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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코끼리 이정아 Sep 19. 2022

갠지스강이 흐르는 삶과 죽음의 도시 '바라나시'(2)

인도를 떠나면서 하는 인도 여행(13)



차창 밖의 바라나시 거리 풍경


 여러 생각을 하게 했던 갠지스강의 아침 풍경 속에서의 산책을 끝낸 우리는 간단하게 조식을 먹고 약속 시간에 딱 맞춰서 와 준 택시를 타고 바라나시 투어에 나섰다.


 택시 안에서 차창 밖으로 바라본 바라나시의 거리 풍경은 각종 탈것들과 오래된 낡은 건물들 어지럽게 달린 간판들로 어수선하고 혼잡했다. 사람 구경을 좋아하는 나는 그 혼잡한 거리 풍경 속에서 사람들을 찾아서 관찰하며 택시 안의 심심한 시간을 보냈다.


 거리의 사람들은 남인도 첸나이에서 보던 인도 사람들과는 생김새도 달랐고 옷차림도 달랐다. 이목구비가 좀 더 뚜렷하고 서구적이었다. 여자들이 입은 사리는 머리까지 온통 감싸고 있어서 천을 어깨까지만 걸치는 첸나이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옷처럼 느껴졌다. 남자들의 모자나 두건, 니트조끼도 신기한 복장이었다. 여름만 있는 내가 살던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그들의 모습이 나는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10여 년을 인도에서 인도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았어도 다른 나라에 온 듯했다.

경적 소리가 시끄럽고, 차는 막혔지만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이 그런 불편한 것들을 많이 덮어주었다.



  자전거 릭샤들도 사람들이 타고 있어서 그 사람들을 구경하느라 더 눈길이 갔다. 릭샤왈라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 마르고 나이가 들어 보여서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릭샤와 그 운전수가 왜인지 많이 닮아 보였다.

 

 힘들까 봐 안타는 것보다 타 주는 것이 그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얘기가 생각이 났다. 슬리퍼 위에 얹힌, 페달을 밟는 깡마른 가장의 발에 가족의 밥과 자녀들의 미래가 달려 있다는 생각에 그 발은 뼈가 앙상했지만 강인해 보였다.

첸나이의 우리 집 메이드 아줌마의 발을 보며 내가 늘 느꼈던 감정을 릭샤 페달 위의 그들의 발에서 똑같이 느꼈다.






 '바라나시'라고 하면 '갠지스강'이 떠오르고, '갠지스강'이라고 하면 '힌두교인'들의 목욕과 화장터가 떠오르는 것이 보통이다. 나 역시도 그랬고, 바라나시 여행에서는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택시 기사가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불교 유적지였다. 바라나시에는 석가모니가 처음 설법을 한 장소가 있고, 그 주변으로 세계 각국에서 설립한 불교 사원이 수 백개가 있다고 했다. 뮤지엄도 볼 만하다고 했다.




물라간다 꾸띠 비하르

(Mulagandha Kuti Vihar)

*불교의 4대 성지 중의 하나인 사르나트(sarnath ; 부다의 첫 설법 장소)에 있는 현대적인 불교 사원


 사르나에는 중국, 일본, 네팔, 스리랑카 등 전 세계의 불교가 들어와서 수많은 사찰이 건립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불교만 제대로 된 사찰이 그곳에 없어서 조계종에서 한국 사찰을 건립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지금쯤 건립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멀리 건물이 보이는데 '절'에 대한 고정관념이 또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한국, 중국, 일본 등의 목조 건축물을 상상하며 걸어 들어간 그곳에는 분명히 불교 사원이라고 했는데 작은 성 같은 것이 나타났다.

돌로 건축한 불교 사원이 처음에는 좀 생소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우리나라 절이 예쁘듯이 인도의 불교 사원도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이 기증했다는 거대 종이 사원 입구에 매달려 고, 법당 안에는 실물 크기로 설법하는 모습의  황금 부처상이 있는데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있다고 했다. 벽에는 일본 화가가 그린 부다의 생애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

 바닥은 대리석이고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있는 건물은 내 선입견 속의 절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부처님에게 불공을 드리는 사람들이 그곳이 불교 원인 것을 납득시키고 있었다.


 법당 안에서 바라나시에 온 이후로 처음으로 한국인들을 봤다. 불교신자들로 보이는 한국 아주머니들이 시주도 하고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멀리 인도까지 오게 만드는 그녀들의 불심이 놀라웠다.



