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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코끼리 이정아 Jul 08. 2022

20대의 내가 50대의 나를 다독인다.

여행의 시간이 주는 힘


 

 인도에서 11년 만에 귀국을 해서 2년 반이 지난 지금 까지도 개봉을 안 한, 해외 이사용 단단한 종이박스가 몇 개 있다. 딸들 초등학생 때의 그림일기장과 상장들과 소소한 작품들과 결혼 전의 우리 부부 각각의 사진앨범 등이 들어있는 박스이다. 독립한 큰딸 방으로 최근에 옮겨 놓은, 창고에 있던 그 박스들은 여전히 책상 아래에 쌓여있다. 버릴 수는 없고, 그렇다고 펼쳐서 보게도 안 되는 그런 것들이다.


 독일의 '쾰른 대성당'을 TV에서 마주한 어느 날이었다. 눈에 익은 오래되고 웅장한 그 성당을 마주 한 내 가슴이 마구 쿵쾅대기 시작했다. 어느새 28년 전의 그때, 28살의 내가 그 성당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딸 부잣집 딸들이 대게 독립적이고 생활력이 강하다고 하는데 우리 자매들도 그런 편이었다. 1994년 그해의 8월, 30대 후반이었던 셋째 언니가 결혼도 안 하고 그동안 모은 돈을 가지고 꿈꾸던 프랑스 유학 중이었다. 언니는 5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 한 달을 앞두고 있었고, 나는 인생의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내고 있던 즈음이었다. 이직을 준비 중이던 나는 많지는 않았지만 퇴직금이 손에 있었고, 시간도 었다. 언니가 있는 파리로 날아갔다. 그렇게 라데팡스의 작은 아파트에서 '파리에서의 한 달 살기'가 시작되었다.


 

 국 준비로 바빴던 언니는 파리 지하철 노선도와 버스 노선도를 나에게 쥐어주었고, 영어도 잘 못하고  불어는 한마디도 못했던 나는 '젊음'이라는 용기 하나로 카메라와 지도만 들고 매일 파리 시내를 돌아다녔었다. 사진이 찍고 싶으면 인상 좋아 보이는 할아버지나 아주머니에게 카메라를 내밀면서 미소 띤 얼굴로 "익스큐즈 미"라고만 하면 되었다. 필름 카메라 시절, 그 필름이 낭비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던 때여서 그들이 최선을 다해서 찍어 준 한 장의 사진을 얻을 수 있었다. 간혹 길을 헤매게 되면 파리 시민으로 보이는 아무나에게 지도를 펼쳐 보이며 "웨얼 아이?"라고만 말하면 되었다. 그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친절하게 지도 위에 내가 있는 위치를 손가락으로 짚어주었다. 긴 영어가 아니어도 충분히 파리 시내를 혼자서 돌아다닐 수 있었다.


 

 루브르 박물관도 가고, 오르세 미술관도 가고, 베르사유도 가고, 에펠탑도 갔다.  버스만 타면 띄를리 공원에 갈 수 있어서 그 분수대 앞은 내가 늘 앉는 벤치도 있었다. 간혹 언니가 시간이 날 때면 로컬 여행사의 패키지 상품신청해서 고흐 생가나 모네 생가, 르와르 고성, 보르도 포도 농장, 알프스산 아래 프랑스의 예쁜 시골 마을 등을 따라다녔다.



  그렇게 패키지여행으로 간 곳 중의 한 곳이 독일의 '쾰른'이었다. 노테르담 성당과 몽마르트 언덕의 성당이 그때까지 내가 본 유럽 성당의 전부였는데, 그 성당들도 너무나 근사하고 아름다웠지만 '른 대성당' 앞에 선 나는 그 분위기에 완전히 압도를 당했었다. 외관의 웅장하고 고풍스러운 모습도 물론이고 고개를 뒤로 한껏 젖혀도 끝이 안 보이는 높은 천장과 화려하다는 표현을 넘어서는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의 성당 내부 모습은 입이 안 다물어질 정도였다. 이후에 10여 년 전에 가 본 바타칸의 성 베드로 성당보다 내 감성은 쾰른 대성당 쪽이었다.


