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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의 '포카라' 대신 보드나트의 '카트만두'(1)

인도를 떠나면서 하는 인도, 네팔 여행(15)

by 노랑코끼리 이정아


델리 국제공항


바라나시를 떠난 우리는 델리 공항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히말라야가 있는 네팔의 '포카라'를 가기 위해서는 '델리'와 '카트만두'를 경유해야 했다.

이번 여행에서 세 번이나 타게 된 Indigo 항공은 기내식으로 나온 예쁜 팩의 망고주스마저도 우리에게는 친근한 음료가 되어있었다. 친근해서 편안한 비행이 되어 주었다.


바라나시 공항을 떠난 지 약 2시간 후에 델리 공항에 도착을 했다. 국내선 청사에서 국제선 청사로 이동을 해야 했기 때문에 헤매지 않으려고 인포메이션 부스부터 찾았다. 알려주는 대로 셔틀버스를 타기 위한 티켓팅부터 했다. 긴 줄을 서서 받은 '프리 셔틀 티켓'을 들고서 그제야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일일이 수동으로 티켓 검사를 하는 모습이 인도스럽고 정겨웠다.

인도를 떠나면서 인도 여행을 하던 중인 나는, 11년 동안이나 산 인도에서 나는, '기계에 맡기면 되는 일을 왜 저러나'라는 생각보다 여전히 사람 손이 하는 일에 눈길이 갔고, 그 모습이 인도답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제 며칠만 지나면 그 '인도다운 인도'를 떠나서 '한국다운 한국', 기계에 나를 맡겨야 하는 일이 일상이 될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 생각이 마음 한쪽에 자리 잡고 앉아서 내 여행길에 쭉 동행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도다운 모습에 자주 눈길이 멈추었고, 마음이 닿았었다.

"인도는 이제 마지막이구나. 나는 한국으로 귀국을 해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버스 안을 돌아다니면서 일일이 손으로 티켓 검사를 하는 인도 남자의 손을 따라서 내 시선도 움직인 이유였다.



10분 후에 도착한 제3터미널 국제선 청사는 인도가 아닌 것만 같았다. 인천 국제공항에 버금가는 규모와 시설이었다. 크고 화려한 공항 청사는 그동안 10년 넘게 보던 인도가 아니었다. 2주 동안 인도 시골이나 작은 도시만 돌아다니다가 마주한 델리 공항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내가 살던 첸나이 국제공항과도 달랐다. 탑승구를 찾아서 넓은 공항을 걷고, 오르고, 또 걷고 한참을 이동했다.



12시 반경에 도착한 델리인데 카트만두행 비행기는 4시 출발이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었던 그 무렵의 델리 공항은 성탄절 데코를 많이 해 놓아서 괜히 면세점 구경을 하게 만들었다. 네팔은 춥다고 해서 수분크림을 하나 샀다. 뚜껑의 인도 그림과 'INDIA'가 거기에 손이 가게 했다.


여름만 있는 첸나이에서 살다가 가끔 봄이나 가을에 한국을 방문하게 되면 발목 피부 각질이 허옇게 일어나서 창피할 때가 종종 있었다. 얼굴은 건조해서 너무 당겼고, 수분크림을 필수품으로 챙겨서 외출을 해야 했던 기억이 그제야 났다. 네팔에서도 내 피부가 감당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수분크림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그때라도 그 물건이 눈에 띄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치킨을 먹고, 2층 창가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면서 공항 면세점 오가는 사람들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남편은 델리 출장을 여러 번 가 봤었지만 나는 그렇게 오랫동안 인도에서 살았어도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도시가 델리였다. '언젠가 인도를 떠날 때가 되면 북인도 트라이앵글 여행을 하게 되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생각만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인도를 떠나는 일이 현실이 되었는데 결국 나는 델리를 가보지 못했다. 바라나시와 카트만두를 오가면서 공항만 3번 들르고 만 델리가 되었다.


