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 캠프에서 돌아온 우리는 따뜻한 물로 모래먼지를 말끔히 씻어냈다. 노곤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되레 컨디션이 좋아졌다. 사막에서의 일박이 만족스러워서 기분이 좋은 이유가 컸다.
낮에는 호텔에서 뭉그적거리다가 저녁은 성안에서 먹고, 짜이 한잔 하면서 골든시티 뒤로 내려앉는 일몰을 구경하고, 성안의 밤 골목을 돌아다닐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 계획을 변경했다. 어디라도 가야 할 것만 같았다.호텔에서 시간을 보내기에는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호텔 리셉션에 자이살메르에 구경 갈만 한 곳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젊은 남자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한참 동안 의견을 나눈 결과물을 우리에게 건넸다.부욱 찢은 작은 종이에는 알 수 없는 장소 다섯 군데가 적혀있었다.그대로 가보기로 했다.
오토릭샤를 불러달라고 부탁하고, 호텔 밖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는데 성벽 아래에 줄지어 주차된 자동차들 사이로 소와 돼지들이 지나다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돼지가 길에 돌아다닌다는 사실이 재미있었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멧돼지인지 집돼지인지 구분이 안 가게 생긴 귀여운 돼지 가족을 지켜보고 있는데 우리가 탈 오토릭샤가 도착했다.
정원을 가꾸던 중년 남자가 우리에게 관심을 보였다. 호텔 사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남편에게 악수를 청하며 어디에가느냐고 묻길래 그 쪽지를 보여줬다. 호텔 직원이 써 준거라고 했더니마음에 안 드는지 두 군데는 볼펜으로 쓱쓱 줄을 긋고 순서대로 가면 된다며 숫자를 매겼다. 줄 그은 두 곳은 멀어서 오토릭샤로 가기에 시간이 충분치 않다는 설명을 덧 붙였다. 3번이 선셋 뷰를 볼 수 있는 곳이라며 아마도 시간이 딱 맞을 거라고 자신 있는 호탕한 목소리로 쪽지를 다시 건넸다.
그 사장을 못 만났으면 먼 곳까지 다녀오느라 선셋도 못 보고 경로가 많이 꼬일뻔했다는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오토릭샤 기사에게 사장이 힌디어로 뭐라고 한참 얘기를 했다. 우리를 안내할 장소를 설명하는 듯 보였다. 호텔 사장 덕분에 눈앞의 성 이외에 자이살메르의 다른 관광지 몇 군데를 더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다.
갈겨쓴 쪽지와 오토릭샤 기사에게 자이살메르의 마지막 3일째 여정을 모두 맡기기로 했다. 제법 쌀쌀한 12월의 북인도 자이살메르였다. 따뜻하게 챙겨서 입고 모자도 썼다. 모래먼지가 많아서 안경을 쓰고 코와 입도 가렸다. 누런 먼지를 풀풀 날리며 오래된 오토바이의 힘겨운 소리를 내뱉으며 오토릭샤가출발을 했다.
큰 흰소가 스치듯 우리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인도에 오래 살았어도 뿔이 큰 하얀색 소는 볼 때마다 여전히 신기한 동물이었다. 힘이 세서 무거운 수레 끄는 일을 하는 소라고 한다. 내 선입견으로는 소가 신이라면 저 멋진 뿔을 가진, 색깔도 예쁜 흰소가 신이 아닐까 싶었지만 회초리를 맞으며 짐을 무겁게 끌고 땡볕을 걸어가는 힘들게 일하는 소이다.
Amar Sagar(아마르 사가르)
지금은 폐허가 된 어느 옛 마을이었다. 부서진 마을의 하늘에는 까마귀 떼들이 날고, 황무지 땅에는 염소들이 얼마 안 되는 초록 풀을 뜯고 있었다. 물길도 있었는지 원형 그대로의 작은 아치 다리도 보였고 계단식 우물도 조그맣게 몇 개 보였다. 지금은 물도 말랐고, 인적도 없었다. 쓸쓸하고 황량한 풍경은 그다지 눈길이 가는 모습은 아니었다. 내 마음까지 메말라지는 것 같아서 빠르게 한 바퀴 둘러보고 오토릭샤에서 내렸던 도롯가로 돌아갔다.
