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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의 '포카라' 대신 보드나트의 '카트만두'(2)

인도를 떠나면서 하는 인도, 네팔 여행(14)

by 노랑코끼리 이정아



포카라로 가자. 히말라야로 가자.


드디어 우리 여행의 마지막, 히말라야를 향하는 첫걸음을 떼었다. 인도의 남쪽 땅끝마을을 찍고, 쉼 없이 북쪽으로 올라왔던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히말라야였다.


네팔의 '포카라'에 좋은 호텔을 예약해 뒀었다. 트래킹은 하지 말고 호텔에서 먹고 자면서 '페와 호수' 주변을 산책하며 안나푸르나의 설산을 눈에 담아 오기로 했었다. 좋은 공기,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11년 동안의 인도를 조용히 정리하며 편하게 쉬는 것이 우리 여행의 마지막 계획이었다. 인도의 남쪽 끝을 갔으니 북쪽 끝인 인도의 지붕을 가보자는 것이었다.


여행 같았던 11년의 인도를 '찐'여행으로 끝내자던 그 '찐"여행의 마지막 목적지, 히말라야가 곧 내 눈앞에 펼쳐질 것이라는 부푼 마음이 카트만두 공항으로 가는 택시 안을 달구고 있었다.


12시 비행기에 늦지 않게 공항에 도착했다. 국내선만 들고나는 공항이라지만 여기가 공항이 맞나 싶은 그런 곳이었다.

2009년에 처음 인도 첸나이 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 그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비행기를 타는 곳이 아니라 한국 소도시의 시외버스 터미널 같은 곳이었다. 첸나이는 그 당시에 오히려 국제선보다 국내선 청사가 더 번듯했었는데 카트만두는 국내선 청사가 너무 열악했다. 지금 첸나이는 국제선 청사도 국내선 청사도 최신식으로 지어졌고, 여전히 국내선 쪽이 더 시설이 좋다. 외국인보다 자국민을 더 배려하는 인도를 보았기 때문에 국제선 청사에 비해서 너무 열악한 카트만두의 국내선 청사에 실망이 컸었다.


좁은 실내에 사람들은 너무 많았고, 시끄럽고 혼잡했다. 비행기를 탈 수 있을지, 내 짐을 제대로 포카라에서 받을 수 있을지 의심이 될 정도로 공항은 어수선했고, 일처리는 느렸다.

그래도 예약한 항공사 창구에 한참 줄을 서서 포카라행 항공권도 발급받고 짐도 부쳤다. 들고 있던 배낭에 텍도 달았고 이제는 비행기만 타면 되었다.

한고비를 넘겼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늘 하던 항공권 발급과 수하물 부치기였는데 그곳 카트만두 공항은 그 일이 안도감이 들게 하는 그런 곳이었다.





포카라행 비행기 기다리며 수행.


공항 대합실은 앉을자리가 없을 정도로 여행객들로 가득가득했다. 보딩게이트 앞의 전광판에 뜨는 이름은 거의 '포카라'였다. 다른 도시는 빨리빨리 지워지는데 포카라행은 오전 7시 항공기부터 계속 전광판에 이름이 남아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가 탈 12시 비행기는 '딜레이'라는 글자가 안 붙어서 다행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너무 혼잡한 대합실에 서 있어서 판단력도 흐려졌던 모양이었다. 7시, 8시, 9시 비행기가 딜레이이면, 취소가 아니면 12시도 당연히 딜레이일 것인데 내가 탈 12시 비행기는 딜레이가 안 써져 있다며 안도하고 있었다.


카트만두는 날씨가 너무 좋았다. 그런데 도착지인 포카라에 안개가 많다고 했다. 보통 오전에 안개가 심해도 오후에 걷히는 경우가 많아서 걷히기만 하면 딜레이 된 비행기가 차례로 뜬다고 했다. 그런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그래서 오후까지 일단은 기다려보는 것이라고 했다.

