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갠지스강이 흐르는 삶과 죽음의 도시 '바라나시'(3)

인도를 떠나면서 하는 인도 여행(14)

by 노랑코끼리 이정아


갠지스강으로 걸어가기


부다의 첫 설법 장소였다는 '사르나트' 불교 유적지 투어를 하고, 철수 카페에서 한식을 먹고, 쾌적한 호텔에서 낮잠을 자고 난 우리는 '철수네 보트 투어' 약속 시간에 맞추려고 서둘러서 호텔을 나섰다.


그즈음에는 호텔에서 갠지스강까지 걸어가는 길이 익숙해져서 동네 마실길처럼 느껴졌다. 벌써 네 번째 걷는 길이었다. 길 위의 빈틈없이 빼곡한 사람들도, 거리의 소란함도 전혀 낯설거나 불편하지가 않았다. 눈에 익은 노점의 채소들과 간식거리들을 구경하며 늦지 않게 약속 장소에 도착하기 위해서 걸음을 재촉했다.





늦은 오후의 갠지스강


늦은 오후의 갠지스강은 또 다른 분위기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기우는 해의 붉은 기운이 하늘에도, 강에도 만연하게 물들어 있었다.

그 풍경 한가운데에 납작한 슬리퍼를 닮은 똑같이 생긴 작은 나무배들이 같은 모양의 그림자를 강물 위에 검게 달고서 귀엽게 옹기종기 모여있는데 그 모습이 잔물결도 거의 없는 심심한 강을 재미있는 풍경으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해가 지려면 아직 멀었는데 일몰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태운 배들이 이미 여러 척이었고, 이른 아침에 많이 봤던 광경인 강물에 몸을 씻는 남자들도 꽤 있었다. 밤에 가트에서 지낼 제사에 참석하려고 준비 중인 듯 보였다.

갠지스강 저녁 풍경을 눈으로 훑으면서 노란색 배 그림을 찾아서 가트 앞쪽으로 부지런히 걸었다.


노란 배 그림이 그려진 가트를 발견했다. 한글이 쓰인 샛노란색 배 그림은 짙은 남색 테두리가 쳐져있어서 멀리서도 단박에 보였다. 철수네 보트 투어 집결지였다. 우리 부부가 제일 먼저 도착을 했는지 한국인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철수 씨의 낡은 배


"어서 오세요!"라며 큰소리로 누가 인사를 하길래 돌아봤더니 철수 씨였다.

마치 고래의 배를 갈라서 갈비뼈가 드러난 그 안에 철수 씨가 들어앉은 것 같았다. 고래뼈를 본 적도 없으면서 내 눈에 고래뼈로 보인 그것은 해체된 배였다. 철수 씨는 배를 수리하는 중이었다. 수리라기보다는 거의 새로 만드는 것처럼 보였다.


철수 씨의 첫 배라고 했다. 한비야 씨가 탔다는 그 배였다. 자기에게는 의미가 큰 배여서 버리지는 못하고 계속 수리해서 탄다고 했다. 그럴 만도 하겠다며 공감이 되었다.

남편은 고래의 해부, 아니 배의 해부 모습이 궁금해서 가까이에 가서 이것저것 궁금한 것을 질문하고 있었다.

나는 해부된 고래 갈비뼈를 닮은 배와 함께 갠지스강의 전체적인 풍경에 눈길이 갔고, 남편은 오직 배 구조에만 관심이 많았다.



사람들이 모두 모일 때까지 주변 구경을 하고 있었다. 강물 가까이에 쭉 늘어선 집들이 어디서 많이 본 풍경 같다는 생각과 함께 이탈리아의 베네치아가 연상되었다. 낡고 오래되어서 베네치아의 멋진 집들과는 많이 달랐지만 물 위에 떠있는 듯한 모습과 작은 배들은 그런 상상을 하기에 충분했다. 베네치아에서 처럼 우리는 배도 곧 탈 예정이었다.


약속 시간이 되었다. 어느새 한국 청년들이 한둘씩 모이더니 우리 포함 예닐곱 명 정도가 되었다. 그 청년들은 바라나시에 오래 머물고 있는 듯했다. 마치 동네 구경 나오듯이 자연스럽고 편해 보였다. 내가 본모습이 맞았다. 그들은 갠지스 강변의 어느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물고 있는 바라나시의 장기 여행객들이었다.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처음 보는 또래의 그들끼리 하는 얘기가 모두 들렸다.





