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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코끼리 이정아 Oct 03. 2022

도금 수저


딸 이야기


큰딸이 언젠 우스갯소리로 한 이야기가 있다. 그때는 그저 재미있다며 웃어넘긴 말이었는데 가끔 그 생각이 나서 씁쓸해질 때가 있다.

"내가 미국 뉴욕에서, 그것도 미대를 나왔다고 하면 사람들이 내가 금수저라고 생각하는데 그럴 때마다 말하지. 난 '도금 수저'라고. 하하하"

어릴 때부터 엉뚱한 면이 많았던 딸이 뱉은 '도금 수저'라는 단어가 얼마나 적절한 표현이던지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이해가 되어서 더 웃었던 것 같다.


자동차 관련 중견 기업주재원이었던 아빠를 따라서 인도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닌 딸은 한국에서는 교육청 수학 영재로 뽑혀서 따로 교육을 받을 정도로 공부에도 재능이 있었지만 인도에서 살면서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그림으로 진로를 결정했고, 남편과 나는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인도에서 한국의 소위 괜찮다는 미대 진학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공부로 가는 학과보다 미술학과는 진학의 문이 너무 좁았기 때문이다. 수시는 해외고 출신을 거의 안 뽑았고, 정시는 수능 준비가 안되니 갈 수가 없었다. 잘못하면 공부 잘했던 딸을 서울 중하위권 미대에 보내게 될지도 몰랐고, 엄마 마음은 편치가 다.


그러던 중에 딸 학교로 진학설명회를 온 미국 어느 미대에서 딸의 그림을 보고 꼭 지원을 하라고 했다. 미국에 돌아가서도 메일을 보내길래 미국 대학의 가능성을 보게 되었고, 미국 미대를 급하게 알아보기 시작했다. 알아본다는 것이 미국 미대 유학원 사이트를 뒤지는 것이었고, 딸은 미국 미대 홈페이지를 는 일이었다.


학교와 집에서 그리고 한국 선교사님 학원에서 조금씩 그려 둔 그림을 포트폴리오제출을 했다. 거실 바닥에 그림을 펼쳐서 찍은 사진으로 만든 포트폴리오였다. 부랴부랴 토플과 SAT 점수도 맞췄다.


우여곡절 끝에 학생 장학제도가 있는 뉴욕의 미대에 모두 원서를 제출할 수 있었고, 전액 장학금 제도가 있는 학교는 없어서 그 가운데 가장 장학금을 많이 준다는 학교에 진학을 했다.  학교 유학생 최고 장학금을 받았지만 나머지 학비와 기숙사비, 생활비도 만만찮았다. 그래도 자식이 하고 싶은 공부는 최대한 뒷받침은 해줘야 하는 것이 부모의 도리라는 생각으로 공부를 시켰었다.

연년생 동생은 한국 대학으로 진학을 하기로 했기 때문에 한 명 유학비는 크게 부담은 되지 않았다. 주재원 월급이 한국보다 조금 나은 편이어서 다행이었다.


아빠가 보내 준 용돈이 부족하지 않았을 텐데 딸은 교내 알바와 중학생 때부터 하던 인터넷으로 그림을 파는 일도 쉬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소위, 금수저들과 같이 지낸 4년 동안 상대적으로 수저 색깔을 알게 된 것 같았다. 씀씀이부터 다른 금수저들을 본 딸의 눈에 자신은 그저 평범한 가정의 딸이었고, 아빠가 쉽게 부담해도 되는 금액의 유학비는 아니라고 느꼈던 것 같았다.


주재원으로 사는 동안에 딸의 유학비가 부담되는 정도는 아니었는데도, 과제가 많아서 힘들다는 딸이 알바까지 하는 것이 아빠 마음에는 안 들었지만, 자기 결정이니 반대하지는 않았다. 열심히 산 딸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했고, 용돈을 모아서 귀국을 했고, 자신을 원하는 회사를 선택해서 직장인으로 성실히 살고 있다.


"왜 내가 금수저로 보이지? 내가 좀 있어 보이게 생기긴 했지! 하하하하" 털털한 성격의 큰딸이 하는 말이다.

요즘 20대들처럼 외모 치장에 투자를 많이 하지 않는 편인 딸은 그 흔한 명품가방 하나 사려고 들지 않는다. 실용파 딸은 옷도 중저가, 가방도 지 눈에 예쁘면 그만이다. 미용실 가는 일을 세상 귀찮아한다. 다행히 피부가 깨끗하고 흰 편이라 화장만 조금 하면 지 말대로 좀 있어 보이기는 한다. 콩깍지 엄마 눈에도 그렇게 보인다.


도금 수저 얘기를 한참 하고 있는데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작은딸이 정색을 하고 한마디 거들었다.

