙다"라고 말했다. 크리스천인 존슨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힌두교 성지로 알려진 도시이지만 인도 최남단에 세워진 성당은 크리스천에게도 의미 있는 장소였다. 첸나이에서 너무 먼 그곳에는 쉽게 가게는 안 되는 곳이었다. 그 말을 들으니까 왠지 뭉클한 감정이 올라왔다. "내가 더 고마워. 이 먼 곳까지 운전을 해줘서."라고 대답을 했다. 기사와 같은 종교인 이유가 같은 장소에서 같은 감정을 나눌 수 있어서 여행 동반자로 너무나 다행이었다.



 날씨가 계속 흐렸다. 쉬엄쉬엄 걸으며 바닷가 시장 구경을 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첸나이에서도 안 먹던 노점 사탕수수 주스를 마셨다. 시원하고 달콤하고 맛있었다. 그런데 그 광경을 보지 말았어야 했다. 까맣게 때가 낀 물통의 뿌연 물에 우리가 마신 유리컵을 한번 휘리릭 헹구고 다시 소쿠리에 엎는 모습을 봐 버렸다. 갑자기 속이 안 좋다고 느껴졌다. 그런데 인도 생활 십여 년, 우리는 체질도 이미 인도화가 되어 있었다. 이후로 우리의 장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바닷가 시장은 사람들로 붐볐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외국인은 우리가 유일했다. 여자도 거의 안보였다. 사람들에 치이며 시장통을 빠져나왔다. 노점 구경이 오히려 더 재미있었다. 반짝이는 스테인리스 식기들과 랑골리 찍어내는 틀과 조개 장식품들과 간식거리 까지, 없는 게 없는 노점들은 물건도 예쁘게 진열을 해 놓았다.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바다 위에 바다색 페인트칠이 된 건물이 눈에 띄었다. 덕지덕지 칠이 벗겨진 허름한 전망대였다. 나는 별 생각이 없었지만 남편이 올라 가보고 싶어 했다. 그 허름한 건물에 입장료도 있었다. 막상 올라가 보니까 바람도 시원하고, 바다 풍경도 좋았다.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이서 바다 구경도 하고 사진도 찍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한국분이세요?" 너무 깜짝 놀랐다. 배낭여행 중인 한국 청년이었다. 외국인이라고는 단 한 명도 없는 곳에서 한국말을 하는 한국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반갑다며 인사를 나누고 좋은 여행 라며 서로 덕담을 나누고 헤어졌다.



 호텔 직원이 추천해 준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많은 힌두교인이 방문하는 도시이지만 대도시 첸나이에 비해서 음식값이 아주 쌌다. 음식을 너무 많이 주문해버렸고, 많이 남겨버렸다.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럴 때는 늘 주부 마인드가 된다.



 호텔로 돌아왔다. 날씨는 여전히 흐렸고, 왼쪽으로일출, 오른쪽으로 일몰 볼 수 있다는 호텔 (bar) 먹구름 가득한 하늘만 보일 뿐이었다. 일몰을  본다는 아쉬움은 사실 크게 없었다. 인도의 최남단에 우리가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차를 오래 타서 피곤했던 나는 일찍 잠이 들었고, 남편 혼자서 빗소리 들으며 바에서 인도 맥주 킹피셔를  마셨다고 했다. '빗소리'라는 기에 그 자리에 함께 하지 못한 게 아쉬웠다.




 



 깐얀꾸마리에서의 둘째 날을 맞았다. 구름이 걷힐 듯했지만 아쉽게 일출도 보지는 못했다. 우기의 여행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어서 쉽게 마음은 접었고, 배가 뜨는 지만 궁금했다. 이 멀리까지 와서 일몰, 일출도 못 보고 주요 관광지인 섬에도 못 들어가면 많이 아쉬울 것만 같았다.