갠지스강 모래섬과 일몰


배에 올랐다. 어린 뱃사공이 갠지스 강물 위에 배를 띄웠다. 노을이 물드는 강물 위를 떠 갔다. 마지막 열기를 뿜는 바라나시 하늘의 해는 그 열기를 모두 갠지스 강물에 식히려는 듯 물 색깔은 점점 더 채도가 높아져갔다.

갠지스강은 화장터가 있는 죽음의 강이 아니라 그때만큼은 아름다운 휴양지 같았다. 넘실넘실 강물 위의 배와 붉게 물든 하늘과 강의 노을과 우리도 그 안의 풍경이 되어서 강바람에 머리를 휘날리며 자유로움을 만끽했다.


강 한가운데의 모래섬까지 가서 배에서 모두 내렸다. 강 위의 작은 섬에서 바라본 바라나시는 고요했고 적막했다. 내가 육지에 서 있고, 눈에 보이는 그곳이 강물 위에 떠있는 섬 같았다.

사람들로 넘쳐나는 북적거리던 가트 주변이 그저 조용한 마을로 보였다. 강물 위에 떠있는 평화로운 마을로 보였다.



바라나시 가옥들 위로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마지막 해는 늘 그렇듯이 더 밝고 더 강했다. 일몰 구경하기 딱 좋은 장소에 우리가 내린 것이었다. 동그랗고 빨간 해는 분명히 마을 위에 있는데 강물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집들 너머로 강물이 흐르는 것이 아닐까 상상이 되는 풍경이었다. 그래서 내가 서있는 곳이 육지이고, 그곳이 섬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되는 것 같았다.



같은 배를 타고 온 한국인들 모두 각자 자리를 잡고 각자의 생각을 담고 묵묵히 그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라나시의 갠지스강에서 보는 일몰은 아무래도 많은 생각을 하기에 충분했다. 눈앞의 어딘가에서 화장이 되고 있는 죽은 이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래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서 조용히 있던 청년이 먼저 말을 걸고 우리 부부 사진도 찍어줬다. 다른 일행들과는 좀 다르다는 느낌을 받은 그 청년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조용하던 모래섬이 갑자기 시끌시끌했다. 배에서 내린 그들은 무언가 의식을 치르는 듯이 보였다. 궁금해서 물어보니까 바라나시에 사는 사람들인데 결혼식 세리머니를 하는 중이라고 했다. 축하인사를 건네고 기꺼이 허락해주는 그들의 사진도 찍었다. 힌두교인들인 그 가족들이 갠지스강에 온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다시 배에 올랐다. 화장터 쪽으로 간다고 했다.

철수 씨의 또박또박 한국어 설명이 시작되었다. 인도의 역사, 힌두교의 정의, 화장터 주인인 불가촉천민들이 부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 갠지스 강변에 마을이 형성된 이유, 힌두인들이 화장 후에 갠지스강에 뿌려지기를 원하는 이유 등등을 귀에 쏙쏙 박히게 너무 설명을 잘해주었고, 그의 나라 인도와 그의 종교 힌두교에 대한 자긍심도 느낄 수 있었다.

힌두교인이 아니면, 힌두교를 이해 못 하면 눈에 보이는 갠지스강 위의 어떤 모습도 절대 이해할 수없을 것이란 얘기였다.

그의 눈빛에서 이방인인 우리가 자기들의 힌두교를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읽혔다. 그 얘기가 끝남과 동시에 화장터 가까이에 배가 도착했다.





갠지스강 화장터


멀리서 본 화장터의 모습은 어둠 속에서 불빛만 보여서 내 눈에는 그저 평범한 강가의 마을 풍경 정도로만 생각되었다. 가까이에 갈수록 시끌시끌했고, 특별한 분위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굴뚝의 연기는 희미하게 보이는데 공항에서 타고 온 택시 안에서의 매캐한 연기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아서 의아했었다. 그래서 강 위의 우리가, 모래섬 위의 우리가 처음에는 화장터를 인지 못하고 그저 아름다운 노을만 즐긴 이유가 되었던 것 같았다.