 사원의 뜰에는 보리수나무가 많았는데 2500년 전에 부다가 깨달음을 얻은 장소인 '보드가야'의 보리수 종자를 가져다가 키운 스리랑카에서 옮겨 심은 것이라고 한다. 바닥에 떨어진 보리수잎을 주워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인도에는 보리수나무가 참 많다. 내가 살던 첸나이에는 일 년 내내 여름이다 보니 덩치가 큰 보리수나무들이 줄기에서 뿌리를 내리고, 다시 새 나무가 자라서 신기한 형상을 하고 있다. 그 아래에 앉아있으면 깨우침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머리가 너무 복잡해질 것 같은 그런 모습이다. 거대하고 치렁치렁하며 음습한 느낌을 나는 많이 받았다.

그런데 그곳의 보리수나무는 부다가 깨달음을 얻은 그 나무라고 하니 '의미'가 주는 '근엄함'을 찾게 되고, 나도 이파리 하나 주워서 책갈피로 사용해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천을 하지는 않았다.





박물관(museum)


 사르나트 발굴지로 넘어가면서 근처의 박물관부터 들렀다. 사르나트와 박물관, 두 곳의 티켓팅을 같은 예매창구에서 한 장으로 동시에 했다.

 

 나지막한 ㄷ자 형태의 석조건물인 박물관은 내부 사진 촬영이 일절 허용되지 않는 곳이었다.

아소카 사자상이 있는 공간을 중심으로 불교 유물관과 힌두교 유물관이 나뉘어 있었는데, 많은 유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었고, 인도가 맞나 싶게 깨끗했고 쾌적했다.

볼만한 가치가 있는 유물들상당히 많았다. 우리나라 박물관의 부처님과는 다르게 생긴 그곳의 부처님이 실제 석가모니와 오히려 더 닮았을 것이 분명했다.







사르나트(Sarnath)


 사슴이 뛰어놀았다고 해서 한자어로 '녹야원'이라고 불리는, 석가모니가 처음으로 설법을 펼친 장소라고 한다.

'보드가야'보리수나무에서 약 250km 떨어진 이곳까지 왔다고 하는데 힌두교 성지인 갠지스강에서는 20km 거리라고도 한다.


 바라나시에는 힌두교 성지인 '갠지스강'과 불교 성지인 '사르나트'까지 있으니 관광객들이 길에 차고 넘칠만했다. 갠지스강 주변에는 인도인들이, 사르나트 주변에는 중국인들이 많은 이유였다.


 사르나트 발굴지에 들어섰더니 큰 보리수나무 아래에 예쁜 꽃들이 많이 놓여있었다.

이곳의 보리수는 불교 신자들에게는 의미가 다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타 종교인인 나는 보리수나무 밑동에 칠해진 하얀색 페인트와 분홍꽃이 예쁘게 조화롭다는 생각을 하며 발굴지 구경에 나섰다.


 

 르나트 불교 발굴지생각보다 꽤 넓었다. 초록 잔디 위의 부서진 수많은 스투파(탑)들은 마치 폐허가 된  마을 같기도 하고, 조각 공원 같기도 했다. 내 시선에는 불교 유적지의 개념보다는 시간이 멈춘 옛 도성처럼 보였다. 분위기가 꽤 좋았다.

남편과 둘이서 쉬엄쉬엄 걸으며 사람은 많았지만 워낙 넓어서 고즈넉했던 그곳을 산책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곳이 있어서 궁금해서 다가갔더니 아소카왕의 조칙이 새겨진 석주(Ashkan pillar)였다. 귀중한 유산인지 깨어진 돌기둥들이 유리벽에 둘러쳐져 있었다.






다메크 스투파(Dhamek Stupa)

*스투파(stupa)= 화장 후의 유골을 묻는 탑


 초록 들판의 작은 스투파들 너머에 누가 봐도 범상치 않은 큰 돌탑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까 사람들이 그 돌탑 주변을 돌고 있었다. 장관이었다. 사람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작은지 돌탑의 크기에 놀라서 나도 모르게 큰 탑 앞으로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아소카왕 때 세운 부처의 사리탑이라고 한다. 뾰족한 다른 탑들과 달리 외관상으로도 특이한 형태라고 생각했는데 '실린더 모양'의 이런 탑 형태가 드물다고 한다.