도롯가 마을 어귀에 삼삼오오 동네 노인들이 모여 앉아서 시간을 축내고 있었다. 무채색의 풍경 속에는 색을 띠는 노인들 머리 위에 둘러진 빨간 천과간판의 빨간, 파란 페인트 글씨가 유일한 생명체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게 했다. 적막하기는 폐허가 된 마을도, 사람이 사는 동네도 매 한 가지였다. 강아지들만 외부인인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며 쭐래쭐래 따라올 뿐이었다.
Bada Bagh Cenotapns
두 번째 장소로 이동했다. 자이살메르는 모든 풍경이 똑같았다. 마른땅 위에 듬성듬성 초록 풀이 눈에 보이는 전부였다.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은 시야가 시원하다는 느낌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심심해서 시선을 막는 무언가가 나타나기를 바라게 되었다. 심심한 풍경이 펼쳐지다가 멀리 뾰족 지붕들이 보였다. 땅과 같은 색의 건축물이어서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지평선의 라인을 바꾸고 있었다.
오토릭샤를 세우고 허름한 매표소에서 티켓팅을 하고 땡볕 아래를 걸었다.
병사들의 무덤이라고 했다. 무덤이 마치 집처럼 보였다. 햇빛에 비쳐서 그들이 말하는 골든 빛을 띠고 있었다. 멀리에서는 땅이나 건축물이나 구분이 안 가는 색깔이어서 마치 여름에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모래로 집을 만들며 놀던 생각이 나게 했다.
가까이에서 본 무덤은 너무너무 아름다웠다.자이살메르에 흔한 사암을 예쁘게 조각해서 만든 무덤은 아무리 무른돌이라지만 어떻게 저런 모양으로 깎아 낼 수 있었는지 신기했다. 물러서 오히려 섬세한 조각이 어려운 게 아닐까 싶은데 기둥의 형태나 벽면의 조각이나 지붕의 둥근 모양들이 놀랍기만 했다.
햇빛이 비치는 각도에 따라서 돌 건축물은 색깔이 달라 보였다. 알록달록 색칠을 한 건물보다 음영에 따라서 은은하게 형태가 드러나는 조각들은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만들었다.
사람들도 거의 없었고, 누런 땅과 누런 무덤 건물 사이로 새까만 까마귀 떼들만 날아다녔는데 그 새들이 오히려 단조로운 색의 무덤 건물을 심심하지 않은 풍경으로 만드는 듯했다.
둥근 지붕과 뾰족한 지붕 모양의 두 가지 형태의 무덤들이 구분 지어 나뉘어 있었는데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궁금증을 해결해 줄 어떤 누구도 없었다. 지붕이 뾰족한 무덤 쪽으로 넘어갔다. 둥근 형태보다 확실히 미적인 면에서 아름다움이 덜했다.
그런데 내부의 천장을 보는 순간 생각이 달라졌다. 무덤을 이렇게까지 아름답게 만들일인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어떻게 만들었을지 궁금증이 커졌다. 천장뿐만 아니라 바닥의 돌들도 마치 비누를 예리한 칼로 잘라서 깔아 놓은 듯이 정교했다. 천장을 보고 감탄을 하고, 바닥을 보고 또 감탄을 했다.
이 아름다운 건축물이 무덤이라고 알려주는 비석들이 간간이 보였다. 말을 탄 군인과 그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조각되어 있는 비석은 그곳에 묻힌 누군가의 표식일 것이라 짐작을 하게 했다.너무 귀여운 비석들이었다.
무덤 주변으로 하얗고 키가 큰 풍력 발전기들이 둘러 서 있었는데 그 풍경 또한 장관이었다. 선조들의 무덤과 현대식 발전기가마치 과거와 현재가 한 공간에서 서로를 이채롭게 바라보는 듯했다. 허허벌판에 오직 둘만이 그렇게 우뚝 서서 있었다. 이색적이고 특이했으며 아름다웠다.
VYAS CHHATARI
12월의 자이살메르는 해도 바쁘게 움직였다. 두 군데만 잠시 들렀을 뿐인데 오토릭샤 기사가 일몰을 보려면 서둘러야 한다고 했다. 호텔 사장이 강력하게 추천했던 선셋 포인트를 향했다.
