첸나이에서 폰티체리, 그리고 깐얀꾸마리까지,남쪽으로 남쪽으로 향했던 우리는 인도의 남쪽 끝을 찍고 다시 첸나이의 우리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귀임 전에 첸나이에서 마지막 정리를 해야 할 일이 있어서 3일 동안 우리 집에 머물다가 북인도 여행을 시작하려고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깐얀꾸마리에서 첸나이까지 10시간 이상 차를 타야 해서 올라가는 길에마두라이(madurai)에서 1박을 하기로 하고,반나절 여행을 계획했었다.
깐얀꾸마리 바다 전망대에서 우연히 만난 배낭여행 중이던 한국 청년과 함께 마두라이로 향했다.마두라이까지는 3시간 거리였다. 3 모작을 하는 남인도의 논에는 12월에도 모내기가한창이었다.우리나라 예전 방식의 손으로 하는 모내기 모습이었다.땡볕에 그녀들은 덥고 힘들었겠지만 정겨운풍경이었다.파릇파릇모내기를 막 끝낸 논들은차창 밖에 끝없이 물결치고 있었다. 마음도 포근했고, 눈도 시원했다.
존슨이 예고도 하지 않고 차를 세웠다. 생강, 설탕, 후추를 뭉쳐서 만든 수제 건강차를 파는 고속도로 변의 노점 앞이었다. 뜨거운 물에 타서 먹으면 감기에 좋다는 설명을 듣고 나니까 호흡기 알레르기가 있던 내 귀가 쫑긋했다. 관심이 가서 살펴보려는데 차 덩어리보다 그 위에 붙은 파리가 더 많았다. 호흡기에 좋을지는 몰라도 위장에는 안 좋겠다 싶었다. 인도 사람 존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칭 저울에 달아서 파는 그 차를 샀다. 그 파리떼를 보고도 그걸 사는 그가 놀라울 뿐이었다.
사진 순서대로 건강차, 설탕 덩어리, 사탕수수 덩어리
다시 차를 달렸다. 마두라이가케랄라와스리랑카를 잇는 철도의거점지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고속도로 옆으로 철길이 나란히 뻗어 있었다. 달리는 기차 안의 사람들도 왠지 우리와 목적지가 같을 것이라는 착각을 하게 했다. 우리가 11년 동안 살았던 첸나이(구, 마드라스) 다음으로 큰 타밀나두주 제2의 도시인 마두라이이다. 대도시답게 퇴근길 교통 체증이 말도 못 하게 심각했다.깐얀꾸마리에서 점심을 먹고 출발했는데 어느새 저녁때가 되어있었다.
동행한 한국 청년과 존슨에게 호텔 체크인을 해주고 우리도 근처의 우리 숙소에 짐을 풀었다. 템플의 도시답게 룸에도 온통 힌두교와 관련된 소품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신상이 호텔 구석구석 놓여 있었다.이 도시에 머무는 동안에는 첸나이에서 보다 더 많이 힌두교에 노출이 되겠구나 예상이 되었다.
야간 템플 구경을 할까 하다가 저녁을먹고 그날 밤은 좀 쉬기로 했다. 엄청 넓다는 템플 구경을 제대로 하려면 체력 비축도 필요했다. 그래서 밖에 나가지 않고 저녁도 호텔에서 먹었다. 음식값이 싸서 '맛살라 도사'와 함께 이것저것 맛을 봤다. 배불리 먹고 그날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인도 최대 힌두 템플 구경을 기대하면서.
다음날이 되었다. 푹 잘 자고 일어난 마두라이에서의 아침은 여행지에서의 아침이 아닌 듯이 개운했다. 호텔 조식을 먹고, 체크 아웃을 하고 15세기에 세워진후기 드라비다 양식의전형이라고 알려진 인도 최대 템플 구경에 나섰다.
우리는 여행객이었지만그 도시의 사람들은 일터로, 학교로 향하는 일상을 살고 있었다. 오토바이, 오토릭샤, 자전거 릭샤, 자동차, 온갖 탈 것들로 출근 시간의 도로는 주차장을 방불케 했다.거리 풍경은 첸나이의 구 도심과 흡사했다. 오토바이에 네댓 명이 타는 건 너무 익숙한 모습이어서 더 이상 놀랍지도 않았다.