날씨의 문제이니, 희망이 있으니 모두들 불만 없이 그 지겨운 시간을, 그 혼잡하고 열악한 공간을 참고 견디는 듯 보였다. 우리 부부도 마찬가지였다. 희망의 끈을 놓지는 않았다. 전광판에 12시 비행기도 결국엔 '딜레이'라고 뜨는 것이 보였지만 아직은 캔슬이 아니니 희망은 버리지 않고 있었다.


2시가 되고 3시가 되어도 오전 7시 비행기도 이륙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1시 비행기까지 모두 다섯 대의 비행기에 타야 할 사람들이 대합실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전광판에 뜬 것만 그렇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니 대합실은 공기가 탁했고 아수라장이었다.

더군다나 그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는 대합실에 먹을 것 사는 곳은 작은 매점이 전부였다. 입맛도 없었지만 기다리기가 지겨워서 쿠키와 초콜릿으로 심심함을 달래며 생수통만 비워내고 있었다. 그즈음에는 거의 정신줄을 놓고 있었다. 포카라고, 히말라야고 간에 그곳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아까운 시간이 너무 허비되고 있었다.





결국 포카라행 비행기는 모두 캔슬


결국에 오지 않았으면 하는 상황이 오고야 말았다. '포카라행 모든 항공기 캔슬'이었다. 그 많은 여행객들의 애타는 마음도 모른 채, '포카라'라는 도시는 안개가 걷히지 않았고, 그곳에 있던 많은 사람들을 받아주지 않았다. 포카라는 그런 도시였다. 쉽게 히말라야를 내어 주지는 않았다.

페와 호수 아침 산책도, 안나푸르나의 설경도, 호수 뷰의 카페도 결국은 상상 속의 여행으로 끝나 버렸다.


대합실 안이 술렁거렸다. 다음날 일찍 버스로 이동하겠다는 사람들도 있었고, 급하게 다음날 항공편을 알아보는 사람들도 보였다.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틀 뒤에 첸나이로 돌아가서 이틀만 보내고 바로 귀국을 해야 했기 때문에 여행 날짜를 더 늘일 수는 없었다.


항공사 창구 앞에 다시 줄을 섰다. 항공권 취소를 하고 짐을 도로 찾아야 했다. 이미 지쳐있던 나는 그 시간이 또 얼마나 지겹고 힘들었는지 모른다. 남편의 실망감이 더 클 것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당시에는 나를 추스르는 것도 힘에 부쳐서 남편을 챙길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쾌적한 공항이 아니어서 그 시간이 더 힘들었다.


두 주 넘는 배낭여행 동안에 주로 내가 앞장섰고, 남편은 따르는 입장이었었다. 여행 스케줄을 내가 짰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에는 큰 어려움 없이 계획대로 순조로운 여행이어서 그 일이 가능했었다.


내 남편 재발견


우리에게 처음 닥친 큰 변수 앞에서 나는 든든한 남편의 모습을 보았다. 힘든 티를 온몸으로 내고 있던 나와는 달리 남편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이후의 일처리를 해 나갔다. 히말라야는 남편이 원했던 여행지였음에도 그 표정이나 말투나 행동에서 전혀 실망의 모습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런 남편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11년 동안 인도에서 불안해하지 않고 잘 살았던 이유를 발견했다. 여행 내내 '힘들었던 인도 생활을 잘 견뎌줘서 고맙다'라고 말했던 남편이었는데 내가 그럴 수 있었던 데에는 남편의 저런 모습이 지탱을 해줘서 가능했다고 새삼 느끼게 되었다.


어려운 일이 닥치고, 실망하는 순간이 왔을 때 우리는 다른 긍정적인 상황과 마주하게 될 때가 있다. 포카라행 비행기가 캔슬되어서 우리의 인도 여행 마지막 일정이 꼬여버렸지만, 그것 때문에 실망하게 되었고 마음이 상해 버렸지만, 그 순간에 나는 내 남편의 듬직한 모습을 발견했고, 그것이 히말라야보다 더 큰 선물이 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남편은 묵묵히 긴 줄을 기다려서 항공권 취소도 하고, 짐도 다시 찾아왔다. 이제는 포카라에서 카트만두로 돌아오는 항공권과 호텔을 취소해야 했다. 항공권은 남편 회사 인도 직원이 도와줬고, 호텔은 한국에서 큰딸이 한국 아고다에 연락해서 처리가 되었다.