따로 담장이랄 것도 없고 문이랄 것도 없이 막대기 하나 들고 플라스틱 의자에 앉은 남자가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좀 전에 갔던 병사들의 무덤이라는 곳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곳을 먼저 왔었다면 대단하다며 감탄을 했을 건축물이었지만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곳이어서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선셋 포인트에 제시간에 가서 서있으려면 그렇게 해야 하기도 했다.
건물 안에 사람 모양이 조각된 비석들이 보였다. 무덤 건물도 좀 더 소박했고, 비석들도 그랬다. bada bagh는 장교들 무덤이고, 이곳은 일반 병사들의 무덤이 아닐까 생각이 되게 만드는 규모였다. 조드푸르에서부터 군인들 무덤 몇 군데를 둘러본 내 추측일 뿐이다.
무덤 건축물은 bada bagh에서 구경하고 이곳은 일몰을 보러 오는 곳 같았다. 해가 떨어지려는 기미도 없는데 선셋 포인트라는 곳에 이미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시내와 가까운 곳이었다. 멀지 않게 자이살메르 성도 보이고 돌담 너머 언덕 아래로 도심의 빽빽한 집들도 내려다 보였다. 호텔 사장이 제대로 루트를 잡아 준 듯했다. 먼 곳에서부터 차츰 호텔 가까운 쪽으로 여행 루트를 짜 준 것 같았다. 일몰 시간과도 딱 맞았다. 자신만만했던 호텔 사장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지는 해는 더 강한 빛을 내뿜으며 무덤 기둥과 지붕을 골든 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햇빛이 비치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의 밝기와 색이 확연히 구분되면서 이전에 봤던 bada bagh 보다 덜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밋밋했던 무덤들이 한층 화려하게 변하고 있었다.
해는 마지막 열기를 뿜으며 쓸쓸한 무덤 위를 강렬하게 비추고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이 절정을 향했다.무덤 기둥 사이로 붉은 해가 저무는 풍경이 유독 아름다웠다.
그 순간 나는 경주의 '감은사지 3층 석탑'이 오버랩되었다. 경주에 살 때 어린 딸들과 감포 바닷가에서 놀다가 집으로 돌아오면서 항상 들르던 곳이 '감은사터'였다. 석탑 두 개 사이로 큰 해가 기울면 그 풍경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마치 그곳, 감은사터의 3층 석탑 너머로 지는 해를 보는 것 같았다. 탑과 무덤 건물이 어느 면이 비슷한지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 나는 같은 풍경을 보는 듯했다. 세월과 돌, 아마 그 이유가 아닐까싶었다.
감상도 잠시, 서둘러서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걸음을 옮겼다.
돌담에 사람들이 빼곡하게 모여있는데 그 아래는 자이살메르 시내였다. 해가 질 때까지 돌 벤치에 앉아서 기다렸다가 우리도 담장에 붙어 섰다. 큰 도로가 언덕 아래에 바로 있어서 차 소리가 위로 퍼지면서 너무 시끄럽게 들렸다. 차 소리와 사람 소리 때문에 시각적인 일몰 풍경 외에 다른 걸 기대하면 안 되었다. 조용한 감상이 안 되는 곳이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는 경험할 수없는, 눈높이에 바라봐지는 일몰 풍경은 무척이나 경이로웠다. 바다도 아닌데가로 일직선이 선명했다. 사막의 그것과도 또 달랐다. 바로 내 눈높이에서 붉게 타는 하늘과 검은 지평선이 맞닿아 있었다. 자동차 소음만 없었으면 더할 나위 없을 풍경이었다.
여행 6일 차에 처음 먹은 한국 음식
오토릭샤도 많이 탔고, 많이 걷기도 해서 이른 사간인데도 출출했다. 근처 식당을 검색했더니 멀지 않은 곳에 한식당이 보였다. 한국음식 안 먹어도 불편하지 않은 우리 부부였지만 가까운 곳에 있다니 찾아가 보기로 했다. 오토릭샤 기사와는 한식당 '가지(Gaji's) 앞에서 헤어졌다.
