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노랑코끼리 이정아
Apr 18. 2022
나에게는 연년생 딸이 둘 있다. 어느새 20대 후반이 된 큰딸은 엄마의 첫사랑으로 불리고 있다. 아니, 첫사랑이라고 읽히고 있다. 엄마의 휴대폰에 이름 대신 '첫사랑'으로 내내 적혀있다. 나의 첫 아이, 첫딸, 첫사랑이다.
그 첫사랑이 독립을 선언하며 집을 나갔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한국이었다. 마침 그즈음에 인도 주재원 생활을 끝내고 한국으로 귀국한 우리였다. 자연스럽게 가족 네 명이 한집에서 살게 되었다. 작은딸 고등학교 졸업 후, 근 4년 만이었다.
딸들은 각각 뉴욕과 서울에서, 우리는 인도 첸나이에서 각자의 삶을 살다가 다시 모인 한국이었다. 4년 만에 모두 모인 우리는 같은 집에서 잠을 자고,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었다. 투닥거릴 때도 있었지만 그 마저도 좋았다. 그런데 딸들은 꼭 그렇지만은 않았던 모양이었다.
큰딸이 독립 선언을 했다. 집에서도 멀고, 회사도 더 멀어지는 곳으로 간다고 했다. 보증금이며, 월세며, 관리비며, 생활비까지 돈도 많이 들고 무엇보다 회사 출퇴근 시간이 길어지는데도 불구하고 독립을 해야겠단다. 그렇게 다시 집을 나갔다.
혼자 미국으로 보내던 그때는 겨우 20살이었고, 인도에서 두바이를 거쳐서 뉴욕으로 가는 그 여정은 너무 멀었고, 밤 12시에 도착할 캐네디 공항과 학교 기숙사로 가는 택시가 너무 염려스러웠었다. 엄마의 걱정은 안중에도 없던 딸은 기숙사 방을 다 꾸미고서야 도착 안부를 전했었다.
4년을 장학금 받아가며, 교내 아르바이트도 하며, 인터넷으로 그림도 팔아가며 올에이 성적으로 졸업을 했다. 성적우수와 실기우수 두 개의 메달을 목에 걸고 졸업식장에 섰었다.
그 4년 동안의 딸의 시간을 봤던 엄마이다. 집을 나가겠다는 딸을, 독립선언을 하는 딸을 서운하다는 이유로 잡지 못하는 이유였다. 게다가 스무 살이 아닌 스물일곱 살이었다.
이삿짐을 올려주고, 다 같이 저녁을 먹고 나서 오피스텔 입구에 딸을 내려줬다. 집으로 올라가면서 보낸 딸의 카톡 이모티콘이 밝게 웃으며 '안녕'이라고 작별의 인사를 했다. 엄마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제 같이 살 일은 없겠구나 직감했다.
독립 1주일 만에 아빠의 호출이 있었다. 다 늦은 저녁에 와서 엄마 밥만 먹고 두 시간 만에 '우리 집'에 간다고 일어섰다. 결혼 전까지 '우리 집'은 여기라고 말하는 아빠에게 여기는 '본가' 내가 사는 곳이 '우리 집'이라며 그렇게 딸은 그녀의 '우리 집'으로 가버렸다. 그리고 한 달 반, 한 번도 '본가'에 오지 않고 있다.
큰딸이 독립을 하고 나면, 나의 첫사랑이 집을 나가면 너무 허전해서 어떡하나 했던 그 생각은 생각으로 그쳤다. 오히려 집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은 일상을 공유하고 있다. 직접 요리한 음식도, 출퇴근 길도 항상 보여준다. 차츰 일상 공유의 빈도가 줄어들겠지만 벌써 서른이 가까워오는 딸의 삶의 방식을 반대하고 싶지는 않다.
이제는 자기 방이 아니라고 말하는 큰딸 방에서 노래도 듣고, 책도 읽고, 영화도 보며 하루를 보낸다. 그대로 남아있는 딸의 침대와 옷장을 봐도 더 이상 딸의 물건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내 마음에서도 딸의 독립이 받아들여졌다. 4년 동안 떨어져서 살았는데 좀 같이 살지 그러냐고 했던 그 마음은 온데 간데없고 그저 내 공간이 생겨서 좋기만 하다.
나의 첫사랑이 집을 나갔다. 벌써 여러 달이 지나고 있다. 같이 살든지 따로 살든지 내 첫딸은 영원히 내 첫사랑인 사실에 변함은 없다. 휴대폰 속의 프로필 사진만 봐도, 첫사랑이라는 이름만 떠도, 목소리만 들어도 좋은 나의 첫 아이, 첫 선물, 첫딸, 첫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