인도에서 산 세월만큼 인도는 나에게 너무 익숙한 나라가 되어있었다. 타밀나두주의 도시들은 어디라도 그 풍경이 친근했다. 종족도, 문화도, 종교도 비슷한 때문이었다. 마두라이도 마찬가지였다.먼지 날리는 혼잡하고 시끄러운 도로와 도로변의 낡고 복잡한 상가 풍경이 너무나 익숙했다. 유독 검은 피부의 드라비다족 인도 여자들 대부분은 전통복장인 '사리'를 입었고, 남자들 중에도 긴 천을 반으로 접어 올려서 치마처럼 허리에 두른 '룽기'를 입은 모습이 많이 보였다.그들의이마에는 아침 제사를 드린 흔적인하얀색 줄무늬나 빨간 점, 주황점 등이 그려져 있었다.
첸나이에서도 늘 보는 모습이었지만 마두라이에서는 왠지 그들의 신앙심이 더 커 보였다. 내가 일상을 사는 도시와 여행지 도시의 차이인 것 같았다.구경을 온 도시에서는 그런 것들이 더 부각되어 보였다.
교통 체증을 뚫고 그리멀지 않은 '미낙쉬 암만 템플'의 동문 쪽 어딘가에 주차를 했다. 아주 낡은 어느 템플 앞이었다. 눈에 익은힌두 신상 앞에는 출근길의 여자들이 기도 중이었다. 그 신상 앞 낡은 템플 안으로 통과하면 '미낙쉬 암만 템플'의 '동문'이 나온다고 존슨이 설명했다. 호텔 직원에게 주차할 장소와 우리가 갈 템플에 대해서 미리 정보를 얻어 온 존슨이었다. 덕분에 헤매지 않을 수 있었다.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오래되어 보이는 템플 입구로 들어섰다.외관은 분명히템플이었는데 그 안은 상가였다. 낡은 템플 안은 작은 가게들로 빼곡했다. 두 개의 복도가 있었는데 왼쪽은 옷수선집, 오른쪽은 제사에 필요한 물품이나 액세서리를 주로 취급하는 가게들이었다. 이른 아침이어서 아직 문을 연 가게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8시 30분경이었다.
으스스하다 못해 신비롭기까지 한 상가 복도를 통과해서 나왔다. 어두운 복도를 지나서 나온 바깥세상에는 거대한고푸람(gopuram : 사원 입구의 높은 문)이 시선을 압도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오로지 높고 크고 알록달록 수많은 힌두신들이 조각되어 있는 고푸람만이 내 시야에 가득 담겼다. 인도 최대 힌두 템플의 동문이었다.
매표소가 있는 쪽으로 걸었다. 템플 안의 신에게 바칠 꽃 노점상들이 많았고, 전통 복장 '룽기'만 입은 노인들이 많이 보였다. 인도에 오래 살았어도 웃통을 벗고 룽기만 입은 브라만 남자들의 전통 복장은 여전히 나에겐 불편한 모습이었다.그곳이 힌두 템플 앞이었지만 그랬다.
템플로 오는 도로에서 신혼여행 차량을 몇 대 봤었는데 템플 앞에도 꽃 장식을 한 웨딩카가 세워져 있었다. 신혼여행을 거기로 오나 싶었는데 템플 안에 들어가 보고 나서 그것이 아님을 알았다. 상상 이상으로 넓은 템플 안에는 결혼식장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곳에서 결혼식을 하고 나오는 신랑 신부가 탈 웨딩카였다.