크리스마스는 한국에 있는 딸들과 넷이서 꼭 보내자 싶어서 일정을 맞추다 보니 북인도 트라이앵글은 도저히 여행 일정에 넣을 수가 없었다. 귀국 첫 크리스마스는 5년 만에 가족이 모두 한국에서 만나는 날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첸나이의 한국 교민들 사이에 떠도는 이야기가 있었다. 타지마할을 안 보고 인도를 떠나면 언젠가 다시 인도에 와서 살게 된다는 믿기 싫지만 믿게 되는 이야기였다.

'그러면 나는 다시 인도에 돌아오게 될까?' 그 순간에는 왠지 그렇게 될 것만 같았다. 남편은 아직 젊었고, 인도 경력이 너무 길어서 다시 직장을 구한다면 인도 관련 일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코로라 팬더믹이라는 예상치 못했던 일이 다시 인도에 갈 기회를 빼앗았지만 분명히 우리는 인도에 다시 갈 뻔했었다. 안 가게 되어서 너무 다행이라고 지금은 생각을 하고 그 떠도는 이야기가 맞다면 언젠가 다시 가게 될까도 염려했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 말고 남편은 타지마할을 봤었다. 그 떠도는 이야기는 믿고 싶은 이야기가 되었고, 인도에 다시 안 가도 된다는 결론의 이야기가 되었다.


델리 공항에서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남편과 나는 인도에서의 시간들을 조금씩 정리하고 있었다. 2주 동안의 인도 배낭여행이 인도를 정리하는 좋은 시간이었다고 우리는 서로 공감하고 동의했다.








카트만두 공항과 네팔 비자받기


드디어 네팔행 비행기에 올랐다.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 가는 비행기였다. 두 줄 좌석의 작은 국내선 저가 비행기만 줄곧 타다가 좌석수가 엄청 난 큰 비행기를 타니까 다른 나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바라나시에 갈 때와 마찬가지로 스모그 가득한 델리 상공을 날아서 우리는 카트만두로 향했다.


어느새 해가 지는 모양이었다. 인도 여행 내내 수없이 많이 본 노을이었다. 바다, 성, 사막, 강, 존재하는 모든 장소의 노을을 모두 봤다고 생각했는데 하늘 위에서 노을을 보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뭉게뭉게 솜구름 너머에 주황으로 물든 하늘과 비행기 날개에 반사된 강력한 태양빛은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출발에서 이미 기분 좋은 네팔행, 히말라야 행이 되어 주었다.

기내식이 나왔고, 남편이 주문한 캔맥주가 나왔는데 맥주 이름이 '히말라야'였다. 히말라야가 벌써 눈앞에 있는 것처럼 두근거렸다.



창밖이 깜깜해졌다. 앞 좌석에 붙은 화면에 네팔의 관광지를 보여줬다. '네팔이구나, 드디어 우리가 네팔에 왔구나' 실감이 났다.


깜깜한 카트만두 공항에 내려서 걸어서 청사로 들어갔다. 수도의 국제공항인데 생각보다 작아서 조금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델리 국제공항을 막 떠나와서 더 그렇게 느낀 것 같았다.


네팔 비자 발급부터 받아야 했다. '비자 신청서' 자동 발매기에서 어렵지 않게 항목을 채워 넣고 신청처를 발급했다. 창구에 줄을 서서 신청서를 보여주고 비용을 내고 영수증을 받았다. 영수증을 들고 이미그레이션을 통과하면서 여권에 스탬프를 받으면서 비자 발급 과정이 끝이 났다.

여권에 찍힌 'NEPAL'이라는 글씨가 괜스레 두근거렸다. '네팔에 왔구나! 히말라야에 가는구나!' 기대감이 우리를 너무 설레게 했다.



프리 페이드 택시를 신청해서 타고 호텔로 향했다. 바로 '포카라'로 넘어가고 싶었지만 비행 일정이 맞지 않아서 카트만두에서 잠만 자고 바로 포카라로 가기로 한 터였다. 그래서 카트만두의 호텔은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머문다는 동네의 한가운데에 예약을 해 두었었다. 포카라로 넘어가기 전에 호텔 근처를 돌아다니면서 카트만두도 좀 보자는 생각이었었다.