호텔 밖으로 내려와 봤다. 전날 저녁에는 안 보이던 대형 버스들이 도롯가에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많이 주차되어 있었다. 단체 관광객들이었다. 배가 뜬다 해도 우리가 탈 자리가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아침 식사시간이 늦은 인도인들이다. 그래서 다소 이른 그 시각에 호텔 뷔페식당엔 우리 둘 뿐이었다. 조용한 식사 시간이 무척 좋았다. 식사를 마치고 호텔 버기를 불러서 정원 한 바퀴를 도는 것으로 아침 산책을 대신했다. 바람이 좀 잦아드는 것 같았다.


 배가 뜨는지 선착장으로 나가봤다. 타밀나두주 최대 명절인 퐁갈(pongal : 인도 타밀나두주의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큰 시장이 열렸다. 수많은 가게들과 상인들과 관광객들로 아침부터 시장 골목은 인산인해였다. 사람들 사이를 같이 걸으며, 시장  구경도 하며 바닷가로 나왔다.


 

 존슨이 앞장서서 착장에 가보더니 파도가 높아서 배가 못 뜬다고 했단다. 하는 수 없었다. 시장 구경이나 하고, 호텔에서 수영이나 하며 보내기로 했다. 우리가 인도 생활을 정리하는 시점에 인도의 남쪽 땅끝을 밟았다는 데에 의미를 두기로 했다.

섬은 그 안의 템플이며, 바다 위의 큰 신상이며, 육지에서도 눈으로 보이는 손이 닿을 듯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그래서 더 아쉬웠다. 멀리서 바라만 보다가 다시 시장 골목을 빠져나왔다. 여전히 사람들이 많았다. 모두 섬에 못 가서 아쉬운 사람들일 것 같았다.



 관광버스가 줄지어 서있는 호텔 근처 바닷가는 또 다른 진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남자들이 대부분인 그곳에는 아침밥을 직접 만들어서 먹는 모습들이 많이 보였다. 밥 이래 봤자 채소 썰어 넣고 맛살라 가루 섞어서 끓인 멀건 커리가 다이겠지만 남자들은 불을 피우고, 채소를 썰고 분주해 보였다. 눈이 마주치면 함박웃음을 짓고 인사를 하고, 사진 찍어도 되냐고 물으면 포즈도 취해주었다. 앞만 보며 걷던 남편이 내 모습이 웃긴 모양이었다. 남자들만 실 대는 그곳에 여자 혼자서, 그것도 외국인이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대화하는 모습이 신기하다고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인도에 오래 살았나 보다 생각했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들이 아무렇지가 않았고, 말 걸고 사진 찍어달라는 그들이 싫지가 않았다. 수백수천 명의 인도 남자들 사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잘 헤집고 다니며 사진도 찍었다. 그들의 눈에 나는 '외국인'이었지만 내 눈에 그들은 그냥 '사람들'이었다. 나도 마치 그들처럼 생겼을 것으로 착각을 하며 길을 걷고 있었다. 인도에 사는 동안에 늘 그런 생각을 하며 살았었다.



 좀 전의 세상과는 완전 다른 세상으로 들어왔다. 아무도 없는 호텔 야외 수영장에서 둘이서 물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바다가 바로 내려다 보이는 멋진 수영장을 우리만 즐기고 있었다.

수영을 끝내고 룸에 막 들어오니까 전화가 울렸다. 배가 뜬다고 했다며 존슨이 빨리 내려오라고 했다. 서둘러서 체크아웃을 했다. 너무 다행이었다.



 선착장에는 배가 뜨기만을 기다렸던 사람들로 이미 가득했다. 50루피 승선비 티켓우리도 긴 줄을 섰다. 섬이 가까워서 배가 자주 오가는지 긴 줄은 금세 줄어들었고 우리도 드디어 배에 올라탔다.



 너무 낡아 보이는 배와 낡은 구명조끼, 인도가 처음이었으면 그 배를 타기가 두려웠겠지만 우리에겐 너무 익숙한 모습이어서 아무렇지 않게 수많은 인도인들 틈에 끼어 앉았다. 지저분한 구명조끼는 그마저도 우리만 입고 있었다. 그래도 배 타는 일은 신나는 일이었다. 많은 인도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과 함께 섬에 도착했다.