매표소 앞에는 벌써 입장 줄이 길었다.입장료는 없지만 카메라와 신발을 맡기는데 5루피만 내면 되었다. 우리 돈 100원도 안 되는 금액이었다.소지품 검사를 철저하게 하고있었다. 인도 관광지 어디를 가도 그 정도로 꼼꼼하게 소지품 검사를 하는 곳은 처음이었다. 위험한 물건이나 쓰레기가 나올만한 물건은 모두 버려야 했다. 우리 앞의 인도인 가족은 사리천 여러 장을 쇼핑한 모양이었다. 포장 비닐을 하나씩 모두 벗겨서 버리느라 꽤 시간이 걸렸다. 느긋한 인도인들은 아무렇지도 않았겠지만 한국 사람인 우리만 기다리는 일이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줄이 그렇게 길었지만 꼼꼼히 소지품 검사를 하고 있었다. 마두라이 시민들이 그 템플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실내 사진 촬영 금지라는 규정만으로도 부족한 지 카메라와 휴대폰을 입구에 맡기라고 할 때부터 알아차렸었다. 대단한 보안과 대단한 관리에 놀라며 안으로 입장을 했다.
말로만 듣던 '마두라이'의 '미낙쉬 암만 템플'은 상상했던 그 이상이었다. 큰 규모에 일단 놀랐고, 그 화려함에 한 번 더 놀랐고, 인도 같지 않은 관리 상태에 또 한 번 더 놀랐다. 왜 '마두라이 템플, 마두라이 템플'이라고 하는지 두 눈으로 확인을 했다. 첸나이에도 수많은 템플이 있고, 첸나이 근교의 칸치푸람(kanchipuram)에도 크고 화려한 다양한 템플들이 많이 있어서 인도에 사는 동안에 많이 봤던 터라 힌두 템플 구경하러 이 멀리까지 오는 이유를 몰랐었다. 독일의 '쾰른 대성당'이나 경주의 '불국사'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았다. 성당 구경하러, 절 구경하러 멀리 가는 이유와 같다고 보면 될 것 같았다.
200년 동안 지었다는, 보지 않고는 설명이 안 되는마두라이 '미낙쉬 암만 템플'은 그 규모와 화려함이 가히 힌두 템플계의 최고라고 말할 수 있었다.얼마나 넓은지 결혼식장이 템플 구석의 아주 작은 공간만 차지할 정도였다. 인도 전통 결혼식 구경도 잠깐 했다. 결혼식인지 종교행위인지 구별이 안 되는 광경이었다. 명성 있는 템플에서의 결혼식이 특별해 보였다.
실내 사진 촬영 금지여서 구글에서찾은 몇 장의 사진을이곳에 옮겨 놓았다.
템플 내의 박물관 구경을 끝으로 한 시간 동안의 템플 구경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려는데,존슨이 흥분해서 말을 했다. "마담!럭키!"라고.
서문 근처에는 힌두인들이 신으로 섬기는 소를 키우는 장소가 따로있었는데 바깥의 일반 소와 구분되는 순수혈통을 지켜야 해서 그 안에서 따로 키운다고 했다. 하루에 한 번 그 소가 사람들을 만나러 나온다고 하는데 마침 그 소 님(?)이 행차하는 그 장소, 그 시간에 우리가 그곳에 있었던 것이었다.
화려하게 치장을한 하얀 소와 아기 코끼리가 박물관 앞의 마당으로 나왔다. 더 화려한 치장을 한 수레 위에는 힌두 대표 신의 신상 세 개를 태우고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템플 곳곳을 누비다가 다시 돌아간다고 했다. 존슨 말대로 럭키였다. 흥미로운 구경거리였다. 관광객의 시선에는 신이 아니라 서커스단의 동물과 재미있는 인형 같아 보였지만 그들에게는 분명히 신이었다.
템플 전체를 둘러보려면 2시간이 걸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것은 힌두교인들 얘기였다. 안에서 따로 입장권을 끊고 그들만 입장할 수 있는 공간이 따로 있었다. 더 화려하고 멋진건축물이라고 했다. 관광객이 갈 수 있는 공간도 족히 한 시간은 걸어 다녀야 할 정도로 넓고 다양한 공간들이 많았다. 천장까지 빼곡한 화려한 벽화와 돌기둥의 조각들을 세세히 보려면 그 정도로도 부족한 시간이었다.박물관으로 사용하는 건물은 기둥만 천 개라고 했다.그 정도의 규모이다.