심카드 사기 그리고 타멜 거리 밤길 걷기

*타멜 거리(Thamel Chowk).. 카트만두 배낭 여행객의 거리



택시가 호텔 어귀에 우리를 내려 주었다. 호텔 앞까지 갈까, 여기서 내려줄까 묻길래 내려 달라고 한 우리는 캐리어를 끌고 밤길을 부러 걸었다. 제법 싸늘했지만 춥지는 않았다.

카트만두는 네팔의 수도인데, 호텔은 관광객이 많이 모이는 동네에 있다고 했는데 상가들이 모여 있는 골목길은 너무 어두웠다. 인도보다도 더 후진국이라는 사실을 바로 체감할 수 있었다.


낯선 나라, 낯선 동네의 밤 골목은 너무나 이국적이었다. 머리 위에는 색색깔 네팔의 색들이 나풀거렸고, 골목 양쪽에 늘어선 가게들은 형형색색 네팔의 기념품들이 가득했다. 어두웠고, 사람들은 무채색의 겨울옷을 입어서 칙칙했지만 하늘의 나풀거리는 천조각들과 가게의 빼곡하게 진열된 물건들은 어두운 골목을 밝고 화려하게 감싸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원색의 골목길을 우리도 어두운 옷을 입고 스르르 통과하고 있었다.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우리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이색적인 카트만두의 밤 풍경 속을 제대로 걸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아침이면 바로 포카라로 넘어가야 하는 일정 탓에 카트만두에서의 일분일초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골목 위를 덮고 있는 원색의 깃발은 그곳이 네팔이라고 강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 깃발들을 머리에 이고 골목길을 걸었다. 예쁘고 이국적인 그 풍경을 배경으로 사진도 남겼다. 그때는 그 모습들이 너무 아쉬웠었다. 잠시 머물렀다가 떠날 카트만두였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그랬었다.



그러고 보니 그곳은 더 이상 인도가 아니었다. 목숨과도 같은 휴대폰부터 살려놓아야 했다. 'SIM CARD'라고 크게 적힌 간판을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조그마한 기념품 가게에서 유심카드 교체도 하는 모양이었다. 한국에서는 '유심카드'라고 부르는 것을 인도나 네팔에서는 '심카드'라고 불렀다. 네팔에서 심카드를 사려면 여권과 증명사진이 필요하다는 것은 미리 알고 있었다. 전화번호도 받고, 들어간 김에 네팔 국기가 그려진 냉장고 자석도 하나 구입했다. 주머니에 미국 달러도 좀 있었고, 네팔은 인도 루피가 통용되는 나라여서 환전은 따로 안 해도 되었다.



폰으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게 되니까 두려울 게 없었다. 본격적으로 골목 구경에 나섰다. 9시경이었는데 가게들은 이미 하나둘 문을 닫고 있어서 골목은 사이에 더 어두워져 있었다.


화려하게 장식을 하고 관광객의 사선을 끌려는 자전거 릭샤와 쪼그리고 앉은 담배 파는 아줌마와 자전거 짐칸 위의 바구니에 과일을 예쁘게 쌓아 올린 과일 장수와 간식을 만들어 파는 노점상들만 어두운 거리 한 편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직은 장사를 접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우리에게는 다행인 그들이었다.




길거리 음식이 냄새로도 시각적으로도 맛있다고 표현을 하고 있었다. 계란을 푼 밀가루 반죽을 얇게 펴서 각종 채소를 얹고 소스를 뿌리고 돌돌 말아서 팔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붕어빵처럼 카트만두의 대표적인 길거리 음식인 것 같았다. 두어 걸음마다 보이는 음식이었다.

호기심에 하나 사서 먹어봤다. 꽤 맛있었다. 주문과 동시에 빠르게 움직이는 아저씨의 손놀림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친절한 아저씨 덕분에 네팔에서의 첫 음식은 인상적이고 맛있는 기억으로 남았다.



무작정 골목을 걸었다. 크리스마스 시즌의 카트만두 밤거리는 관광객들로 넘쳤다. 그 속에 껴서 같이 걷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네팔이라는 나라에 우리가 와 있다는 사실과 밤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은 안 났지만 엄연한 사실이었다.