짐을 끌고 공항 밖으로 나왔다. 선택의 길은 없었다. 카트만두에서 2박을 더 하기로 결정을 했고, 우리가 묵었던 호텔에 문의했더니 빈방이 있다고 해서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카트만두 국내선 공항은 끝까지 애를 먹였다. 프리페이드 택시 창구에 담당 직원이 도무지 나타나지를 않았다. 공항이 맞나 싶은 허름한 창구 앞에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할 수 없이 큰 도로변으로 짐을 끌고 나가서 택시를 잡았다. 택시비 흥정을 해야 했다. 첫날 공항에서 호텔로 간 그 가격대로 흥정이 되었고, 마지막일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카트만두 시내로 다시 들어가야 했다.








카트만두 시내로, 그 호텔로 돌아가기


다시 그 호텔의 카운터 앞에 섰다. 공항에서 통화를 했기 때문에 우리 사정을 알고 있던 호텔리어는 '포카라'는 그런 일이 잦다며 우리만 운이 없는 것이 아니라고 애써 위로를 해 주었다. 큰 방만 남았다면서 같은 가격에 그 방을 쓰라고 했다.

인도 남쪽 끝의 깐얀꾸마리와 북쪽 끝의 히말라야는 좋은 호텔을 예약해 뒀었다. 포카라의 취소한 호텔에 비하면 형편없는 방이었지만 업그레이드해 준 룸에 금세 기분이 좋아진 참 단순한 우리들이었다.



다시 짐을 풀고 저녁을 먹으러 나섰다. 점심도 못 먹고 신경만 쓰다가 모든 일들을 받아들이고 나니까 긴장도 풀리고 허기가 졌다. 한국 음식이 먹고 싶었다. 네팔을 거쳐서 내려왔다는 바라나시에서 만났던 한국 청년이 알려준 한식당 생각이 났다. 이름을 기억해 두기를 잘했다며 호텔에서 그리 멀지 않은 그곳을 찾아서 걸었다.


머리 위의 나풀거리는 천연색 천들은 한결같이 카트만두의 하늘을 덮고 있었다. 구글 지도가 가리키는 곳에 한글 간판이 보였다. '한국식당 축제'는 엘리베이터도 없는 3,4층 정도 건물의 꼭대기 층이었다. 돌아갈 수도 없고, 기운 없는 몸을 이끌고 계단을 올라야만 했다.

네팔인이 운영하는 한식당이면서, 히말라야 트래킹도 주선하는 여행사도 겸하는 곳이었다.


아무도 없는 테이블에 우리만 앉아서 된장찌개와 제육볶음을 먹었다. 나물, 멸치볶음, 감자조림, 깍두기, 땅콩조림까지 밑반찬도 한국 백반 식당의 그것과 같았다. 신기해 하면서 그릇을 싹싹 비웠다. 한국 밥을 먹고 났더니 살 것 같았다. 그제야 기운이 났다. 기운이 나니까 기분도 좋아졌다.



배도 부르고 기분도 좋아졌으니 내친김에 기분전환을 확실히 하자 싶어서 쇼핑을 시작했다. 쇼핑이야말로 최고의 기분전환 방법이었다. 비록 다소 허접한 네팔 물건들이었지만 골목을 돌아다니며 물건 고르는 재미가 있었다. 유독 컬러풀한 네팔의 기념품들은 시각적으로 이미 기분을 좋게 해 주었다. 선물용 소소한 기념품들을 사서 호텔로 돌아갔다.


