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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학교의 맛

그냥 아는 애라서 하나

21.03.10

by 이준수

5교시가 끝나갈 무렵이면 복도가 슬슬 소란스러워진다. 수업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고, '밖에 누군가 있구나' 하는 두런거림이다. 개학한 지 열흘이 되었으나, 나는 굳이 웅성웅성의 정체를 확인하지 않았다. 그저 우리 반 앞에 화장실이 있으니 사정 급한 이들이 오가는 소리겠거니 여겼다. 적어도 어제까지는.


오후 한 시 반, 하루 일과가 끝나고 청소를 했다. 아이들은 몇 초라도 일찍 하교하기 위해 비질을 서둘렀다. 나는 칠판을 닦았다. 스프레이로 물을 고루 뿌리고, 위아래로 걸레질한다. 몇 년 전만 해도 건식 칠판이라 먼지가 풀풀 날렸는데, 최근 습식으로 바뀌어 진폐증으로 죽을 걱정은 그만해도 된다. 걸레에서 허연 액체가 뚝뚝 떨어지는 참사만 견딜 수 있다면.


학습 주제를 지울 무렵이었다. 원용이가 소리 없이 그러나 미끄러지듯 다가와 속삭였다.


"선생님 제가 이거 닦으면 안 될까요?"


나는 흠칫 놀랐다. 칠판 당번은 기본적으로 담임이 맡는다. 때때로 가벼운 잘못을 저지른 학생이 이삼 일씩 봉사활동 차원에서 칠판 청소를 한다. 그런데 원용이는 지금껏 착실하게 수업도 잘 듣고, 숙제도 잘 해왔다. 게다가 눈빛까지 꽤나 진지하다. 장난 같지는 않다.


"매일 걸레도 빨아야 하고 힘들어. 선생님이 할게."

"저 이거 자격증 있어요. 2학년, 3학년 때도 제가 했다 말이에요."

"자격증이 있구나."


사내아이의 자부심이 담긴 목소리였다. 흠, 어찌하면 좋을까. 자격증까지 있다는데(그나저나 누가 발급해 주었을까). 칠판 걸레질은 단순해 보여도 성실성, 세밀함, 이타심이 없으면 지속하기 어려운 과업이다. 그래도 원용이는 칠판을 닦는 행위, 공동체에 기여하는 과정에서 기쁨을 느꼈던 것 같다. 2, 3학년 때에도 했으니 짧은 기간은 아닌데 여전히 하려는 걸 보아서는.


"그럼, 우선 3월까지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마스터님."


나는 마켓오 검은콩 오! 그래놀라 바를 양손으로 내밀며 고개를 숙였다. 마스터님도 정중히 나의 성의를 수령했다. 그 순간이었다. 낯선 음성이 원용이와 나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우와! 맛있겠다."


처음 듣는 어린아이의 목소리(뭐, 4학년도 어리긴 하지만 더 앳되다). 열린 앞문 측면으로 빠글 머리 하나가 쑥 튀어나왔다. 저학년 남자아이처럼 보였다. 우리는 저학년과 같은 건물을 쓰지도 않는데 무슨 일일까. 의문은 곧 풀렸다.


"누나 청소 다 해가니까 들어오지 말고 밖에서 기다려."


예빈이는 책상 줄을 맞추며 복도를 향해 소리쳤다. 아하, 예빈이의 동생이었군. 나는 빠글 머리를 불러 롤리팝 통을 내밀었다. 골라 먹으라는 뜻이다. 빠글 머리는 싱글싱글 거리며 뛰어왔다. 통통한 손이 사탕 더미를 이리저리 헤집더니 마침내 스크류바 맛을 집어 들었다. 녀석, 배짱도 좋고 눈빛도 마음에 든다. 사탕 통 뚜껑을 닫았다. 어라, 못 보던 여자애가 또 있다. 빠글 머리 옆에.


"너는 누구 동생이니?"

"그냥 얘(빠글 머리) 아는 사람인데요."

"그냥 아는 사이라고? 푸하하. 그래 너도 하나 먹자 그럼."


그렇게 빠글 머리랑 빠글 머리를 그냥 아는 사이인 여자애는 사이좋게 사탕을 물고 퇴장했다. 애들이 가고 나니까 갑자기 나도 먹고 싶어 져서 오랜만에 아무 거나 집히는 대로 입에 넣었다. 콜라맛이었다. 별로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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