높이 42m, 직경 28m의 거대 탑 주변으로 단체 관광객으로 보이는 중국인 불자들이 합장을 하고 기도를 하며 탑돌이를 하고 있었다.

 

 탑 근처의 잔디밭에 네팔인 불자들이 보리수나무에 알록달록 무언가가 적힌 천을 매달고 '다메크 스투파'를 향해서 쉼 없이 절을 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에 '갠지스강'에서 본 '힌두교인'들과 그 시간에 사르나트의 '다메크 스투파'에서 본 '불교 신자'들은 그들이 믿는 신이 다르고, 종교의식이 다를 뿐 내 눈에는 무언가를 바라는 간절함은 똑같아 보였다.

바라나시는 '인간과 종교'에 관한 생각을 자주 하게 만들었다.


 

  바라나시에 부처의 첫 설법 장소가 있다는 것도, 그렇게 큰 사리탑이 있다는 것도 생소했다. 몰랐기 때문에 기대를 안 한 장소는 흥미가 상당했다.

'바라나시는 갠지스강', '바라나시는 힌두교 성지'라는 공식의 선입견이 깨지면서 무척 흥분되고 신기한 감정을 경험했다.

미리 공부하지 않고 떠나는 여행도 의외로 좋은 면이 많았다.


 사르나트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특별한 장소였다. 내가 좋아하는 자연과 유적지가 함께 있는 장소여서 그랬던 것 같았다. 종교가 다른 나에게도 훌륭한 관광지였다. 나중에 보니까 남편과 둘이서 기념 셀카를 유독 많이 찍은 장소가 그곳이었다. 조용하고 편안했던 이유가 아닐까 싶다. 사진에 그 분위기를 남기고 싶었던 것 같았다.







차우칸디 스투파(Chaukhandi Stupa)


 택시 기사가 호텔로 돌아가자며 빠르게 속도를 냈다. 그런데 밖으로 범상치 않은 형태의 돌탑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 가보자며 택시를 세웠다.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고 인도에 와서 다섯 수행자를 처음 만났던 장소에 세워진 '영불탑'이었다. 공원으로 조성해 놓아서 탑 구경도 하고 산책도 했다. 조용한 그곳은 젊은 커플들의 데이트 장소로 이용되고 있었다. 공원 구석구석 남녀 커플들만 보였다. 하긴 우리 부부도 커플이기는 했다. 비록 젊은 커플은 아니었지만.


 외국인 입장료가 좀 비싸다는 생각을 하며, 티켓팅은 안 해도 되었겠다 싶었다. 택시 기사가 만류할 때 말을 들었어야 했다. 불교신자도 아닌데 250루피를 지불하고 굳이 들어가서까지 볼 필요는 없는 곳이었다. 밖에서도 그 탑이 보였기 때문이다.

바라나시 여행 중에 갠지스강 주변이 너무 혼잡하고 시끄러워서 잠시 조용히 쉬고 싶다고 생각될 때, 짬을 내서 가보면 좋을 장소이기는 했다.








'철수 카페' 가는 길


 점심시간이 되었다. 바라나시에 오기 전에 유일하게 찾아본 이 인도인이 운영하는 한식당 정보였다. 한국인 여행객이라면 누구나 아는 '철수 카페'에 가 보기로 했다.

구글 맵에서 가리키는 그곳은 갠지스강 바로 근처였다.

낮에도 여전히 갠지스강 방향으로 가는 길은 체증이 많이 심했고, 한참만에 택시가 우리를 내려 준 곳은 혼잡한 어느 도로변이었다.



 구글맵이 가리키는 대로 길을 걸었다. 강 바로 근처인 것 같은데 강의 반대쪽에서 자꾸 골목으로 걸어가라고 했다. 덕분에 바라나시 골목길 구경을 할 수 있었다. 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걸으며,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 사는 구경을 실컷 했다.


 역시나 소들도, 개들도 골목에 진을 치고 있었고, 집 앞에 나와 앉아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묵고 있는 저렴한 게스트하우스도 많이 보였는데 그중에는 어설픈 한국어 간판도 종종 있었다. 스카프가 색색깔 예쁘게 걸려있는 옷 가게와 제법 신선한 채소가게와 작은 슈퍼까지, 골목 안에는 꼭 필요한 가게들이 있어서 동네 주민들은 관광객들로 복잡한 큰길까지 굳이 안 나와도 되겠구나 싶었다.






