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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정원에서 만드는 내 눈사람

함박눈이 내린 날이었다.

주택에서 사는 재미가 이런 것인가 싶은 날이었다.


이른 아침, 열어젖힌 커튼 뒤로, 정원을 향해있는 주방 유리문 너머에 새하얀 동화 속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잠이 덜 깬 내 눈에 들어온 그 풍경은 분명 동화책의 한 페이지였다.

소리 없이 밤 사이 눈이 내린 모양이었다. 가벼운 솜털 이불을 덮은 듯이 하얗고 폭신하게 함박눈이 정원을 덮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까 솜털이 여전히 흩날리고 있어서 동화책이 아니라 애니메이션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주택으로 이사를 온 지는 2년 째이지만, 세 번째 겨울이 지나고 있지만, 그간 인도와 한국을 오가며 겨울은 인도에서 지내느라 이사 온 주택에서 함박눈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아파트에서 살 때 보던 눈 내리는 풍경과는 눈에 담기고, 마음에 닿는 그림이 확연히 달랐다. 우리 집, 내 정원이라는 대문 안의 공간의 경계가 함박눈마저도, 내 정원의 눈, 그래서 내 눈, 내 것이라는 의미로 다가왔다.


아파트에서의 눈은 공용의 눈이었고, 주택에서의 담장 안 눈은 우리의 눈이었다.

주방 유리문을 빼꼼히 열어서 고개만 내밀고 바라본 내 3평 정원에 쌓인 눈은 그 순간 내 눈이었다. 대문 안의 내 공간, 그 안에 쌓인 눈은 오롯이 내 눈이었다. 아파트에 살 때는 가져보지 못한 내 눈, 우리 가족의 눈이었다.



사철 초록잎을 반짝이는 에메랄드그린 담장에 켜켜이 쌓인 흰 눈은 쑥버무리 사이의 쌀가루 같았고, 황토색 작은 토분 위에 소복이 담긴 흰 눈은 아랫목 이불속에 넣어 둔 어릴 적 아버지의 고봉밥 같았다. 배롱나무 가지마다에 조르륵 앉은 눈은 그린 수묵화의 음영을 돋보이게 하는 듯했다.

무엇보다 추위에 움츠린 정원의 작은 식물들을 가득 덮은 하얀 눈은 금방이라도 뛰어 들어서 누우면 내 몸을 그대로 받아 줄 폭신한 하얀 솜요 같았다.



남편이 눈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아무도 밟지 않은 주차장의 눈을 이리저리 허리를 구부려서 굴리더니 금세 두 개의 눈덩이를 만들어냈다. 유리문 너머로 보고 있는 내 눈에 예순한 살의 그 남자는 겨우 여섯 살인 것 같았다. 구부린 허리 때문에 얼굴이 땅을 향하고 있어서 그 남자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세상 시름은 잊은 마냥 즐겁고 행복한 표정이었을 것이라고 움찔움찔 그의 어깨가 말하고 있었다.


다 만든 눈사람을 대문 밖 우편함 아래에 기대 놓았는데, 어쩌면 눈사람도 자기를 닮게 만들었는지 얼굴은 길고, 몸도 날씬했다. 눈사람이란 자고로 얼굴도 동글, 몸도 둥글, 3등신이 매력인데 남편의 눈사람은 너무 말라서 볼품이 없었다.



내가 나섰다. 자동차 위에 쌓인 눈을 더 보태서 얼굴도 동글, 몸도 둥글, 3등신의 눈사람을 만들고, 머리에는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을 하나 빼서 반짝이게 올리고, 화단의 검정 돌로 눈알을, 붉은 돌로 단추를 만들고, 시든 수국 꽃과 나뭇가지로 팔을 끼웠다. 제법 눈사람 모습이 되었다.

'네 눈사람은 이상하네, 네 것이 못 생겼네, ' 티격태격 유치한 말싸움을 하며 예순이 넘은 남자와 곧 예순이 되는 여자는 동심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장갑도 안 낀 맨 손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눈사람을 만드는 재미에 푹 빠져서 깔깔거리며 함박눈이 내린 아침 시간을 보냈다.

아파트에서는 내리는 눈도, 쌓인 눈도 내 것은 아닌 것 같더니 비록 작은 정원이지만 주택의 정원에 쌓인 눈은 내 것, 우리 것 같아서 그 눈으로 만든 눈사람도 오롯이 내 것, 우리의 것이 되었다.


눈 내리는 날은 그야말로 주택에서 사는 즐거움의 최고봉이었다.

남인도 열대지방에서 오래 살아서 눈을 많이 못 보고 산 이유도 있지만, 아파트의 공용의 정원이 아닌 작지만 우리 가족만의 정원에 쌓인 눈은 담장 안 동화 속에 내가 사는 듯해서 대문 밖의 현실의 세상이 궁금하지 않은 날이었다.

그저 내가 만든 눈사람이 녹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기온이 올라서 눈이 비로 바뀌어 내렸지만, 그 비를 맞고 조금 녹기는 했지만, 다행히 내 눈사람은 쓰러지지는 않았다.

고개가 앞으로 기울어진 채로 다시 언 눈사람은 대문을 열 때마다 "어서 오세요"라며 인사를 하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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