배가 갈 수 있는 화장터 가장 가까운 곳에서 멈춰 섰다. 너무 가까운 곳이니 더 이상은 사진을 찍지 말아 달라는 부탁과 두 명의 시신이 화장된다는 철수 씨의 설명 이후로 누구 하나 말이 없었다. 조용히 그 광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시신이 강물에 담가지고, 화장이 되고, 항아리에 담긴 뼛가루가 다시 강물에 던져지는 과정이 그대로 보였다. 나는 눈앞에 보이는 그들의 장례문화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에 적신 시신을 화장하다 보니 비릿한 냄새가 말도 못 했고, 화장하는 동안에 나오는 연기는 강바람을 타고 도심으로 모두 날리고 있었다. 강 위에 있던 우리는 다행히 그 연기 냄새는 맡지 않아도 되었지만 가끔 그을음 같은 것이 배 위에도 날렸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관광객들이 많아서 아마도 철수 씨가 그런 얘기를 했던 것 같았다. 힌두교를 이해 못 하면 갠지스강의 화장터를 이해 못 할 것이라고.

그랬다. 나는 이해가 안 되었다. 갠지스강에서 마지막을 보내고 싶은 그들은 그곳에서 화장이 되고, 뼛가루가 뿌려진다. 가난해서 장작을 충분히 못 산 시체는 화장이 덜 된 채로 유기견들의 먹이가 되는 그곳에서 그들은 목욕을 한다. 기도를 하며 강 위에 촛불을 띄운다. 그들의 성스러운 강은 그들에 의해서 오염되고 있었다.


바라나시 화장터를 보고 나서 나는 힌두교를 더 이해하고 싶지 않아 졌다. 살아서도 카스트 제도 때문에 불평등한 삶을 살다가 죽고 난 이후의 장례식에서도 그렇게 심한 불평등을 겪는 그들의 종교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인도의 최대 명절인 디왈리(또는 디파발리)라는 것이 있다. 폭죽을 많이 터뜨릴수록 내세에 더 좋게 환생한다는 믿음이 있는 그들이다. 한 달 월급을 폭죽 사는데 모두 사용하는 운전기사들을 봤다. 아무리 그래도 부자들만큼 살 수는 없는 그들이었다.

부자는 현세에서도 편하게 살고, 죽을 때도 좋은 장작으로 화장이 되고, 내세에도 더 좋게 태어날 수밖에 없는 종교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가 힌두교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한다. 10년 이상 살았던 나라에서 본 그들의 삶과 바라나시의 화장 문화를 본 내 생각일 뿐이다. 그들은 불만이 없고, 당연히 받아들이는 종교관일 수도 있다. 이방인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찌 되었건 힌두교는 내가 이해하기 힘든 종교이다. 철수 씨의 얘기가 자꾸 귀에 맴돌았다.





갠지스강 가트의 제사


다시 배는 깜깜한 갠지스강 위를 달렸다. 속도를 높이며 달리는 배의 엔진 소리도 커졌고, 그 속도만큼 강바람도 세게 불었다. 배들의 엔진 소음과 세찬 바람은 어느덧 화장터에서의 기억을 조금씩 희석시켜 주었다.

제사를 지내는 가트의 밤 풍경은 화려한 축제의 현장 같았다. 조명도 예쁘고 가트 계단에 사람들이 빈틈없이 빼곡했다.



갠지스강은 밤에 가장 활기가 넘쳤다. 화려한 불빛, 북적거리는 사람들, 배의 엔진 소음들이 밤의 갠지스강을 축제 분위기로 만들고 있었다.

남편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끝까지 그 풍경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갠지스강에서 만난 한국 청년

저녁은 걸어서 철수 카페에서 먹었다. 화장터를 다녀왔더니 이상하게 인도 음식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가셨기 때문이다.

우리 사진을 찍어 준 그 청년과 동행했다. 밥을 같이 먹으며 이런저런 대화가 오갔는데, 대기업을 퇴직한 30대 초반의 결혼도 한 청년이었다. 퇴직 후에 3개월째 세계 여행 중이라고 했다. 아내와 같이 여행하다가 인도는 안 가고 싶다는 아내는 네팔에서 한국으로 돌아갔고, 이후에 다른 나라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얘기를 했다. 잘생기고 인상도 좋은 그 청년은 아이를 안 낳기로 아내와 얘기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했다. 내 아이가 주는 행복감은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크다고 얘기는 해 주었지만, 그들의 생각도 존중한다고도 했다. 밥값을 계산하려는 우리를 극구 말리던 청년은 자기 인생 모토가 빚을 안지는 것이라며 고마운 마음만 받겠다고 했다.

여행을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들에게서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게 되고 때로는 배우게도 된다. 내가 사는 모습이 그들에게 힌트가 되기도 한다.

여행이 좋은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나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나이도 다르고 상황도 다른 두 남자는 철수 카페를 나온 이후로도 갠지스 강변의 밤길을 걸으며 많은 대화를 나누고 헤어졌다.