힌두교인들만 입장이 허락되는 공간의 일부 (구글 발췌)
1시간이 짧다고 느낄 정도로 종교가 다른 우리는 대단한 건축 예술품 하나를 구경했다. 화려하고 웅장하고 멋졌다.
밖으로 나왔다. 들어갈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매표소앞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주차된 곳으로 가려면 현재는 상가건물이 된 낡은 템플 안을 다시 통과해야했다. 문닫힌 아침에는 으스스했던 그곳이 장사가 시작되니까 활기가 넘쳤다. 완전 다른 분위기가 되어 있었다. 조명이 켜졌고, 재봉틀 돌리는 소리와 상점의 흥정 소리는좀 전에 지나왔던 그곳이 아닌 것만 같았다. 템플을 가게로 세를 놓았기 때문에 그 가겟세로 '미낙쉬 암만 템플' 관리 비용으로 사용한다고 했다. '굿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크리스천인 나는 '깐얀꾸마리'부터'마두라이'까지 3일 동안 너무 많은 힌두신을 봐서인지 좀 혼란스러웠다. 신상이 아니라 예술품으로 본 것이었지만 너무 쉬지 않고 힌두교 안에서만 지낸 탓인지 템플 구경이 끝났다고 생각하니까 머리를 좀 식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색을 해보니까 근처에 예쁜 성당이 보였다. 그곳에잠시 들렀다가 출발해도 첸나이에 어두워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차창 밖으로 사람 사는 구경을 하면서 성당을 찾아갔다. 템플 안이 '환상'처럼 느껴졌다면, 차창 밖은 '현실'이었다. 신의 세계가 아닌 사람의 세상이 보였다. 열심히 살고 있는 그들이 템플 안의 힌두 신보다 내 눈에는 더 거룩하게 보였다. 한결 눈도 편안했고, 마음도 안정되었다.
성 메리스 성당(st, marys church)에 다다랐다. 한눈에도 외관이 너무 예쁜 성당이었다. 그동안 내가 인도에서 본 성당들은 거의 대부분이 하얀색 페인트칠만 되어있었는데 그곳의 성당은 흰색에 파란색 테두리가 칠해져 있어서 동화책 속의 예쁜 성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외관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성당 내부는 더 예뻤다. 흰색과 주황색의 조화는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그것이 또 전부가 아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까 내부 기둥이 모두 거대한 핑크색 대리석이었다. 연핑크 대리석 둥근기둥과 짙은 주황색 나무는 어울리지 않을 듯, 어울리며 근사한 색감으로 다가왔다. 그 안에 앉은 기도하는 사람들까지도 성당 건물과 함께 하나의 예술품처럼 보였다.
성당 밖은 차가운 색, 안은 따뜻한 색, 인도 사람들 다운 과감한 색 선택이었다. 너무 혼잡한 힌두 템플만 보다가 심플한 듯, 화려한 성당 건물에 마음을 온통 빼앗겨 버렸다. 개신교도이지만 마음이 평온해졌다. 잘 왔다고 생각했다.
성당 뒤편에는 학교가 있었다. 아마도 성당에서 운영하는 학교인 것 같았다. 인도는 그런 곳이 많아서 그럴 것이라 짐작이 되었다. 우리를 보더니 교복 입은 인도 아이들이 반갑다며 손을 흔들었다. "왓즈 유얼 네임?" 이란다. 인도에서 '왓즈 유얼 네임'은 '하우 아 유'나 '헬로'와 같은 의미라고 보면 된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하는 인사이다. 이름을 물어서 이름을 알려 줬는데 그 이름을 기억 못 한다고 섭섭해할 필요도 없을뿐더러 만날 때마다 이름을 묻는다고 귀찮아할 필요도 없다는 뚯이다. 그들은 우리 이름이 궁금한 것이 아니라 인사를 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두 번보고 말 사람들 사이의 이야기이다.