신발은 벗어서 맡겨야 . 땡볕에 돌섬을 걷다가는 발바닥에 화상을 입지 않을까 싶은 남인도의 태양인데 흐린 날씨가 오히려 고마웠다. 날씨 때문에 일몰도 일출도 못 봤지만, 바람이 세서 배가 못 뜰까 걱정이었지만 그 날씨 덕분에 맨발로 땀 한 방울 안 흘리고 돌섬을 구경할 수 있었다.

돌섬 위의 큰 바위를 깎아서 만든 석조 건축물은 이미 다른 곳에서도 많이 봤었지만 볼 때마다 신기하고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조각의 세함과 아름다움은 봐도 봐도 감탄을 하게 만들었다.



 종교가 다른 외국인인 우리 눈에는 인도의 최남단의 섬에 있는 단지 정교하고 아름다운 건축물, 큰 석조상이었지만 힌두교도 인도인들은 그들의 성지인 그곳을 다른 눈으로 봤을 것이다. 버스를 타고 며칠씩 노숙을 하며 이 먼 곳까지 왔을 그들은 오로지 신앙심 하나로 불편하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시장 골목의 족히 수천 명은 될 것 같던 그들 모두가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이틀째가 되니까 그들에게서 지독한 신앙심을 보게 되었다. 종교의 힘으로 살아가는 그들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인도의 남쪽 가장 끝에 세워진 신상과 템플과 메모리얼이 그들에겐 어떤 의미일지가 읽혔다. 단순한 관광이 목적인 우리와는 분명히 달랐다. 배 안에서의 기대에 찬 그들의 눈빛을 나는 봤었다.



 뭍으로 돌아가는 배에 올랐다. 출발하자마자 배 안이 소란스러웠다. 술에 취한 남자와 승무원 사이에 실랑이가 있었다. 위험하니 난간에 기대지 말라는 승무원과 술이 취해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남자가 곧 큰 싸움이 날것처럼 배 안은 어수선했다.

맨 앞자리에 앉아있던 나는 바로 코 앞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또 한 번 느꼈다. '우리 참 인도에 오래 살고 있구나'라고. 그 자리를 피하기는커녕 되려 그들을 말리고 있었다. 외국인 여자가 나서니까 좀 누그러지는 듯이 보였다. 큰 싸움이 날 것 같았던 그들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행하게도.



 뭍에 도착했다. 선착장에서 걸어 나오면서 보이는 어촌마을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다. 화려한색이 칠해진 고깃배들이 그 풍경에 한몫을 하고 있었다. 이제 다시는 못 올 것 같은 그곳, 기념사진도 여러 장 남겼다. 바위섬을 제법 오래 걸어 다녀서 갈증이 났다. 마침 코코넛 상인이 보였다. 역시 갈증에는 코코넛 주스만 한 게 없었다.



 해변가를 따라서 쭉 걷다 보니까 작고 예쁜 성당이 보였다. 나는 성당 구경을 하고 있었고, 남편은 그 사이에 멀리 방파제 위를 걷고 있었다. 나도 방파제에 가보려고 나섰다. 어촌의 풍경이 너무 예뻤다. 모레도 너무 부드럽고 고왔다. 구경하며 슬슬 걷고 있는데 갑자기 굵은 빗방울이 두두둑 쏟아져 내렸다. 아열대 지방 특유의 예고 없이 갑자기 내리는 폭우였다.




