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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코끼리 이정아 Jul 30. 2022

가습기만 보면 내 심장이 내려앉는다.

 아이는 아니어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한 나는 나쁜 사람일까?


독립 선언을 하고 집을 나간 작은딸 방을 살펴보다가 갑자기 심장이 덜커덕 내려앉았다. 방 한구석에 놓여있는 미니 가습기를 보는 내 심장이 쿵쾅쿵쾅 본능적으로 빠르게 반응을 했다.

'가습기' 나에게 언젠가부터 공포의 단어가 되어버렸다. 뉴스와 시사프로그램에서 연일 보도되던 가습기 살균제 피해 어린이들을 보면서 무서웠고, 안타까웠고, 화가 났었다. 지리멸렬했던 긴 소송의 결말을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 개인과 세계적인 기업 간의 소송이었으니 평범한 우리들의 기대에는 못 미칠 결과였을 것이라고 짐작만 할 뿐이다.


1997년생인 작은딸은 우리 나이로 3살 무렵부터 아토피 피부염으로 고생을 많이 다. 지금은 누구나 아는 병명인 '아토피 피부염'이지만 그때는 그 병에 관한 정보를 별로 얻을 수도 없던 시절이었다. 가끔 TV에서 민간요법을 소개했지만 양의학을 더 신뢰하던 나는 거들떠보지는 않았다. 다행이었다. 아이를 더 고생시킬 뻔했다.


연년생 두 아이들과 전쟁을 치르던 그 시절에 병원 다니는 일도 내게는 큰 일이었다. 힘들게 병원을 가 봐도 스테로이드 연고나 처방받을 뿐이었고, 피부가 건조하면 가려우니까 보습을 많이 해야 한다는 얘기 정도만 들을 뿐이었다.


아토피 피부염에 대한 상식이 전혀 없었던 나는 의사의 '피부가 건조하면..'이라는 말에 꽂혀서 최대한 보습과 가습에 신경을 썼었다. 로션을 자주 발라주고 가습기를 딸의 머리맡에 늘 틀고 있었다. 보습과 가습은 다른 것이란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어서 습한 공기 때문에 집 먼저 진드기가 더 잘 자랐다는 것도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엄마의 무지로 딸에게 가려움의 고통을 더 준 셈이 되었다. 빨리 알아차려서, 그 기간이 길지 않아서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알레르 반응 검사에서  먼지 진드기가 최대 원인으로 밝혀졌던 터라 그 시기의 나는 거의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청소에 매진했었다. 진물이 나도록 긁고 잠도 제대로 못 자는 딸의 고통을 지켜봐야 했던 엄마는 먼지 한 톨이 용납이 안되었다. 그러니 가습기 청소에도 신경을 많이 쓰는 건 당연했다. 가습기의 균과 아토피 피부염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었지만 뭐든지 깨끗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매일 씻고 닦았다.


두 딸을, 그것도 연년생을 혼자서 키우느라 어쩔 수없이 세상 일에 조금 둔감하게 살 때였다. 지나고 보니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르겠다. '가습기 살균제'라는 것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냥 우리 엄마가 하듯이 가습기 청소는 물로 씻고 말리는 것이 전부인 줄 알았다.


세월이 흘렀고 우리 가족은 인도에서 살게 되었다. 딸의 아토피 피부염은 나이가 들어서인지, 인도의 환경이 체질에 맞아서인신경을 많이 안 써도 될 정도까지 호전이 된 상태였다.


그러던 중에 한국에서 들려오는 끔찍한 뉴스를 접하게 되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 어린이들에 관한 뉴스였다. 안타까웠고, 무서고, 기업의 행태에 치가 떨렸다. 너무나 가슴 아픈 피해 사례자들을 보면서 더 청결하고 건강하게 아이들을 양육하려 했던 엄마들의 좌절감과 죄책감을 감히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그리고 바로 드는 생각은 '가습기 살균제를 몰라서 너무 다행이다. 내 딸에게 사용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였다. 한때 못된 상식으로 딸의 건강을 위해서 가습기를 많이 사용했던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또 쓸어내렸다. 이후로 가습기만 보면 심장이 내려앉는 경험을 여러 번 반복했다.


시간이 흘렀고, 매체에서도 그 사건은 더 이상 다루지 않고 있다. 차츰 기억에서 멀어지는 이슈가 되었다. 나 역시 가습기 공포감이 많이 옅어진 상태였다.

그런 잊고 있던 공포가 딸의 빈 방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가습기를 보는 순간 다시 재현되고 말았다. 쿵쾅거리는 심장과 식은땀과 함께 그 살균제를 몰랐던 내가, 딸에게 그 살균제를 사용 안 했던 내가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또 하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피해 당사자와 그 가족들의 고통을 생각하면 '내 아이는 아니어서..'라는 생각조차도 죄스럽고 미안한 마음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솔직한 감정이다. 나는 엄마이니까, 나도 엄마이니까.

내 아이는 아니어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한 나를 나쁜 사람이라고 누가 말할까?


딸의 가습기를 물로 씻으면서 엄마는  한 번 깊은숨을 내뱉는다. 한동안 사용 안 할 가습기를 깨끗이 말려서 잘 보관해 둔다. 내 심장도 이제는 가습기 앞에서 더 이상 격한 반응을 안 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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