호텔방에서 펼쳐 본 쇼핑 품목들은 하나같이 앙증맞고 귀여운 것들이었다. 작은 것 하나씩 고를 때마다 내 기분이 그만큼 좋아지는 것이 느껴졌었다. 선물을 정리하면서 길었던 하루도 함께 정리가 되고 있었다.

포카라는 잊고 카트만두를 열심히 돌아다녀보자고 마음을 추슬렀다. 카트만두가 우리를 붙잡았다고 믿고 싶었다.









네팔 음식 맛있었다.(음식이 주는 위로)


길었던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이 되었다. 피곤했던 탓에 푹 잘 자고 일어난 아침이었다. 창문을 열었더니 새벽 공기가 꽤 차가웠다. 일기예보부터 확인을 해봤다. 맑을 예정이고, 일교차가 좀 있을 예정이었다.

무엇을 하면서 하루를 보낼지는 아침을 먹으면서 생각을 해보기로 했다. 네팔에 왔으니까 '모모'와 '툭바'를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챙겨 입고 문을 연 네팔 식당을 찾아서 무작정 걸었다.



이제는 그 동네 골목도 웬만큼 익숙해져서 앱지도 없이도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호텔 골목 초입의 부지런한 옷가게 주인은 그 시간에 이미 네팔 국기를 내걸고 장사 준비를 마친 상태였고, 뒤엉켜있던 케이블 선을 정리하는지 골목에는 헌 케이블 선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장식 준비를 하는 중이라고 했다. 타멜 거리(Thamel Chowk)가 의외로 크리스마스 시즌에 관광객이 많이 모인다고 했다. 화려하게 반짝일 골목을 우리는 보지 못하고 떠나야 해서 아쉬웠다.



멀리 나가지 않고 문을 연 깨끗한 네팔 식당을 발견했다. 튀김 만두(모모)와 두 종류의 칼국수(툭바)를 시켰다. 모닝커피를 마시면서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서빙되는 푸짐한 칼국수가 시선을 끌었다. 추운 길을 걸어와서 먹은 뜨끈한 네팔 칼국수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아침 메뉴였다.

맛있는 음식이 주는 위로는 상당했다. 제대로 카트만두를 즐겨보자는 마음이 생기게 했다.



밖으로 나왔다. 마치 우리나라의 '명동'처럼 관광객에게 특화가 된 듯한 그 동네는 네팔 기념품 가게들이 참 많았고, 외국 관광객들이 항상 많이 보였다. 3일째가 되니까 너무 친숙해진 골목길이었다. 그 골목 말고 다른 곳으로 가 보기로 했다.

갑자기 머물게 된 카트만두였다. 전혀 모르는 그 도시에서 알차게 하루를 보내려면 로컬 여행사를 찾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호텔 옆에 보이던 여행사 생각이 났다.







로컬 여행사에 카트만두 투어 신청


실내가 전혀 안 보일 정도로 여행 상품이 유리문에 빼곡히 붙은 여행사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카트만두 주변 하루 투어 코스를 짜 달라고 부탁했다. 여행사 사장은 열심히 메모를 하고 있었고, 벽에 걸린 사진을 구경하던 남편 눈에 히말라야 설산이 보였다. 그곳에 대해서 물었고, 그 사진을 찍은 곳은 히말라야 설산도 보이고 일몰 포인트로 유명한 곳이라고도 했다. 남편이 투어 코스에 그곳도 꼭 넣어 달라고 했고, 그렇게 우리에게 건네진 쪽지에는 네 곳의 유적지와 일몰 포인트, 총 다섯 군데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렇게 70달러짜리 카트만두 하루 투어 코스가 정해졌다.


여행사 사장이 가리키는 반대편 골목으로 나가서 도로변에 주차되어있던 승용차에 올라탔다. 쪽지를 기사에게 건네고 투어가 시작되었다. 오전 10시 30분에 출발해서 저녁 8시에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스와얌부나트 사원(Swayambhunath Temple)


*약 2000여 년 전에 아쇼카왕이 카트만두 일대를 순례한 후에 세운, 네팔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


투어 첫 장소는 일명, '원숭이 사원'이라고 불리는 네팔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 사원이었다. 티켓팅을 하고 들어서는데 작은 연못의 불상에게 동전을 던지는 모습이 보였다. 입구에서 동전 바꾸는 아주머니가 있던 이유가 그것이었다.