 

 그 쾰른 대성당이 예전 모습 그대로 TV에 보이는데 내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순식간에 28년 전나에게로 데리고 가 주었다. 예뻤던 나는, 젊어서 예뻤던 나는, 스무여덟 살의 나는 거대한 성당을 올려다보며 감탄하며 감격하고 있었다.


 

 그때의 내가 궁금해졌다. 쌓여있는 무거운 박스에서 사진앨범을 찾아냈다. 인도 대홍수 때의 습한 공기도 이겨내고, 한 달 동안 바다를 건너온 컨테이너 해외 이사의 시간도 잘 견뎌낸 사진들은  앨범 표지만 살짝 곰팡이가 슬었을 뿐 모두 무사했다. 쾰른 대성당 앞의 젊었던 내가 궁금해서 펼친 사진앨범은 쾰른만 보고 덮게는 안 되었다. 1994년 8월, 28살의 나를 찬찬히 모두 들여다봤다. 예뻤었다. 젊었었다. 젊어서 예뻤었다. 인생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였던 그때, 계획 없이 떠난 유럽 여행 중인 사진 속의 나는 너무나 자유로워 보였고, 행복해 보였다. 나를 치유해줬던 여행의 시간들이 사진 안에 생생하게 보였다. 그 감정 상태가 고스란히 지금의 나에게 전해졌다. 28살의 내가 말하고 있었다. 내 인생은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56살이 된 나는 그때의 내 나이와 비슷한 26살과 27살, 두 딸의 엄마가 되었다. 엄마로 산 세월도 크게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나는 28살의 8월 그때의 나를 보며 행복해하고 있다. 추억이 주는 다독임이 너무 따뜻했다. 이제야 그때의 나와 마주했는지 후회를 했다.


 엄마로, 아내로 산 세월 동안 스멀스멀 나이는 쌓여버렸고, 갱년기의 긴 터널을 통과하고 있는 중이다. 지난 시간들이 갑자기 허무해지고 우울감에 빠질 때가 있다. 상황과 상관없이 호르몬을 탓할 수밖에 없는 그런 감정의 변화에 힘이 부칠 때가 가끔 있다.

결혼 후에 육아와 남편의 주재원 생활 때문에 내 일을 놓아버린 것에 미련은 있지만 전업주부의 삶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갱년기 증상이 정점이었던 몇 해 전에 그 미련이 후회로 다가올 때가 있었다. 내 인생이 허무하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 호르몬의 장난이었다고 지금은 믿고 있는 그때에도 나는 훌훌 털고 인도 여행을 다녀왔었다. 28살의 나도, 52살의 나도 여행으로 힘든 시간을 이겨냈었다. 52살 때의 인도 여행 사진을 보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고 위로가 되었던 것과 똑같은 감정이 28살 때의 유럽 여행 사진을 보면서 생겼다. 여행의 추억이 나를 위로했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혼란했던 나의 20대, 훌쩍 떠난 여행지에서 치유가 되었고 시간은 마음의 큰 기둥으로 한동안 나를 지탱해주었다.



 요즘도 간간이 찾아오는 호르몬의 장난은 나의 지난 시간들을 허무하게 만들 때가 있다. 그 호르몬과 싸워서 이기는 약을 우연히 찾았다. 여행을 가지 않고도 여행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되고 있다. 20대의 파리에서의 내가 그 약이 되었다. 20대의 기특한 내가 50대의 나를 다독여 주고 있다.


 50대의 내가 20대의 나에게 위로받듯이 80대의 나는 50대의 나에게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 인도에서 산 시간들과 귀국을 해서 한국에서 적응하며 살고 있는 이 시간들은 미래의 내가 분명히 아름답게 기억할 과거의 젊었던 50대일 것으로 믿는다.


고마워. 나의 20대.

고마울 거야. 나의 5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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