한국어 간판이 꽤 많이 눈에 들어왔는데 대부분 한식당 간판이었다. 한국인들이 카트만두에 많이 관광을 온다는 사실을 그 간판의 한국어 글씨가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며 구경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세상이 깜깜해졌다. 정전이었다. 정전은 인도에서도 잦은 일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너무 당황스러웠다. 그 정전이라는 것이 집이나 가게 같은 실내에서만 겪던 일이어서 길거리에서 맞닥뜨린 정전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첸나이에서 그렇게 오래 살았어도 밤길을 걸어 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그 순간의 정전은 몹시 생소했다. 폰 플래시를 켜고 그 자리에 잠시 멈춰서 있었다. 오래 기다리지 않고 불이 켜졌고, 다시 길을 걸었다.



싸늘한 길을 걸어서인지 남편은 맥주 생각이 난다고 했다. 몸을 데우고 푹 자고 싶었던 것 같았다. 둘러보니 펍은 참 많았는데 대부분이 음악소리 시끄러운 젊은이들로 붐비는 곳이어서 우리는 조용한 야외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그 넓은 곳에 손님은 우리 포함 두 테이블뿐이었다. 걸을 때는 몰랐는데 앉아있으니까 꽤 추웠다. 그 사이에 밤 기온이 더 떨어진 듯했다. 기내에서 본 히말라야 맥주가 병으로 나왔다. 한 병으로 둘이 나눠 마시며 카트만두에서의 밤 한가운데에 앉아있었다.

그곳은 여행지의 낯선 장소였지만 2주 동안의 여행을 하면서 더 이상 낯설지 않은 곳이 된 인도의 여러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다음날이면 익숙해져 있을 그 도시 카트만두의 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호텔로 돌아왔다. 전기난로가 호텔 로비에 있었는데 그곳이 인도는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인도에서는 못 보던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카트만두는 스쳐가는 도시여서 위치만 보고 호텔을 예약했는데 가격 대비 그런대로 괜찮았다. 넓었고 뜨거운 물도 콸콸 잘 나왔다. 인도의 자이살메르 호텔에서 보던 똑같은 온풍기도 달려있었다. 그때는 에어컨이라고 착각을 해서 틀어보지도 않았던 그 물건 덕분에 네팔에서의 첫날을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다.








자전거 릭샤 타고 카트만두 아침 풍경 속으로..


다음 날이 되었다. 창문을 열었더니 꽤 찬 공기가 코끝에 닿았다. 영상 6도라고 스마트폰이 알려주었다. 10년 넘게 열대 도시에서 산 우리에게 영상 6도는 거의 영하 6도로 체감되는 온도였다. 바쁠 예정인 카트만두에서의 둘째 날을 대비해서 조식도 든든히 먹고 내복까지 옷도 든든히 챙겨 입었다.


북인도에서 내내 뿌연 하늘만 보다가 파랗고 쨍한 하늘을 오랜만에 봤더니 비록 공기는 차가웠지만 기분은 상쾌하고 좋았다.


포카라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 호텔을 나서야 하는 시간까지 두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그 두 시간의 아침을 카트만두에서 알차게 보내고 싶었다. 전 날 밤의 촌스럽지만 화려했던 꽃 자전거 릭샤 생각이 났다.

바라나시에서 자전거 릭샤 위에 앉았던 그 기분을 내내 잊을 수가 없었다. 전날에 자전거 릭샤가 자꾸 내 눈에 들어온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호텔을 나서서 골목 끝으로 나가봤다. 밤에 본 골목은 어둠에 가려져서 선명하지 않았다면 아침에 본 골목은 모든 것들이 환하고 진했다. 머리 위를 덮은 색색깔 기도 깃발들도, 가게 안의 물건들도 본래의 짙은 색깔이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화려한 색감이 차가운 공기를 뚫고 기분을 좋게 해 줬다. 카트만두에서의 아침은 싸늘한 찬 공기와 파란 하늘과 원색의 색깔들로 내 머릿속에 지금도 이미지화되어있다. 네팔의 아침은 차가웠고, 파랬고, 알록달록했다. 예뻤고 상쾌했다.