차를 타고 한참 올라온 것 같더니 제법 높은 산속에 사원이 있었다. 켜켜이 쌓인 산들이 눈 아래에 내려다 보이는 곳이었다. 그 풍경도 멋졌다.




계단을 제법 올라가다 보니까 눈에 익은 탑이 보였다. 카트만두 시내에서 자전거 릭샤를 타고 가면서 봤던 티베트 불교 사원 앞의 탑(stupa, 스투파)과 같은 모양이었다.

높고 파란 네팔의 겨울 하늘 아래에 흰색과 황금색의 탑은 단연 시선 집중이 되는 형태와 색이었고, 인도 바라나시에서 봤던 불교식 유골 매장 탑과 같은 작은 스투파들도 많았다.

제단에 향불을 붙이며 기도하는 불교 신자들과 우리처럼 구경하는 관광객들까지 제법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관광객인 나는 우리나라 절과는 많이 다른 네팔의 불교 사원과 탑이 그저 신기하고 재미있는 구경거리였다. 파랑, 하양, 빨강, 초록, 노랑 다섯 가지 색깔의 기도 깃발은 예쁜 색종이 장식품처럼 보여서 근엄함이 뚝뚝 떨어지는 스투파를 조금 캐주얼하게 보이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기도문이 내 눈에는 컬러풀한 설치 미술품으로 보였다.

황금탑에 그려진 커다란 두 눈은 우스꽝스럽게 보이다가, 무섭게 보이다가 의미를 알고 나니까 그런가 보다가 되었다. 그래도 타 종교의 내 눈에는 탑과는 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교신자가 아닌 내 눈에는 종교적인 의미보다 미적인 관점에서 자꾸 바라봐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오색 기도 깃발..파랑, 하양, 빨강, 초록, 노랑

(다르딩, Dar Ding 또는 룽따, Lung Ta)

*유골이 안치된 화장묘의 탑(스투파, stupa)

*탑에 그려진 눈(제3의 눈, 지혜의 눈)



한 바퀴 둘러보고 내려오는데 '몽키 사원'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원숭이들이 정말 많았다. 사람들을 피하기는커녕 사람인 양 같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원숭이를 무서워하는 나는 서둘러서 내려왔다. 딸기 장수들이 유독 많이 보였고, 오이를 예쁘게 진열해 놓은 상인과 분홍 솜사탕을 봉지에 담아서 꽃다발처럼 들고 다니며 파는 소년도 보였다.

사원 구경도 재미있었고, 사람 구경도 재미있었다.








PATAN

*PATAN.. 15세기 카트만두 계곡의 3대 왕국(카트만두, 파탄, 박타푸르)중의 하나



파탄 더르바 광장(Patan Durbar Square)


다음 장소는 네팔의 왕국, 파탄의 광장이었다. 티켓팅을 하려는데 큰 금액인 인도 돈 2000루피짜리는 받지 않는다고 해서 하는 수없이 광장 주변의 시장에서 뭔가를 사고 잔돈을 만들어야 했다. 덕분에 재미있는 구경을 하게 되었다. 없는 것이 없는 시장 구경에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귤을 사고 돈을 바꿔서 겨우 입장권을 샀다. 광장이 모두 뚫려 있는데 입장권이 의미가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관광객에게만 부과되는 돈을 정당하게 지불하고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그 광장 안으로 입장을 했다.



매표소 앞에도, 입장 티켓에도 'LALITPUR METROPOLITAN CITY'라고 적혀있었다. 찾아보니 'LALITPUR'는 '아름답다'라는 뜻이라고 했다. 아름다운 '파탄 더르바르 광장'을 기대하며 우여곡절 끝에 15세기 도시 안으로 입장을 했다.



