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랑코끼리 이정아 Sep 05. 2022

마하에게서 숙제를 끝낸 엄마의 얼굴을 보았다.

'블로그를 잘 시작했구나!'라고 느끼는 순간들이 간혹 있다. 최근에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일이 있었다. 블로그 덕분에 인도 우리 아줌마 '마하'드디어 연락이 닿았다.


15년 전쯤, 큰딸이 초등 4학년 겨울방학 때의 어느 날이었다. "엄마도 블로그 한번 해볼래? 내가 만들어 줄게!" "그래 볼까!" 그렇게 해서 시작한 블로그였다.

뚱뚱한 pc 앞에서 떠듬떠듬 독수리 타법으로 쓴 일기를 시작으로, 디카로 찍은 가족사진도 올려보고, 이것저것 편집 기능들도 배우면서 재미를 붙인 것이 지금까지 왔다. 글쓰기를 즐기고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내 취향에 딱 맞는 일이었다. 16년째 하고 있는, 싫증을 잘 내는 내가 평생 가장 오래 붙들고 있는 유일한 취미이며 기록이다.


그런 내 블로그에 마하 이야기를 가끔 올리고 있었다. 인도를 떠나던 날에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돈문제로 안 좋게 통화를 하고 내내 마음이 불편했던 이야기부터, 미안하고 궁금한 마하의 10년의 세월을 블로그에 끄적여 놓았었다. 운전기사였던 존슨과 라주 소식은 들리는데 마하 소식은 어디에서도 들을 수가 없었고, 지인을 통해서 연락을 해봐도 전화번호가 바뀌었는지 전화를 안 받는다는 얘기만 들을 뿐이었다. 다른 도리가 없어서 잘 살고 있겠거니 포기를 하고 있었는데 최근에 놀랍게도 연락이 닿는 일이 생겼다.


블로그의 마하 이야기에 비밀 댓글이 하나 달려 있었다. 마하가 본인 집에서 일하고 있다는 젊은 주재원 아내의 댓글이었다. 너무 반가워서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10년의 세월만큼 마하는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잊고 있다가도 어떤 계기로 인도 생각이 날 때면, 그 생각의 끝은 늘 마하였다.

잘 지내는지, 나이도 있는데 일을 너무 많이 해서 몸이 상하지는 않았는지, 남편의 술주정은 좀 아졌는지, 큰딸 결혼시키느라 진 거액의 빚은 얼마나 갚고 있는지, 작은딸은 직장을 잘 다니고 있는지, 저나 나나 두 딸을 같이 키운 엄마이다 보니 누구보다 마하 생각이 많이 났었다. 마지막 날의 미안했던 기억 때문에 늘 마하에게 빚을 진 기분이었다.


고마운 그분 덕분에 마하와 영상 통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아줌마 얼굴이 폰에 비치는데 얼마나 반갑고 좋았던지 "마하! 마하! 마하!" 이름만 불러댔다. 마하 역시 "마담! 마담!"만 외쳤다. 영어가 안 되는 마하와는 인도에 살 때처럼 단어 몇 개와 손짓과 눈빛과 표정만으로 대화를 해야만 했다. 그런 게 가능한 세월을 함께 한 아줌마이다.


10년 아니던가? 마하가 하려던 말을 나는 모두 알아들었다. '마담, 오랜만이다, 잘 지내느냐. 딸들은 대학교 졸업을 했느냐, 한국에 있느냐, 결혼은 했느냐, 마스터는 잘 계시냐, 인도에 다시 안 오느냐, 마담이 존슨 편에 보낸 손주들 선물 잘 받았다. 너무 고맙다. 마담 얼굴 봐서 너무 행복하다. 인도에 와라' 그 얘기를 했다.


마하와 영상 통화를 연결해 준 분의 얘기로는 큰딸은 아들을 낳았고, 작은딸도 결혼을 해서 임신 중이라고 했다. 마하 남편도 돈을 벌고 있다고 했다. 궁금했던 이야기를 미리 듣고 영상 통화를 해서인지 마하의 밝은 표정이 마담 얼굴을 오랜만에 이유만 아니라는 것을 아차릴 수 있었다. 이제는 숙제를 다 끝낸 엄마의 편안한 얼굴이었다.


첫딸이 아들을 낳았다니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다. 인도에서 딸이 아니게 태어난 일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두 딸 결혼시키느라 진 빚이 많아서 메이드 일을 계속해야 하겠지만 남편도 돈을 번다고 하니 안심은 되었다.


폰 안의 작은 네모 영상이 열리고 활짝 웃는 마하의 얼굴이 보이자마자 '다행이다. 좋아 보이네. 잘 살고 있구나!' 대번에 그 마음이었다.

나보다 10년도 더 젊은 마하는 비록 없던 새치도 보였고,  사이에 나이도 좀 들어 보였지만 얼굴 살도 붙었고, 표정이 밝고 환해져 있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2010년 그때의 예쁜 얼굴이 보였다. 고생하던 동생을 오랜만에 봤는데 얼굴이 펴 있어서 안심이 되는 언니의 마음, 딱 그 마음이 다. 영어가 안되니 비록 짧은 대화로 통화는 종료되었지만 좋아진 얼굴을 본 것으로 충분했다.


연락이 안 닿아서 전화번호가 바뀐 줄 알았는데 모르는 번호여서 안 받았던 모양이었다. 이제 가끔 궁금하면 연락을 하면 되겠지만 마하 얼굴을 보고 나니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다. 그래도 언젠가 내 마음이 인도에 닿을 때, 그곳이 그립고 그곳 사람이 궁금할 때 언제든지 연락을 하면 될 일이다. 존슨을 통하면 될 일이다.


이제 마하 걱정은 덜었다. 두 딸 대학 공부 다 시키고, 결혼까지 시킨 마하가 참 대단하고 존경스러울 뿐이다. 학교라고는 가 보지도 못했지만 메이드 월급 그 적은 돈으로 그 큰일들을 모두 해낸 장한 엄마이다.


환하게 웃는 마하의 얼굴에서 숙제를 모두 끝낸 딸의 엄마가 보였다. 큰딸 결혼 준비하느라 돈 문제로 힘들 때에도 몸은 지쳐 보였지만 언뜻언뜻 행복한 얼굴을 보였던 딸 엄마 마하였었다. 그 모습보다 수십 배는 더 좋아 보이는 마하가 반가웠고 안심이 되었다. 좋은 마담을 만난 것 같아서 그것도 다행이었다.


연락이 닿은 덕분에 불편했던 마음을 덜 수 있어서 나도 편안해졌다. 손주들 선물이라며 존슨 편에 보낸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빚진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녀에게는 내 얼굴을 보여주는 일보다 한 푼이라도 돈이 더 반가울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제는 되었다. 궁금하고 걱정되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빚진 마음을 내려놓게 되었다. 내가 알던 씩씩하고 현명한, 숙제를 끝낸 마하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나도 내 밀린 숙제를 하고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운전기사 비노스, 시바, 라주 그리고 존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