강 위에서 보던 것보다 더 혼잡하고 시끌시끌한 가트 주변을 걸어서 우리도 호텔로 향했다.



강변에서 바라본 강 위의 풍경은 우리가 그 위에 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시끄러운 배의 엔진 소리도 환한 불빛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저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시끄러운 가트 주변을 걸으며 고요한 밤의 강을 바라보며 가트 밖으로 올라왔다.





바라나시 갠지스 강변의 밤길


역시나, 언제나처럼 사람들로 붐볐다. 아침보다, 낮보다, 저녁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길 위에 빼곡했다. 그들 사이를 헤치며 호텔을 향해서 걸었다. 여러 번 걷던 그 길이 그 시간에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무척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바라나시도 갠지스강도 마지막이라는 생각 때문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철수네 보트 일출 투어를 신청을 해놓았기 때문에 그 길이 마지막 길은 아니었다.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왜 그렇게 서운했는지, 왜 그렇게 허전한 기분이 들었는지.





갠지스강이 나를 당기다.


대로변 골목 안의 호텔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갑자기 조용한 곳에 들어왔더니 바로 방으로 들어가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기에는 복잡한 생각이 많았다. 그 생각들을 정리도 하고 좀 털어 낼 시간이 필요했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그 도시에서 여러 날 장기 여행 중이던 한국 청년들 생각이 났다. 내 딸들 또래로 보이던 그 아이들을 무엇이 그곳에 오래도록 머물게 하는지, 몇 번씩 다시 오게 하는지 궁금했다. 우리 세대보다 청결함에 더 예민한 세대인데 그곳의 환경을 참으면서까지 머무는 이유가 궁금했다. 시끄럽고, 더럽고, 공기도 안 좋고, 종교의 이질감도 큰데 뭐가 좋아서 떠나지 못하고 있는지 그때는 좀처럼 그들이 이해가 안 되었다.


그 의구심은 한국에 돌아와서 몇 년이 지나고서야 조금씩 이해가 되고 있다. 나도 바라나시가 궁금하고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그 청년들도 뚜렷한 이유가 없이 마음이 이끄는 대로 그냥 머무는 것이 아닐까라고 이해를 하게 되었다.


바라나시를 다녀온 사람들 중에 다시 그곳을 찾는 사람이 많다고 들었다. 바라나시에서 머물 동안에 나는 다시 오고 싶은 이유를 찾지를 못했다. 떠나고 나서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냄새나고 더럽고 사람들로 미어터지는 그곳이 요즘 자주 생각이 난다. 인도 여행을 간다면 또 가고 싶은 곳의 랭킹 안에 드는 곳이 되었다.


무엇이 나를 그곳으로 끌어당기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바라나시는, 갠지스강은 자꾸 신경이 쓰이고 생각이 나는 곳이 되어버렸다. 가트와 강, 바글거리는 사람들과 잔잔한 물 위의 배들, 혼잡함과 고요함, 삶과 죽음은 갠지스강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다. 그 이미지들이 자꾸 그곳으로 당기는가 싶다.





바라나시를 떠나며


바라나시를 떠나는 날이 되었다. 새벽에 갠지스강의 일출을 마지막으로 보고 떠나려고 철수네 보트를 예약해뒀었지만 날씨가 흐려서 포기를 하고 느긋하게 일어났다.

미리 얘기해 둔, 첫날 공항에서 인연이 된 그 택시를 타고 다시 공항으로 향했다. 호텔 주변 풍경도 이제는 익숙해져서 떠나는 뒷걸음이 많이 아쉬웠다. 내 인생에 다시 바라나시를 올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이어서 그랬던 것 같았다.



11년 동안의 인도를 정리하면서 인도 남쪽 땅끝마을부터 북쪽 히말라야까지 찍어보자는 여행 계획의 마지막 목적지는 네팔의 '포카라'였다. 델리를 경유해서 네팔의 수도인 '카트만두'도 경우 해야 했다.


히말라야를 가기 위한 포카라행의 첫 경유지 델리를 가기 위한 수속을 밟고, 샌드위치와 커피로 아침을 해결하고, 바라나시를 기념하려고 냉장고 자석도 사고, 드디어 히말라야를 향한 첫 비행기에 올랐다.

화장터 연기 때문에 생긴 스모그 아래의 바라나시와 이제는 정말 이별을 해야 했다. 이제는 새로운 여행지, 네팔을 기대하며 우리는 또 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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