인도 사람이 운영하는 게스트 하우스 겸한식당이었다. 한국식당 주방에서 일하면서 배운 솜씨로 한식을 만든다고 했다. 루프탑의식당으로 올라갔다. 자이살메르 성도 보이고 도심의 혼잡함도 내려다 보였다.어느새 어두워졌고 자이살메르 야경을 품은 옥상 식당은 분위기가 꽤 괜찮았다.
제육볶음과 된장찌개를 주문했는데 모양과 맛이 제법 한국 음식 다웠다. 밑반찬까지 한국식이었다. 여행 6일 차에 처음 먹는 한국음식은없던 힘도 생기게 했다. 한국음식 안 먹어도 살 수 있는 우리였지만 역시 한국인은 한국 음식을 먹어줘야 기운이 나고 기분도 좋아지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했다.
세계 어디를 가도 한국인은 있지만 그 시각, 그곳에도 한국인이 있었다. 30년 직장 정년퇴직을 하셨다는 두 한국인은 그 게스트하우스에서 처음 만나서 동무가 되신 듯했다. 한 달째 나 홀로 인도 여행 중이라고 했다. 인도 맥주 킹피셔 한 잔씩 받아 들고 맥주잔이 비는 만큼 여행 이야기가 채워졌다. 고생한 이야기, 황당했던 경험을 무용담처럼 나누었다.
너무 늦기 전에 호텔로 돌아가야 했던 우리는 한창 무르익은 분위기를 깨는 것에 대한 미안함을 맥주값을 계산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걸어서 호텔로 가던 골목의 밤
구글맵을 켜고 호텔을 향해서 걸었다. 스마트폰이 안내하는 대로 큰길이 아닌 동네 골목길을 걸었다. 골목에 소들이 너무 많아서 소를 피해서 가는 일이 큰 일이었다. 주택가의 어두운 골목을 걷는 일은 인도 생활 10여 년 만에 처음이었다. 자이살메르에서 얼떨결에 그 경험을 했다. 사람 사는 모습은 어디나 같다고 생각했다. 가족들이 모이는 시간의 북적거림과 온도가 골목 안의 가가호호에서 흘러나왔다. 큰길이 있는 골목 끝에 다다랐을 때 아직 문을 열고 있는 채소 가게들이 보였다. 상인들도 남자, 손님들도 남자인 인도의 전형적인 저녁장 보는 풍경이었다.
자이살메르 성 입구에 이르렀다. 성문 앞의 상가 주변은 그 시간에도 문전성시였다. 젊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오토바이 소리에 정신이 없었다. 그 앞을 지나서 호텔에 도착했다.
밤의 자이살메르 성 구경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 무렵에 갑자기 너무 피곤해졌고, 다음날 아침 일찍 공항으로 가야 해서 호텔에서 쉬면서 체력 충전을 해 두기로 했다.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이살메르 공항 가기
푹 잘 자고 일어난 아침 공기는 여전히 싸늘했고, 아침식사를 위해서 나온 야외 테이블은 여전히 자이살메르 성벽이 눈앞에 거대하게 마주 서 있었다. 항상 똑같은 메뉴인 뜨거운 블랙커피와 토마토 수프로 몸을 녹이고, 치즈 샌드위치와 프렌치토스트로 배를 채웠다. 그 자리, 그 풍경, 그 음식도 마지막이었다.
짐을 꾸리고 체크 아웃을 했다.
오토릭샤를 타고 그 성, 그 길, 그 풍경, 그 모래 먼지를 뒤로 했다. 공항이 생각보다 무척 가까웠다. 가까운 만큼 아쉬움도 컸다. 3박 4일 동안 머물렀던 너무 좋았던 사막의 도시, 골든 시티 자이살메르를 떠날 시간이었다.
걸어 나가서 타는 비행기도 오랜만이었다. 낮게 나는 비행기 창밖으로 자이살메르 사막이 내려다 보였다. 남편이 꿈꾸던 사막에서의 하룻밤도, 신났던 낙타 타기도, 사람이 살고 있는 성안의 골목길 걷기도, 아름다운 무덤 건물도, 지평선 너머의 일몰도, 골목을 걷던 그 밤길도, 추위에 떨며 먹던 뜨거운 토마토 수프도 비행기 아래에 모두 두고 우리는 바라나시에 가기 위해서 뉴델리 공항을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