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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학교의 맛

바빠 죽겠다는 말, 취소할게

by 이준수

어른은 틈만 나면 바빠 죽겠다고 하지만, 정작 아이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바빠 죽겠다는 말이 무색해진다. 학업에 관심이 많고 성실한 축으로 분류되는 아이의 경우 5학년만 되어도 나보다 더 바쁘다. 잠도 나보다 더 적게 잔다. 믿기 힘들겠지만 최근 당사자에게 직접 들은 사례가 여럿이다. 사실을 바탕으로 A의 하루를 재구성해보겠다.


A양은 일곱 시에 기상한다. 손가락으로 눈가를 비벼 보지만 졸음은 달아나지 않는다. 침대에 누운 지 4시간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새벽 3시에 겨우 눈을 붙인 것이다.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어제 유독 늦긴 하였지만, 보통 1시 전후로 잠이 든다. 무슨 12살, 13살이 자정을 넘기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다. 학교에서 6교시를 마치고 하교하면 대략 3시다(코로나 방역 기간에는 2시). 간식을 먹으며 한 시간 가량 휴식을 취하고 방과 후 일정이 시작된다. 학원 두세 곳을 마치면 저녁 시간이다. 밥을 먹고 학습지를 풀거나 화상 수업을 받는다. 혹은 그날 사정에 따라 뒤로 늦춰진 학원 수업에 참석한다. 이렇게 방과 후 학업을 마치면 오후 아홉 시에서 열 시다(학교 숙제가 없다는 전제 하에). 본인도 높은 학업성취도를 획득하기 위한 욕심이 있고, 부모님의 지원도 강력하다.


이제부터가 학업을 잠시 내려놓고 개인 생활이라 지칭할 수 있는 영역이다.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자기 방에 들어가면 대략 열 시 반 전후. 친구와 못다 한 수다(채팅)도 하고, SNS도 확인하며, 게임을 할 수도 있다. A양은 애니메이션 감상과 그림 그리기가 취미다. 단순히 시간을 죽이면서 머리를 식히는 수준이 아니라 진로의 일환으로 진지하게 고민할 정도로 묵직한 취미다. 신작 애니를 챙겨보고, 자신만의 그림 포트폴리오를 구축하려면 시간과 품이 든다. 또한 그런 종류의 활동은 단기간 하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루틴의 일부로서 거의 전 생애에 걸쳐 지속된다. 그 결과 오전 한 시 전후로 잠자리에 드는 패턴이 고착화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성장기에 키 안 큰다, 취미에 과몰입하면 균형감이 무너진다 등등 온갖 우려 섞인 이유를 대며 A양을 만류하려 든다. 하지만 나는 A양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에게는 작가로서의 자아가 있다. 그러나 글을 쓰고 싶다고 아무 시간에나 컴퓨터를 켤 수는 없다. 나는 정해진 시간에 출근을 하고, 수업과 생활지도를 하며, 교과 연구를 하는 등 선생님으로서의 과업이 있다. 또 퇴근하면 아버지이자 남편으로서 갖은 집안일(우리 집은 가사 분담이 1:1이라 내가 처리해야 할 것들이 확실하게 구분된다)과 양육의 의무가 있다. 나는 작가 자아를 지키기 위해 가능한 모든 짬을 동원해 독서하고 글을 쓴다. 특히 글을 쓰는 작업은 집중해서 몰입할 수 있는 시공간적 환경이 필수적이므로 심야, 새벽, 휴일의 자투리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글을 쓰는 대가로 나는 골프와 배드민턴을 즐길 기회를 포기하고, 수면이 한두 시간 줄어들며, 잉여적인 밤 약속을 멀리한다. 모든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러야한다.


나는 A의 여러 욕망을 모두 인정한다. 공부도 잘하고 싶고, 애니도 보고 싶고, 그림도 그리고 싶고, 예쁜 딸 좋은 학생이 되고 싶은 A의 욕망은 내게 자연스럽게 여겨진다. 오히려 A를 말릴 논리를 찾기보다는, A 같은 친구들이 수업 도중 곯아 떨어지지 않게하기 위해서라도 흥미로운 교수법을 연마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누군가에게 내 수업 한 시간은 필사적으로 의식의 끈을 붙잡아야 하는 사투의 장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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