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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코끼리 이정아 Jun 07. 2024

사는 집을 바꿨더니 삶의 짐이 가벼워졌다

10대 후반부터 쉰 중반까지 근 40년을 아파트에서만 살았다.

고등, 대학 시절을 아파트에서 살았고, 결혼을 해서도 줄곧 아파트에서만 지냈고, 인도에서조차 10년 넘게 아파트를 고집했다.


40년 동안 아파트에서 살았지만 나는 끊임없이 내 어린 시절의 산 아래 마당이 있던 그 집만을 그리워했다. 40년의 편리한 아파트보다 10여 년의 불편했던 주택이 내 마음속의  '집'이었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꿈속에서 나는 그 시절로 돌아갔고, 마당의 작은 꽃밭에서 화초를 가꾸는 돌아가신 내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의 안녕을 찾았다.


마당이 있던 내 어린 시절의 주택은 아파트보다 낡았고, 허름했고, 춥고, 불편했지만 내 마음의 '편함'은 집의 좋고 아니고의 문제는 아니었다.


마당에 아버지가 심어 둔 포도나무, 감나무, 배나무, 뽕나무가, 장독대 근처에 엄마가 심어 둔 채송화, 맨드라미, 봉숭아, 꽈리나무가 힘들 때마다 꿈에 찾아와서 나를 위로해 주었다.

비록 꿈 속이지만 어릴 적 우리 집에 다녀오면 어김없이  마음은  평안해지고 따뜻해졌다.



그 이유인 것 같다.

계획에 없던 갑작스러운 주택으로의 이사는 계획보다 앞선 무의식의 꿈에서 비롯되었다.


꿈이, 그리움이 현실이 되고 보니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집이 바뀌었을 뿐인데 삶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덩달아 바뀌고 있다.


아파트에 살 때는 아파트가격의 오르내리는 숫자가 신경이 쓰였다면, 주택에 살고 보니 내 작은 정원에 피고 있는 꽃잎개수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고, 어떤 새, 어떤 나비와 벌이 오가는지가 더 궁금해졌다.

아파트에 살 때는 예쁜 카페에 앉아있는 시간이 좋았다면, 주택에 살고부터는 내 정원의 작은 테이블만으로도 충분하다. 오히려 더 좋다.



복닥복닥 수십 년 동안 살고 있는 아파트가, 재건축만 기다리며 눌러앉아있는 오래되어서 불편한 아파트가 몇억이 오르고 내리는 숫자의 변화로 삶의 희로애락을 경험하는 이야기들이 저 다른 세상의 이야기가 되었다.

들의 인생에 엄마의 잣대가 관대해졌고, 비교하며 불행했던 시간들이 가소로워졌다.


우리 집 대문 밖의 세상에 크게 희비가 생기지 않고, 낮은 대문 안의 세상이 전부인양 그저 여유롭기만 하다.

자연 안에 있으니 세상사 지지고 볶을 일이 뭐가 있나 싶어졌다.


아파트에 살 때는 모든 게 날카로웠다면 외곽지 주택으로 나와보니 애써 문지르지 않아도 둥글둥글 마음의 모서리가 갈려지고 있다.


사는 집을 바꾸었더니 삶이 바뀌고 있다.


현관문을 열면 바로 마주하는 하늘과 한 걸음 내디디면 밟히는 바깥 땅이 그렇게 만드는 것만 같다.

꽁꽁 갇혀있던 몸과 생각이 언제나 열려있는 대문 마냥 헐렁헐렁 자유로워졌다.



늘도 나는 3평 작은 정원의 화초들을 살피고 호수를 끌어다가 물을 주며 하루를 시작한다. 데크 의자에 앉아서 하염없이 꽃멍(?)을 하다 보면 들고 있던 고민거리를 내려놓게 된다.


작은 텃밭의 상추를 뜯어서 야외 테이블에서 먹는 점심은 진수성찬 부럽지가 않다.

해 질 녘이면 입은 채로 개천변 산책로를 걸으며 풀냄새에 코가 뚫리고, 들꽃과 나비, 벌, 이름 모를 벌레들에 눈이 행복하고, 멀리서 들리는 뻐꾸기 소리에 귀가 즐겁다.


자녀를 모두 키우고 나서 자칫 무료할 뻔 한 전업주부인 나는 주택에서의 삶이 그저 감사하다.

지루할 새가 없이 하루가 바쁘다. 바빠서 우울할 새가 없다.


남편의 퇴직을 앞두고 아파트를 나올 수 있어서, 작은 정원이 있는, 산과 개천에 쌓인 주택으로 이사할 수 있어서 감사할 뿐이다.


작은 정원에 꽃을 심고 가꾸는 일이, 흙을 만지는 일이 너무 큰 기쁨이다.

혼잡하지 않은 평온한 마을이 안락하다.


복닥이지 않는 삶, 자연과 함께하는 삶, 여유롭고 평화롭다. 세상 고민이 자연에 묻혀버렸다.


집만 바뀌었을 뿐인데 마음의 짐이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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