 마침 마을 어부들이 쉬는 공간이 보여서 다행히 나는 비를 피할 수 있었다. 남편은 비 피하기를 포기했는지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설레설레 방파제를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정신을 차리고 내가 있는 공간을 둘러보았다. 날씨 때문에 고기잡이를 포기한 어부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서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 많은 인도 사람들, 인도 남자들 사이에 여자는 나 혼자였다. 카드놀이에 심취해 있어서 낯선 외국 여자가 그곳에 와있는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러다가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인도 남자들만 가득한 그 공간이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움찔 장을 하게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시장 골목과는 다른 공기로 다가왔다. 그런데 그 남자, " 비가 많이 오죠? 비 피해서 잘 들어왔어요" 라며 유독 하얀 치아를 한껏 드러내며 말을 건넸다. 순간 경계심풀렸다. 나도 웃으며 "땡큐!"라고 대답했다. 괜히 긴장했던 내가 미안했다.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보니까 그 남자가 한 말은 영어가 아니었다. 타밀어였다. 그런데 나는 그 말을 다 알아 들었다. 말을 알아들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그 마음을 읽었다. 친절하고 순박한 아저씨들이었다.


 카드놀이하는 어부 아저씨들의 소란한 목소리와 굵은 빗방울이 내는 우렁찬 빗소리와 비 내리는 어촌마을의 아름다운 바다 풍경, 더없이 좋았던 시간이었다. 지금도 깐얀꾸마리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다. 영화 속에 내가 들어가 있는 듯이 그 풍경이 보이고 그 소리가 들린다. 잊지 못할 순간이 되었다.

인도의 땅끝 어느 어촌 마을의 어느 곳에서 나는 그렇게 혼자서 감상에 젖어 있었다. 11년의 인도 생활이 영화 필름처럼 지나갔다. 길었지만 짧았던 11년이었다.

그러고 있다 보니까 인도인 가족도 비를 피해서 들어왔고, 남편이 왔고, 전화로 어부 아저씨의 위치 설명을 들은 존슨이 차를 끌고 왔다.



 딱 맞게 픽업을 와 준 존슨이 너무 반갑고 고마웠다. 차창 밖의 비 내리는 깐얀꾸마리 마을은 너무나 예뻤다. 촌스럽다고 생각했던 알록달록 인도 집들은 어느 순간부터 내 눈에도 예쁘게 보이기 시작했었다. 노란색 집도, 보라색 집도 더 이상 이상하게 안 보이는 때가 있었다. 특히, 그날의 창밖 풍경은 예쁘다고 노래를 불렀었다.


 전날 바닷가 전망대에서 만났던 한국 청년을 다음날 아침에 배가 뜨는지 보러 갔다가 또 만났었다. 존슨과는 이후로도 몇 번 봐서 서로 전화번호도 교환했다고 했다.


 귀국 이삿짐 정리를 하면서 거의 매일 송별회도 하면서 정신없이 호텔 예약도 해야 했었다. 모두 15박의 호텔 예약이었다. 인터넷이 말도 못 하게 느린 인도에서 그 일도 꽤나 힘든 일이었다. 예약이 안 된 줄 알고 한번 더 예약된 호텔이 있었다. 깐얀꾸마리에서 첸나이로 올라가면서 1박을 하기로 한 마두라이의 어느 호텔이었다. 하루 전에 그 사실을 알게 되어서 취소도 안되었다. 마침, 그 청년의 다음 여행지도 '마두라이'라고 했다.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존슨과 그 호텔에서 같이 지내는 걸로 얘기가 됐었다. 아까운 호텔이었는데 다행이었다. 배낭여행객 그 청년에게도, 존슨에게도 그 호텔은 좋은 잠자리가 되어 주었다.

그래서 우리 차로 같이 마두라이로 이동하기로 했고, 점심을 같이 먹고 출발하기로 했다. 깐얀꾸마리에서의 마지막 식사는 로컬 식당에서의 볶음밥과 맛살라 치킨이었다.



 하얀 종이 바람개비 같았던 많은 풍력 발전기가 들판에 끝도 없이 펼쳐져있었다. 멋진 풍경을 보면서 셋이었던 우리가 넷이 되어서 템플의 도시 '마두라이'로 향했다.

깐얀꾸마리는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우리의 또 하나의 추억의 도시가 되었다. 또 하나의 인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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