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학교의 맛

늑약과 특약 사이

by 이준수

종업식을 앞두고 생활기록부 점검에 들어간다. 오류 및 입력 누락을 방지하기 위하여 촘촘한 확인 체계가 작동한다. 1차로 담임이 내용을 입력하고 이후 점검이 이어지는데 2차는 동학년 교사, 3차 연구 부장, 4차 교감 최종 확인을 거쳐 마무리한다. 생활기록부는 8포인트 기준 20쪽 분량으로 전 교과의 학습 발당 상황과 창의적 체험활동 특기 사항,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 등이 빼곡히 적혀있다.


나는 지난주에 1차 입력을 한 후 옆 반 선생님께 종합일람표를 넘겼다. 물론 나도 다른 반 선생님의 종합일람표를 받았고. 닷새 간의 점검 기간을 거쳐 오늘 빨간 표시가 된 종합일람표를 인수했다. 곳곳에 빨간 펜이 그어져 있었다. 줄 바꿈이 적절하지 않은 곳에서 되었다든가, 띄어쓰기를 두 번 한 문장이 눈에 띄었다. 나는 NEIS 시스템을 켜고 오류를 하나씩 교정해 나갔다. 생활기록부는 학교 생활을 종합하여 남기는 공식 기록인 만큼 신중해야 한다. 1차 자료 작성자로서 붉은 색으로 표시된 오류가 운동회 선생님 달리기에서 바지가 벗겨진 것처럼 부끄러웠다. 다만, 실없이 웃음을 유발하는 대목도 있어 반성의 의미로 입술을 꾹 눌러 웃음기를 지운다.


1) 성대칭 도형의 성질을 잘 이해하고 있음. -> 흐음, 선대칭 도형이 바른 표현이겠죠? 성대칭 도형은 도대체 어느 나라 도형인가요. 원은 여성이고, 삼각형은 남성인가요. 문득 십이각형의 성별이 궁금해집니다.


2) 을사특약의 과정과 일제에 맞서 싸운 항일 의병의 노력을 잘 설명함. -> 선생님. 무슨 휴대폰 신규 약정 맺으세요? 웬 을사특약입니까. 을사년 가격으로 싸게 해 준답니까? 아무리 키보드에서 'ㄴ'과 'ㅌ'이 위아래로 붙어있다고 해도, 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을사늑약 반대, 대한독립만세.


NEIS에도 성능 우수한 오타 및 맞춤법 기능(기존의 철자점검 기능은 사실상 무용지물)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다. 나의 생활기록부 초안을 점검하여 주신 5학년 3반 심XX 선생님께 심심한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반 편성의 어려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