아니나 다를까 부지런한 기사들이 줄지어 세워 둔 자전거 릭샤 앞에서 모닝 짜이를 마시며 차가운 아침 공기를 이기고 있었다. 분홍꽃으로 예쁘게 장식한 맨 앞의 자전거 릭샤를 골랐다. 성격 좋아 보이던 젊은 기사는 첫 손님에게 무척이나 친절했고, 유쾌했다. 1시간 30분 정도 여유가 있다고 설명을 하고 알아서 한 바퀴 돌아달라고 부탁을 했다. 젊은 기사의 책임감이 느껴지는 자신감 있는 '알았다'는 대답과 함께 분홍꽃이 앞장선 자전거 릭샤가 출발을 했다.

따르릉따르릉 골목의 정적을 깨우며 자전거 페달이 돌아갔다.



걷는 사람들보다 조금 위의 시선으로 바라봐지는 카트만두의 아침 골목 풍경은 역시나 컬러풀했다. 가게의 물건도 좌판의 할머니 옷도 그랬다.

자전거 바퀴가 움직이는 속도대로 우리의 시선도 그 도시의 아침 풍경을 스치며 나아갔다.



교복이나 트레이닝복을 입고 학교로 가는 어린 학생들의 빠른 발걸음도 지나고, 등굣길에 구멍가게 앞에 멈춘 귀여운 꼬마도 지나고, 출근하는 네팔인들의 바쁜 걸음도 지나고, 문을 여는 가게도 지나고, 출근길에 기도를 드리는 작은 법당도 지났다.

분주하게 아침을 여는 네팔인들 사이를 외국인 관광객인 우리는 바쁠 것 하나 없이 그들의 삶을 내려다보며 부유하듯이 자전거 위에 앉아서 스르르 떠 다니고 있었다.




릭샤 기사와 이런저런 대화 중에 카트만두에 전날 밤에 와서 오늘 아침에 떠난다고 했더니, 그 젊은 남자가 무척이나 안타까워했다. 카트만두에 좋은 곳이 얼마나 많은데 그냥 가느냐고 내내 같은 말을 되풀이하더니, '보드나트' 사리탑과 비슷하게 생긴 탑이 있다고 그거라도 보고 가라며 어느 탑 앞에 우리를 내려줬다.


카트만두는 우리 여행 일정에서 단지 포카라를 가기 위한 잠만 자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 도시 관광지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었다. '보드나트'가 무엇인지 그때는 전혀 몰랐었다. '부다의 사리탑이 카트만두에 있나 보구나, 그 탑이 유명한가 보구나' 정도가 그 릭샤 기사의 이야기로 추정할 뿐이었다.


사진으로 많이 봤던 티베트 불교 탑이 멀리 골목 끝자락에서 뚱뚱한 하얀색 몸체 위에 뾰족한 황금빛이 빛나고 있었고, 파랑, 하양, 빨강,초록, 노랑의 기도 깃발이 예쁘게 드리워져있었다.

릭샤 기사가 뭔가를 자꾸 이야기하는데 보드나트는 정말 유명하고 꼭 봐야 한다는 말을 되풀이 하며 다음에 카트만두에 꼭 다시 오라는 말도 했다. 이야기가 길어질까 봐 그러겠노라고 대답을 하고서야 탑 근처의 불교 사원 구경을 할 수 있었다.



티베트 불교 사원은 처음 봤다. 사원 건물은 붉은색과 황금색으로 화려했고, 승려들과 신자들이 불교 경전이 적힌 '기도 바퀴'를 돌리며 기도 중이었다.

궁금한 것이 많은 남편은 괜히 그 기도 바퀴도 돌려보고 사원 안도 들여다보며 어슬렁거렸다. 너무 귀여운 동자승이 맨 팔뚝을 드러내고는 추워 보이는데도 열심히 기도 바퀴를 돌리고 있었는데 저 아이는 어떤 생각을 하며 저러고 있을지가 궁금했다.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자꾸 쳐다봤더니 부끄러운지 걸음을 재촉하길래 기도 시간을 방해한 것 같아서 괜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원래 사원 내부 입장은 안되는데 사람이 없는 오전 시간이라며 노 스님이 입장을 허락해 주었다. 우리나라 절 내부와는 많이 달랐다. 복잡한 데다 붉은색이 너무 강해서 편안한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마음이 복잡해지는 것만 같았다.