한 눈에도 오래된 건축물들이 광장에 가득했다. 내 취향의 장소라는 사실을 초입에서 알아차렸다. 색감이나 분위기가 그랬다. 오래된 것, 옛 것들에 나는 늘 가슴이 요동친다. 그곳에서도 그랬다.


인도에서 줄곧 돌을 깎아서 지은 건축물만 보다가 나무로 지은 건축물을 오랜만에 보니까 오히려 더 새롭고 특이하게 보였다. 정교하고 예쁘게 조각된 목조 사원들은 우리나라 절과는 다른 아름다움이 있었다. 오롯이 돌을 조각해서 쌓아 올린 건축물도 있었다. 불교 사원 사이의 힌두교 사원이었다.


쨍한 햇볕 아래의 다양한 형태의 네팔의 옛 건축물들 사이를 걷다 보니까 우리도 마치 그 시대의 사람이 된 듯했다. 인위적인 것은 하나도 없었고, 그 시대 그 건물 그대로 그 자리에 놓여있었고 사람들이 그 시대 안으로 들락거리고 있었다. 우리도 그들 중의 누군가였다.






PATAN MUSEUM (파탄 박물관)


따로 입장권을 끊고 박물관 구경을 했다. 3층짜리 가옥 하나를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 안의 유물 구경만큼 그 집의 내부 구조도 신기했다. 힌두 유물, 불교유물, 볼 것도 많았고 박물관 창을 통해서 내려다 보이는 바깥 풍경도 좋았다. 옛 유적지를 중심으로 시장과 식당과 게스트하우스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데 그 풍경은 현재의 사람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광장의 건축물과 박물관의 유물은 조상들의 영역, 그 둘레는 후손들의 영역이었다.


박물관 뜰에는 예쁜 카페도 있어서 다리품을 잠시 내려놓기에 좋을 장소였다. 우리는 1시간 안으로 나오라는 운전기사의 부탁이 있어서 카페에 앉을 여유는 아쉽게도 없었다.






공동우물 '망가히티'


박물관을 나와서 다시 광장을 둘러보았다. 특이하게 생긴 우물이 보였다. 파탄이 처음 형성되었을 당시에 만들었다는 공동 우물은 지금도 시민들이 사용하는 우물이라고 해서 가까이에 가서 살펴보았다. 수 백 년 전에 사용했던 우물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여전히 그곳에는 깨끗한 물이 콸콸 나오고 있었다. 그 옛날의 조상들이 마시던 물을 후손들도 사용한다는 사실이 나처럼 그때도 이 길에 사람이 돌아다녔겠다는 상상을 하게 해 주었다.



파탄 더르바르 광장을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차를 타고 여행사 사장이 종이에 적어준 나머지 장소로 이동을 했다. 더 머물고 싶은 장소였지만 정해진 스케줄이 있어서 그럴 수는 없었다. 이후에 갈 다른 더르바르 광장이 훨씬 근사하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그곳을 떠나는 것이 그때는 많이 아쉬웠었다.


카트만두에서 자전거 릭샤를 몰던 청년이 꼭 가봐야 한다던 '보드나트 스투파'와 카트만두 계곡의 3대 왕국 가운데 또 다른 한 곳, '박타푸르 더르바르 광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히말라야 설산이 보인다는 일몰 포인트, '나가르코트 전망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정에 없던, 이름도 생소했던 카트만두 주변 관광지는 준비 없이 하는 여행도 나름 재미있다는 경험을 하게 했다. 차에서 내리면 생소한 어느 유적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그곳이 어떤 곳인지 잘 알지 못한 채 마치 탐험을 하듯이 헤집고 다녀야 했다. 그곳이 옛날 왕국이어서 더 그랬던 것 같았다. 그런 여행도 새롭고 좋았다. 선 관광, 후 검색. 재미있는 여행이었다.


그즈음에 우리는 '포카라'라는 지명은 깨끗이 잊고 있었다. 카트만두 주변의 옛 네팔 왕국에만 관심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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