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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코끼리 이정아 Sep 04. 2022

운전기사 비노스, 시바, 라주 그리고 존슨

비노스, 시바, 라주, 그리고 존슨.

자가운전을 하기 힘든 환경의 인도에서 2009년부터 10여 년 동안 우리 가족의 발이 되어  고마운 운전기사 이름들이다.



 비노스


시골집에 초대를 해줘서 엄마가 해 주신 인도 시골 집밥 먹을 기회를 줬던 비노스는 집이 너무 멀어서 비만 오면 출근을 못하거나 지각을 했다. 어쩔 수없이 가까운 일본인 집으로 옮겨야 했던 수하고 인물이 훤했던 우리 집 첫 기사였다.


나도 길을 모르고 시골 아이였던 비노스도 길을 몰라서 같이 첸나이를 탐험하며 다녔던 기억이 많다. 그만 후에도 가끔 시내로 나올 일이 있으면 일부러 찾아와서 안부를 전하고 가던 착한 아이였다.


시골 청년이 도시 물을 먹고 차츰 순박함을 잃어갔어도 천성이 착했던 비노스였다. 그의 안부가 한동안 궁금했지만 시내 쪽에서 일을 하지 않아서 수소문을 해 볼 방법이 없었다. 예뻤던 여동생도, 인상 좋았던 엄마도, 그 엄마의 맛있었던 집밥도, 동네 유지처럼 보였던 외삼촌의 좋은 집도 모두 기억이 난다. 지금쯤 가정을 꾸려서 잘 살고 있겠거니 생각만 할 뿐이다.



시바


두교 대표 신의 이름인데 우리나라 어감이 아무래도 불편해서 한동안 입에 안 붙던 이름의 공식적인 우리 집 두 번째 기사였다. 성실한 편이었고 착했다. 영어를 잘 못했지만 첸나이 지리도 잘 알고 좋은 오토바이를 가지고 있어서 지각을 하지도 않았다. 한창 놀 나이인 20대 초반이었던 시바는 늦게 퇴근하는 게 싫었던 모양이었다. 딸 둘이서 번갈아가며 게까지 붙들고 있을 때가 잦았다.


쌓인 불만이 어느 날 터져버렸다. 그날은 토요일, 자기도 친구들과 놀아야 하는 주말이었다. 즉흥적으로 그만두겠다면서 아직 오지도 않은 명절 보너스까지 계산을 해서 월급을 달라는 황당한 얘기를 했고, 복도에서 언쟁이 일었다.

앞집 젊은 인도 마담과 옆집 아저씨까지 참견했지만, 인도 사람 누구도 시바 편은 아니었다. 결국에 돈 문제로 서로 마음이 상한 상태로 그만두고 나간 이틀 뒤에 시바가 다시 찾아왔다. 미안하다며 다시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때는 이미 다른 기사가 채용된 날이었다. 다행히 시바는 바로  다른 한국 집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가끔 보게 되면 먼저 인사를 하면서 많이 쑥스러워했.


주차한 차에 코코넛이 떨어져서 차 앞유리가 깨진 사건이 있었다. 시바 사진은 없고, 그 아이와 관련된 유일한 사진이 깨진 차유리 사진뿐이다. 딸들도 사춘기였고, 시바도 내성적인 편이어서 같이 사진 찍은 일이 한 번도 없었던 모양이었다.



존슨


시바가 갑자기 그만두게 되면서 남편 회사 총무과에서 급하게 보낸 기사가 '존슨'이었다. 딸들 등하교 때문에 하루라도 기사가 없으면 안 되는 그곳에서 누구라도 와 주기만 하면 자동차 키를 맡겨야 했다. 인도 하층민답지 않게 체격이 크고 서글서글한 인상이 친근하고 좋았다. 힌두교와 관련된 이름이 대부분이던 곳에 그 아이는 이름도 존슨이었다. 크리스천이었다. 20대 중반이었고, 고등학교도 나온 아이였다.


임시로 온 기사였지만 얘기가 잘 되어서 바로 채용을 하게 되었다. 내 성격이 꼼꼼하게 따지는 편이 못 되는 이유도 있었고, 그 나라에서 5년째 살고 있던 나는 메이드나 운전기사나 다분히 운에 맡겨야 하고, 별 사람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비게이션과 스마트폰이 없던 그 시절에 시골 출신이었던  존슨이 첸나이 대도시의 길은 잘 몰랐지만 내가 움직이는 길은 뻔해서 가리켜주면서 다니면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다른 기사들에 비해서 영어도 제법 하고 성격도 좋았다. 외국인이라고, 월급을 주는 고용주라고 해서 어려워하거나 조심하는 법도 없었다. 친화력이 강했고, 넉살이 좋았다.

알고 보니 처음부터 직업이 운전기사가 아니었다. 통신회사 직원이었는데 팀장과 언쟁을 벌이다가 그만두고 나와서 잠시 아르바이트로 운전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다가 우리 집에 오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 가족과 존슨의 인연이 시작되었고, 6 넘게 이어졌다.

 

우리 집에 온 지 3년 차가 되었을 때였다. 작은딸의 대학 입시 때문에 한국에 6개월 정도 머물러야 해서 어쩔 수 없이 존슨과는 이별을 해야 했다. 방학 한두 달은 월급을 주고 기다리게 했지만 6개월은 그럴 수 없는 기간이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다른 집을 소개해 주겠다고 했더니 덩치는 산만한 아이가 큰 눈에 눈물을 뚝뚝 흘리며 다른 집에 가고 싶지 않다고 사정을 했다. 마침 남편 차 운전기사가 그만둔 상태에 임시 기사가 일을 하고 있어서 남편에게 존슨을 부탁했다. 말 많고 철이 없다며 마음에 안 들어했지만 그동안의 정으로 우리 가족과의 인연은 이어졌다.