세상 어느 곳이라도 어린이들은 귀엽다. 그 아이들도 무척이나 귀엽고 발랄했다. 예쁜 성당을 봐서 기분이 환기되었고,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을 만나서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는 되었다. 그만 마두라이를 떠나도 되었다. 반나절 마두라이 여행은 인도 최대 템플도 만족스러웠고, 예쁜 성당도 흡족했다.
마두라이에서 첸나이까지는 약7시간 거리였다. 그때가 11시 30분경이었다. 조금 가다가 마두라이 인근 고속도로 휴게소의 베지테리언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남인도 베지테리언들이 점심에 주로 먹는밀즈(meals)와 빠니르65(우유 단백질로 만든 두부를 치킨 65 소스에 버무린 음식)를 주문했다.
인도를 떠나기 전에 꼭 한번 먹어야겠다고 생각한 밀즈를 여행 중에 먹게 되었다. 다양한 소스가 입맛에 맞아서 싹싹 비벼서 밥 한 그릇을 모두 비웠다. 빠니르도 맛있었고, 새우깡 맛이 나는 스낵도 괜찮았다. 입가심용 씨앗까지 야무지게 씹고 만족스러운 점심식사를 끝냈다.
우측 상단부터 반시계 방향.. 밀즈 스타트, 밀즈, 빠니르65, 입가심 씨앗과 후식 바나나, 전체 사진
인도에는 합석 문화가 있다. 인구가 워낙 많은 나라이니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사교적인 존슨은 합석한 처음 보는 남자와 10년은 알고 지낸 사이처럼 굴었다. 소스와 밥이 계속 리필되는 음식인데 덩치 큰 존슨은 내가 본 것만도 밥을 세 번 리필했다. 소스와 후식도 여러 번 리필했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아이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려줘야 했다.
많이 먹어서졸음운전을 할까 봐 같이 짜이(thai 인도 밀크티)를 마셨다. 짜이 장수 아저씨의 묘기 같은 짜이 붓기는 봐도 봐도 재미있었다. 이런 노점 짜이가 제대로 인 것 같았다. 생강향이 진하고 달고 맛있었다.
우리나라처럼 인도의 고속도로 휴게소에도 잡다한 물건들을 많이 판다. 존슨이 어린 아들 선물로 장난감을 하나 고르길래 내가 사주려고 하니까 아들 선물은 자기 돈으로 사고 싶다고 했다.
결혼 전 닭살스러운 연애 과정부터, 결혼을 하고 딸, 아들 낳는 것까지 다 봐 온 존슨이다. 내내 철이 없어 보이던 아이였는데 자식 둘의 아빠가 되고 나니까 어른이 된 것 같아서 왠지 모를 대견함이 느껴졌다. "그래, 그러면 네가 계산해"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이제 집으로 가면 되었다. 첸나이로 출발했다. 마두라이를 빠져나올 때도, 첸나이에 들어 설 때도 차가 많이 막혔다. 그래도 저녁시간에 많이 늦지 않게 첸나이 시내에 도착할 수는 있었다. 마두라이 호텔 룸에 비치되어 있던 강정을 챙겨 왔는데 차에서 그걸로 잠시 요기는 되었다.우리나라 강정과 모양과 맛이 똑같은 인도 강정을 처음 봤을 때 신기해했던 기억이 났다.
그날로부터 11년이 흐른 날이라니 믿기지가 않았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우리가 인도에서 살았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대견했다.
인도 여행의 마지막은 항상 한국식당이다. 느끼한 인도 음식만 먹었으니 매콤한 한식을 먹어줘야 인도 여행이 끝난 실감을 하게 된다. 두부전골과 김치전이 그날 우리 여행의 마지막 식사였다.
'인도를 떠나면서 인도 여행하기' 계획은 참 잘한 일이었다. 남편의 제안에 동의했고, 계획을 세웠었다. 남인도 3개 도시를 다녀온 날의 그 감정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11년 동안 인도에서 고생한 남편을 위한 여행이었지만 나에게도 인도를 정리하는 시간이 되어 주었다. 인도에 푹 담겨서 인도와 이별하는 시간은 의미가 남달랐다. 3일 후에 떠날 북인도 배낭여행이 기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