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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수 Dec 31. 2020

할리갈리의 종

첫 번째 이야기


할리갈리라는 보드게임이 있다. 룰이 매우 심플하다. 각자 일정 수량의 카드 더미를 받는다. 필드의 중앙에는 종이 있다. 카드 더미는 앞면이 안 보이도록 쌓아둔다. 그다음 순서대로 한 사람씩 카드를 뒤집어 오픈한다. 카드 앞면에는 라임, 바나나 같은 과일 그림이 있다. 과일은 한 개 일 수도 있고, 두 개 또는 다섯 개 일 수도 있다. 그렇게 차례차례 카드를 뒤집다가 필드에 깔린 과일 중 어떤 종류라도 총합이 5가 되면 가운데에 놓인 종을 울린다. 가장 먼저 종을 친 사람은 필드에 있는 모든 카드를 가져와 자신의 소유로 만든다.


단순해 보이지만, 막상 해보면 매우 흥미진진하다. 필드에 깔린 과일의 수를 읽느라 눈동자가 바쁘고 가슴이 뛴다. 이 게임의 묘미는 재빠른 수 읽기와 종을 어느 타이밍에 치느냐에 달려있다.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으며, 정확한 계산으로 재빨리 종을 쳤을 때의 쾌감은 굉장하다. 가장 먼저 종을 친 승자는 손등을 얻어맞기도 한다. 뒤늦게 종을 치려는 미련 섞인 손바닥이 언제 있기 때문이다. 손등이 빨갛게 변할 만큼 아프지만, 종을 쳤다는 기쁨에, 필드에 깔린 카드가 모두 내 것이라는 쾌감에 통증을 잊게 된다. 때앵! 역시 할리갈리의 상징은 종이다.


두 번째 이야기


요즘 아내가 단행본 작업 중이라 새벽까지 원고를 붙들고 있다. 어제는 커피를 마시고 새벽 세 시까지 노트북 자판을 두드렸다. 전날 무리한 탓인지 오늘은 둘째 낮잠을 재우다 본인도 푹 자버렸다. 그것도 쿨쿨. 그런데 정시 취침을 한 첫째 입장에서는 에너지가 넘치는 오후 나절을 엄마가 이불속에서 낭비하고 있으니 견딜 수 없는 모양이었다. 엄마를 힘껏 흔들고, 휴대폰 알람을 맞춰 귓가에 대보기도 하지만 아내는 요지부동. 지친 첫째는 망연자실 천장만 바라보았다. 그러다 뭔가 떠올랐다는 듯 장난감 방으로 뛰어갔다. 그녀가 가지고 온 것은 할리갈리의 종이다. 온 집안사람들이 그 맑고 고운 소리를 듣기 위해 눈을 희번덕거리는 바로 그 종.


땡! 엄마 일어나!

땡 땡! 엄마 제발 좀 일어나! 흑흑


종을 수 백 번 누르고 때려도 아내는 일어나지 않았다. 피곤한 동생도 잠만 계속 잤다. 할리갈리 종이 이렇게 지독한 무관심 속에서 슬픈 울음소리를 내는 장면은 나로서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지리산 화엄사 주지 스님이 아끼는 목탁이 삼류 노래방 반주용으로 쓰이는 장면을 본 것인 양 기분이 이상해졌다. 할리갈리의 종이 저런 대접을 받을 물건이 아닌데...... 나는 명예를 잃어버린 어떤 물건의 울음소리 견딜 수 없어서 암막 커튼을 활짝 걷어 방을 밝게 만들었다. 이내 아내가 일어났다. 첫째는 곧 쾌활해져서 평화를 되찾았다. 나는 아내가 드디어 일어난 사건보다 할리갈리의 종이 엉뚱한 역할을 수행하느라 고역스럽게 노동하는 장면을 보지 않을 수 있어서 더 마음을 놓았던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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