"우리 정도면 14K 정도 되는 거 아냐? 도금은 아니지. 도금은 벗기면 은이나 동일 건데 그건 아닌 듯. 우리 정도면 감사하고 살아야 해. 내 친구들 중에 한국 대학 학비도 부모님께 지원 못 받아서 학자금 대출 내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재미있다며 꺼낸 도금 수저 얘기가 작은 딸이 끼어들면서 갑자기 진지한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사실이다. 우리 딸들 정도면 '14K 수저' 정도는 되는 것이 맞다.  걱정 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아빠의 지원으로 뭐든 하면서 살고 있지 않나! 큰딸도 월급 많은 대기업을 마다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며 직장을 선택한 것도 돈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는 증거이고, 의논도 없이 취업대신 대학원을 결정한 작은딸도 같은 맥락이다.




나의 이야기


나야말로 진정한 '도금 수저'였다. 그때는 금수저라는 말 자체가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랬던 것 같다. 언니들이 많아서 교복자율화 새대였던 나는 꽤 괜찮은 옷을 입고 다녔었다. 친구들이 보기에 부잣집 딸로 보였을 그런 옷들이었다. 직장을 다니는 언니들이 월급을 쪼개서 할부로 산 백화점 옷도 입었고, 언니들끼리 돈을 모아서 산 브랜드 운동화와 청바지도 신고 입었었다. 죠다쉬 청바지, 나이키 운동화, 아디다스 가방, 언니들과 교대로 사용하던 것들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어느 늦은 봄날이었다. 내 뒷자리 아이가 반 친구 몇 명을 자기 집에 초대를 하는 일이 있었다. 그 초대 기준을 잘 알 수 없었지만 서로 친하지 않은 네댓 명이 그 아이의 초대로 어색하게 같이 모였다.


토요일 오후, 자가용이 많이 없던 그 시절, 교문 앞에 검은 승용차가 있었고, 우리는 그 차를 타고 그 아이 집으로 갔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대궐 같은 저택이었다. 그날이 그 아이 생일이었고, 엄마가 친구를 초대하라고 했던 모양이었다. 대문에서 마당까지 한참 계단을 올라갔는데 눈에 펼쳐진 마당엔 잔디가 깔렸고, 하얀 토끼가 뛰어다녔다. 연못에는 잉어가 가득했다. 넓은 거실에는 그 당시에 유행하던 나무뿌리로 만든 번들거리는 커다란 테이블이 눈에 띄었다.

3층의 그 아이 방으로 올라갔다. 침대와 가구가 한눈에도 비싸 보이는 것으로 세트로 놓여 있었고, 커튼도 침구도 레이스가 나풀나풀 공주방을 연상케 했다. 형제가 많아서 내 방은 꿈도 못 꾸던 내 눈에 그 방은 꿈의 방이었다.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었던 것 같은데 음식 기억은 하나도 없고, 넓은 정원의 초록 잔디와 하얀 토끼가 내내 생각나던 집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어느 큰 회사의 사장님 딸이었다. 좀 많이 뚱뚱한 편이고 조용한 성격이어서 반에서 크게 존재감이 없던 아이였는데 도우미 아줌마와 정원사와 운전기사까지 있는 부잣집의 딸이었다.

친구도 많이 못 사귀었던 아이가 갑자기 초대한다 해서 호기심에 따라 간 집에서 부자들이 사는 모습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나는 이후로 그 아이와 가깝게는 지냈지만 사는 형편이 너무 다른 우리가 찐 친구는 될 수가 없었다. 내 차림새를 보고 그 아이가 오해를 했던 게 분명했다. 고1 때까지는 공부도 제법 했고, 예쁘단 소리도 좀 듣던 때였다. 그런 아이가 집도 좀 사는 것 같으니까 친구가 되고 싶었던 것 같았다. 자꾸 우리 집에 놀러 오고 싶어 하던 그 아이와 결국 2학년이 되면서 문이과로 갈라져서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나와는 다른 세상의 아이가 부담이 되었는지 오히려 잘 되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다이아몬드 수저였던 그 아이 눈에 나도 금수저쯤으로 보였을까? 벗겨내지 않으면 금으로 보였을 그 도금 수저를 벗겨내면 은이 나왔을까? 동이 나왔을까? 지난 일은 모두 좋은 포장의 기억으로만 남은 나는 아마도 은은되지 않았을까 믿고 있다. 내 어린 시절이 그 정도는 되었기를 바라는 마음이 작용한 모양이다.


큰딸의 도금 수저 이야기에 내 어릴 적 생각이 났고, 나는 도금 수저였지만 딸들에게는 14K 정도 되는 수저는 줄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생각에 미쳤다.


딸들아! 순금보다 14K가 훨씬 단단하고 예쁜 거 알지? 조금 더 예쁜 18K였으면 좋았겠지만 그건 너희가 만들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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