라주


딸 입시를 끝내고 돌아온 인도, 내 차 운전기사가 필요했다. 딸들도 없고 차를 많이 이용할 것 같지는 않아서 남편 차를 이미 6개월째 몰고 있는 존슨을 다시 부를 수는 없었다. 귀국한 한국 집에서 일하던 '라주'를 존슨이 소개를 해줬다.


머리도 수염도 지저분하게 기르고 힌두교 특별한 날에 입는 검은색 옷에 주황색 스카프와 맨발 차림의 꾀죄죄모습이었다. 설상가상 영어도 거의 할 줄 몰랐다. 고민을 하고 있는데 새벽에라도 급한 일이 생기면 자기를 불러도 된다는 말에 그러면 채용을 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다음날에 30분이나 일찍 출근한 라주는 같은 사람이 맞나 싶게 말끔한 모습이었다. 템플에 기도하러 다니는 기간이 끝났다고 했다. 영어가 안 되는 것 말고는 나무랄 데 없는 아이였다. 은근 상남자 스타일이어서 운전 중에 사소한 문제라도 생기면 상대 운전수에게 꼭 사과를 받아내던 아이였다. 결혼을 일찍 해서 아들이 둘이나 있었고 성실한 가장이었다. 퇴근시키고 밤늦게 일이 생겨도 편하게 부를 수 있는 기사였다.

친구들과의 장거리 인도 여행에 운전을 시켜도 불편하지 않은 기사였다. 우리의 인도 여행 동반자여서 내 친구들에게도 좋은 기사로 기억되는 라주이다.


귀국을 하고 코로나가 창궐할 때였다. 라주 큰아들이 뜨거운 물에 화상을 입어서 병원 치료비가 너무 부담된는 얘기가 들렸다. 저렴한 국립병원이 코로나 환자만 받고 있어서 사립병원을 다녀야 하는데 하루 치료비가 엄청나다고 했다. 지인 편에 병원비를 좀 보냈다. 그래도 되는, 그래야 되는 고마운 라주였다.


라주와 존슨은 우리 집에서 친한 친구가 되었다. 일요일에 누가 출근할지는 둘이서 알아서 결정을 해서 우리는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자동차 여행을 가려고 하면 서로 운전을 하겠다고 티격 거리는 사이였다.

라주가 우리 집에 온 이후로 귀국을 할 때까지 5년 동안은 주변 한국 마담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둘은 우리 집의 든든한 기사였고, 집사였다.



다시, 존슨


11년 동안의 인도 생활 중에 가장 가깝게 지냈던 기사는 존슨이었다. 오래 함께 한 이유도 있고, 그 아이의 사교적인 성격이 크게 작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존슨이 20대 중반일  처음 만나서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기까지의 과정을 봤고,   출산과 오토바이 사고로 유산을 한 일과 이후에 다행히 아들을 출산한 일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 까지 존슨 가족의 모든 대소사를 7년 동안 옆에서 봐 왔었다. 그럴 때마다 멀리 시골에 있는 엄마보다 가까이에서 매일 보는 나에게 의논을 하곤 했었다. 나를 엄마처럼 믿고 따랐던 아이였다. 은행 계좌를 못 열던 시절에 월급의 일부를 나한테 매달 적금 들듯이 맡길 정도였다.

총각이 아빠가 되고, 가장이 되는 과정을 모두 본 나는 존슨이 아들 같고, 조카 같았다.

첫딸을 낳고 기뻐하던 모습과 존슨 가족과 함께 폰티체리 여행을 한 그 시간들이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봉사활동을 다니던 마담의 든든한 동행자가 되어주었다. 같이 팔을 걷어붙였고, 자기 나라 이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마담을 고마워했다. 명절 연휴에 여행길 운전대를 잡아야 해 고향에 못 가는 불만을 얘기하지도 않았다.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눈물이 많던 존슨은 우리 딸들이 인도를 떠날 때도, 다른 집을 알아보라고 했을 때도 그렇게 울더니 내가 귀국을 하던 날에는 너무 울어서 민망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정이 많던 존슨은 내가 인도를 떠난 지 이 지나고 있는데 여전히 가족의 안부를 묻고 우리가 다시 인도에 오기를 소원하고 있다


내가 귀국을 할 때 우리 나이로 존슨 아들은 두 살, 딸은 5살이었는데 그 아이들이 유치원생과 초등학생이 되었단다. 딸 리야 교복을 선물했더니 예쁘게 교복 입은 사진을 보내왔다. 103kg던 체중을 77kg으로 뺐다며, 10km 마라톤 완주 사진도 보내왔다. 가장이면 건강해야 한다고 내내 잔소리를 하던 마담에게 체중 감량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보였다. 인도를 떠난 마담에게 여전히 자기 가족의 일상을 공유하고 싶어 다.


되돌아보면 나의 인도 생활이 상대적으로 덜 힘들었던 이유 중의 하나가 운전기사 덕분이기도 했다. 비노스, 시바, 라주 그리고 존슨, 고마운 이름들이다. 인연을 잊지 않고 때때로 안부를 전하는 존슨은 특히 더 고마운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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