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학교의 맛

배부른 오후의 학급 임원 선거

21.03.09

by 이준수

나는 세상의 모든 선거 중에서 학급 임원 선거가 제일 재미있다. 주민등록증 검사도 없고, 투표장이 어디인지 확인할 필요도 없다. 그야말로 느긋한 가운데 옆 자리에 앉은 친구가 입후보하고 연설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수기로 투표하면 된다. 후보 등록에서 투표, 개표까지 논스톱으로 이루어진다. 당연히 목에 힘주고 앉아 권위적이고 가식적인 표정을 짓는 정치인을 볼 까닭도 없다(이게 가장 마음에 든다).


지난주에 선거를 안내하고 입후보할 친구들은 연설을 준비해 오라고 했더니 7명이 도전했다. 100명 중 7명이 아니라, 22명 중 7명. 경쟁자가 늘면 긴장하거나 동료를 견제할 법도 한데 후보들은 천하태평이다. 흐음. 기세가 좋은 친구들이라고 해야 할지, 판이 커지길 기다리는 축제 기획자처럼 들떠있다. 연설도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미리 작성해 온 연설문을 차분히 읽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다짜고짜 기합을 넣기도 한다.


"제가 회장이 된다면 발에 땀이 나도록 청소를 하겠습니다. 또 부하가 되겠습니다."


누구의 부하가 될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발에 땀이 나올 정도면 오히려 먼지가 더 많이 나오지 않을까? 혹은 무좀에 걸리거나... 같은 생각을 하게 만든 연설이었다. 또 굉장히 짧은 연설도 있었는데, 내용인 인상적이다.


"다른 말은 필요 없고 행동으로 보여주겠습니다!"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밝히지 않은 후보 S는 결국 낙마했다(나는 내심 어떤 행동일지 궁금했는데). 이렇듯 연설회는 다양한 빛깔을 가진 후보의 기질이 두드러지는 시간이었다. 드디어 두근거리는 투표. 후보가 7명이나 나왔음에도 압도적으로 몰표가 나온 건 아니고, 한 두 표 차이로 당락이 갈렸다. 심지어 첫 번째 투표에서는 공동 1등이 나와서, 회장과 부회장을 가르기 위해 두 사람만 후보로 하여 재투표를 했다.


투표지는 이면지를 잘라 만든 종이조각이다. 아이들은 연필로 하나하나 획을 그으며 후보자의 이름을 적는다. 이름을 다 적으면 다른 사람이 볼 새라 두 번 꼭꼭 접어 손바닥 밑에 숨긴다. 내가 어렸을 적에도 저렇게 했던 것 같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아이들의 습관 중 하나 이리라. 나는 비스듬하게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점심 직후의 나른함을 느꼈다. 올해 4학년 4반은 꽤 괜찮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빨간색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고서 책상 사이를 걸었다. 아이들이 툭 툭 내민 투표용지가 아무렇게나 쌓인다. 이권이 달려있지 않은(생활기록부에 한 줄 실린다는 게 이점이라면 이점) 선거와 닮았다. 나는 궁금해진다. 이렇게 신나는 선거를 경험하며 자란 아이들이 삼, 사십 년 뒤에는 어째서 정치라고 하면 이를 부득부득 갈고 사나운 기세로 달려드는 것일까. 어릴 적의 소꿉장난 같은 분위기는 다 깨지고, 물고 뜯는 광경에 질려버려서 일까. 안타까운 일이다.


다음 주에 치러질 전교 어린이회 임원 선거는 제법 번듯한 선거 티가 나서 절차도 정확하고, 신경전도 치열할 것이다. 아무래도 학급 임원 선거보다는 빡빡하겠지. 절차가 엄격한 건 찬성이지만, 분위기마저 딱딱해지는 건 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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