구경시켜준 대가로 남편은 시주함에 인도 지폐를 넣었다.



불교 사원을 나와서 다시 릭샤 위에 앉았고, 자전거 페달의 속도대로 천천히 천천히 동네 골목을 지났다. 사람 구경이 나는 참 재미있었다. 특히, 털옷으로 감싼 네팔 여자들의 옷차림이 이국적이고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렸을 때 엄마가 털실로 떠서 입혀주던 망토와 기다란 목도리와 방울 달린 털모자 생각이 났다. 그 모습과 똑같아서 너무 정겨웠다.

첸나이의 한식당 주방에서 일하던 네팔 사람들을 간혹 본 적이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네팔 사람들도, 그 나라도 크게 이질감이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날 아침에 그 한식당 주방 아이들의 나라인 네팔에 내가 있었고, 그 나라 사람들을 많이 스치며 만났다.

수십 년 전의 우리나라 모습과도 흡사했고, 그때의 우리나라 사람들과도 비슷했다. 카트만두의 아침 골목길 풍경이 그래서 더 정겹고 좋았다.



릭샤 기사가 짜이 노점 앞에 우리를 내려줬다. 예쁜 아줌마가 리어카를 세우고 뜨거운 짜이를 만들고 있었다. 인도에서 10여 년, 그동안 그렇게 많은 짜이를 마셔 본 우리 입맛에 그 짜이는 단연 최고였다. 릭샤 투어가 기분이 좋게 해 준 이유도 있었지만 홍차 농도와 설탕 배합과 생강가루 양이 딱 우리 취향이었다. 뜨끈한 짜이로 몸을 녹이고 이제 호텔로 돌아가야 했다.



훠이훠이 페달을 밟으면 우리 몸도 함께 흔들흔들, 차가운 카트만두의 아침 공기를 가르며 자전거 릭샤는 좁은 골목길을 사람들을 피해서 잘도 움직였다.

그때는 그런 생각이었다. 카트만두에 많은 유적지가 있고, 유명한 부다의 사리탑도 있다고 하지만 그런 것들을 하나도 안 봐도 전혀 아쉽지가 않다는 생각이었다.

아침 시간 1시간 남짓, 자전거 릭샤 위에서 본 사람 사는 카트만두의 모습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바라나시에서도 그랬고, 카트만두에서도 그랬다. 자전거 릭샤를 탄 그 시간이, 릭샤 위에서 스치듯 바라본 거리 풍경들이, 마주 부는 바람의 감촉과 냄새가 나는 무엇보다 좋았다. 느릿느릿, 흔들흔들 세상 시름 모두 잊게 만들어 주었던 자전거 페달의 속도와 안장의 높이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내 어깨를 비껴가는 거리의 풍경과 조금 아래에 내려다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은 내가 그 풍경 속에, 그 사람들 속에 함께 있지만 따로 인 듯한 이상한 기분이 들게 해 주었다. 그곳에 함께 있지만 나는 이방인이라는 느낌이 자전거 릭샤 위에서의 내 위치와 같았다. 부유하듯 떠 다니던 나는 와국인이었다. 그 사실이 나쁘지가 않았다. 구경하는 그 도시는 좋았지만 살고 싶은 도시는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바라나시도, 카트만두도.



호텔 앞에 도착을 했다. 호텔 바로 건너에 있는 탱화 가게에서 백인 중년 여자가 탱화를 배우고 있었다. 장기 여행객들도 많은 듯 보였다.

우리는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과 여기에 오래 머물 이유는 없다는 생각을 하며 릭샤에서 내렸다. 고마웠던 자전거 릭샤 기사와 기념사진도 남겼다.


카트만두는 밤에 골목길을 걸은 것과 아침에 자전거 릭샤를 타고 동네 구경을 한 것으로 충분했다는 생각을 가지고 서둘러 짐을 꾸려서 포카라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이후에 우리 앞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예상도 못한 채, 카트만두는 그것으로 되었다며 안녕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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