철수 카페


 강 쪽으로 좁고 지저분한 골목을 한참 동안 걷다 보니까 반가운 이정표가 보였다. 숙박시설이 많이 모여있는 구역에서 '철수 카페'라고 가리키는 화살표를 따라서 걸어 들어갔다.

한국음식이 맛있다는 후기를 많이 봐서 잔뜩 기대를 했는데 식당이 가까워질수록 골목은 점점 더 지저분해졌다. 개똥, 소똥이 발에 밟힐 정도로 많았고, 하수구 냄새도 심했다.

겨우 참고 철수 카페 문 앞에 도착을 했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생각보다 좁고 허름한 식당이었다. 벽에는 없는 게 없는 한국음식 메뉴판이 걸려있었고, 철수 씨 사진과 한국 여행객들이 남긴 철수 씨에 대한 고마움이 담긴 손편지들이 붙어있었다.


 인도에, 그것도 쉽게 가게 안 되는 바라나시에 그런 식당이 있다는 사실이 그 안에 앉아서도 믿기지 않고 이상하기만 했다.




 철수 씨 와이프가 주문을 받으러 나왔고, 철수 씨가 인사를 하러 나왔다.

오지 여행가 한비야 씨가 그 옛날에 바라나시에 처음 왔을 때, 갠지스강에서 탔던 배의 뱃사공이 철수 씨라고 다. '철수' 한비야 씨가 지어준 한국 이름이라고도 했다.

이후에 한비야 씨가 유명해지면서 한국에서 철수 씨도 유명해졌고, 영특한 철수 씨가 한국어, 일어까지 공부해서 갠지스강 투어 가이드를 하면서 배도 여러 채 가지게 되었고, 와이프가 한식을 배워서 당도 하게 되었다고 설명을 해주었다.

한국말을, 서울말을 또박또박 나보다 더 잘하는 철수 씨가 너무 신기했다.



 열흘만에 한국음식을 실컷 먹었다. 인도 아줌마의 솜씨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거의 한국 맛 그대로였다. 라면은 맛이 다를 리가 없었고, 김치볶음밥과 김치전도 거의 비슷한 맛이 났고, 재료가 달라서 조금 맛이 덜한 김밥은 라면 국물에 적셔서 먹으면 되었다. 배추김치, 깍두기도 너무 반가웠고, 오이무침은 꼭 내가 만든 듯했다.

한국음식 한동안 안 먹고도 살 수 있는 우리였지만 라면은 국이었고, 매운 한국 음식은 그동안의 여독을 말끔히 씻어 주었다.



 저녁 보트 투어 예약을 해놓고 갠지스강 쪽으로 내려왔다. 골목에서 이번에는 원숭이 떼와 마주쳤다. 새끼 원숭이들은 길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주워 먹고 있느라 우리는 신경도 안 쓰는 눈치였는데 우리만 그 원숭이들이 불편했다. 다 먹고 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었다.






낮의 갠지스강


 걷다 보니 강이 보였다. 대낮의 갠지스강 주변 풍경은 아침과는 또 달랐다. 오히려 조용했고, 사람들도 아침에 비해서 많지 않았다. 가트 계단에 앉아서 쉬는 사람들, 바닥에 누워서 자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이른 아침에는 힌두교인이 많았다면 그 시간에는 관광객들이 많았다. 제사 지내고 기도 해주는 브라만 제사장들의 좌판이 비어있어서 덜 혼잡한 것 같았다.



 배들은 모두 정박해 있었고, 강물 위는 그래서 더 고요했다. 간식거리 노점들도 아침처럼 장사가 잘 되지는 않았다. 관광객들만 삼삼오오  주변에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닐 뿐이었다. 갠지스강은 낮이 오히려 밤 같았다.




 밤의 갠지스강을 기대하며 호텔로 걸어갔다. 길에는 사람들이 빼곡히 밀려서 어디론가 걷고 있었고, 우리도 그들과 함께 걸어서 도로변까지 나왔다. 그곳은 사람이 적을 날이 아마도 없을 것 같았다. 밤에도, 아침에도, 낮에도 길에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깨끗이 청소가 된 호텔 우리 방에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피곤이 몰려왔다.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바로 곯아떨어져서 낮잠을 밤잠처럼 다. 아침부터 너무 많이 걸었고, 오랜만에 한식을 배불리 먹어서 그런 것 같았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철수네 보트 투어를 하러 갠지스강으로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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