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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코끼리 이정아 May 15. 2024

장미넝쿨에 지지대를 세우며 인생을 배우다

인터넷 쇼핑사이트에 주문을 해 놓았던 넝쿨장미 지지대가 도착했다.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았지만 지금이라도 사방팔방 마구잡이로 자라는 넝쿨장미에 지지대를 세워줘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다양한 색과 여러 다른 생김새의 장미꽃을 보고 싶어서 각기 다른 종류의 키가 많이 크지 않을 장미묘목 다섯 그루를 작년 여름에 어놓았었다.

정원이 넓지 않아서 넝쿨 장미는 꿈도 못 꾸었기 때문이다.


화원 사장님이 권해준 키가 많이 안 클 예정인, 그럴 것이라고 믿은 그 장미 가운데 두어 그루가 예상과 달리, 자꾸만 키가 자라고 서로 얼기설기 가시 달린 가지들이 얽혀서 야단스러워지고 있었다.


철사로도 지지에 한계가 와서 굵은 나무막대기를 세워서 지지해 둔 장미 나무


급한 대로 집에 있던 굵은 철사를 구부려서 지지를 했다가 그마저도 힘에 부쳐 보여서 창고 구석에 뒹굴고 있던 출처가 불분명한 나무 막대기로 지지를 해 놓았다.

내 정원에 전혀 어울리지 않은, 미적인 면에서 빨리 빼버리고 싶은 나무 막대는 그래도 바람에 휘날리던 장미 가지를 고정해 주는 역할은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예쁜, 내 작은 정원에 어울리는 지지대가 필요했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싸고 예쁜데 배송비도 없는 철재 지지대를 발견했다. 중국에서 배송해 주는, 요즘 싸다고 난리가 난 그 사이트였다. 이것저것 정원 가꾸기에 필요한 액세서리들과 함께 주문해 놓고 기다리기를 열흘, 감감무소식인 배송정보를 들여다보는 사이에 보라색 '으아리'도 화분과 함께 온 작은 플라스틱 지지대에 겨우 몸을 지탱하며 하염없이 넝쿨이 자라고 있었고, 지지대 없이 꼿꼿이 서서 위로만 위로만 크고 있는 장미 한그루도 언제 비바람에 꺾일지 모를 처지에 놓여있었다.


하는 수 없이 한국 쇼핑사이트에 똑같은 지지대를 색깔만 다른 것으로 두 개 주문을 했다. 역시 대한민국이었다. 주문 이틀 만에 긴 택배 박스가 우리 집 현관 앞에 얌전히 놓여있었다.


지지대를 무리하게, 너무 늦게 세우다가 장미꽃 목이 부러지고 말았다.


또 비가 많이 올 거라는 일기예보에 마음이 급했던 나는 등산을 다녀와서 피곤하고, 집중력도 떨어진 상태에 장미나무에 지지대를 세우기 시작했다. 급한 성격이 문제였다. 차분히 지지대 속으로 장미 가지를 조심스럽게 넣었어야 했는데, 모양만 예쁜 작은 아치형 제품은 이미 자랄 대로 자라 버린 내 장미넝쿨을 품을 품이 못되었다.

이미 꽃이 만개한 분홍장미는 가지가 너무 많이 사방으로 자라 버려서 좁은 지지대가 무쓸모였고, 하는 수없이  빨간 꽃봉오리를 매 단 키 큰 나무를 억지로 집어넣다 보니 장미꽃 목이 똑하고 부러져버렸다.


잘 자라게 해 주려고, 비바람에 쓰러지지 말고 예쁜 꽃을 피우라고 세워주던 지지대 때문에 추운 겨울도 잘 이겨내서 마른 가지에 초록잎을 띄우고, 볕을 찾아서 자라고 자라 힘들게 만들어놓은 꽃봉오리가 그만 꺾이고 말았다.


넝쿨이 많아진 분홍장미는 지지대를 끼우다가 도로 제거하는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한동안 이파리도 힘없이 축 쳐지고, 꽃들도 빠르게 시드는 느낌을 받았는데, 억지로 지지대를 세운 빨간 장미는 예쁜 꽃도 펴보지 못하고 목이 꺾이고 말았다.


오늘도 나는 내 3평 작은 정원을 가꾸며 힐링도 하고, 인생도 배운다.


내 작은 3평 정원에서 또 인생을 배운다.

모든 것은 때가 있다고. 때를 놓치고 나면 아무리 지지를 하고 힘을 보태봐도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겨울이 지나면 가지도 좀 정리해 주고 새 가지가 자라기 전에 미래에 풍성해질 장미 넝쿨을 상상하며 빈 땅에 미리 지지대를 세워줘야 했었다.

그랬다. 현재는 보이지 않지만 크게 자라 있을, 만개해서 아름다울 미래를 위해서 미리 지지대를 설치해줘야 했다.


하지만 희망은 꺾이지 않았다.

봄이 지나고.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면 지금 세워 둔 지지대가 내년에는 제 역할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때라는 것은 놓치고 나면 또 다른 때가 오기 마련이다.


내 인생, 아직 3,40년은 더 남았다.

지금도 지지대를 세우기에 늦지 않았다고, 적당한 지지대를 제때에 세워보리라 다짐한다.

여러 해 겨울이 지났고, 지지대 없이 봄, 여름을 보내기도 해 봤지만 그래도 꽃은 폈었고, 다시 겨울을 지내고 봄을 맞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세상에 늦은 것은 없다.

아직 예순도 안 되었으니 내게 맞는 지지대를 찾아보면 될 일이다.

예순, 일흔, 여든, 아흔.. 아직도 예쁜 꽃을 피울 날들은 많이도 남았기 때문이다.


스트레스를 받아서 시들했던 분홍색 넝쿨 장미는 다시 생기를 찾았고, 목이 꺾인 장미는 미리 세워 둔 지지대에 의지해서 내년 이맘때에 화려하게 필 붉은 장미를 기대하게 한다.


너무 늦지않게 딱맞는 지지대를 찾은 으아리(클레마티스)


넝쿨 장미를 품지 못했던 지지대는 대신 으아리 넝쿨에 양보를 했다. 딱 맞춤 지지대를 그리 늦지 않게 받은 으아리는 예쁘고 건강하게 새로운 꽃봉오리를 달면서 잘 자라주고 있다.


때가 있고, 각자에게 맞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지지대를 세우면서 배운다.

너무 늦지 않게 나에게 맞는 지지대가 무엇인지 찾아볼 셈이다. 아직 늦지 않았고, 때는 언제든지 올 것을 믿으며.

그 때를 놓치게 되면 또 다른 때를 기다리면 될 일이다.

내 인생, 아직 많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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